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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2월 18일. 이 날은 20세기 전자산업의 모든 근간이 되는 기술이 개발된 역사적 턴어라운드 시점이다. 리 드 포레스트 박사가 이른바 ‘Space Telegraphy'라고 명명된 특허를 취득한 날이기 때문이다. 진공 유리관에 전기의 양극이 걸리는 플레이트 금속과 음극이 걸리는 필라멘트 금속을 두고 그 사이에 그리드라는 제 3 전극을 집어넣어 3극 진공관인 트라이오드(Triode)를 개발해낸 것이다. 3극 진공관의 발명은 장거리 유/무선 통신, 방송 등을 급격히 진보시켰고 이후 트랜지스터라는 증폭 소자가 나오기 전까지 전자산업을 지배했다. 

오디오에서도 진공관의 사용은 빈번했고 굉장히 폭넓은 분야게 걸쳐 사용되었다. 현재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에서도 진공관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우수한 증폭 소자 중 하나고 이제는 4극 Ultra Linear 가 개발된 이후 3극과 4극을 구분지어 선택할 수 있는 진공관 앰프까지 출시되고 있다. 효율 면에서는 당연히 4극 모드가 우수하지만 3극 모드에서의 그 부드럽고 따스한 소리는 제작자와 오디오파일 모두에게 포기 없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3극 진공관을 뜻하는 트라이오드라는 진공관앰프 전문 메이커를 처음 접한 것은 약 5년전 진공관 앰프를 수배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뉴스 한토막 때문이었다. 3극을 뜻하는 트라이오드를 당당히 자사의 이름으로 내건 메이커는 다름 아닌 일본의 야마자키 준이치라라는 3극관 마니아가 대표였다. 재치 넘치는 이름의 트라이오드의 진공관 인티앰프와 시디피가 들려주는 소리는 따스하고 촉촉한 음결로 그 해 겨울 나의 서브 시스템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의 양산형 진공관 앰프 메이커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트라이오드만큼 합리적인 가격대의 제품이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므로 기대도 없었지만 트라이오드를 접하면서 또 한 번 일본의 합리적인 실용정신에 놀랐다. 

트라이오드의 대표는 애초에 자신의 오디오 제작 철학으로 “나는 오디오기기를 악기라고 생각하며 기기의 성능 경쟁보다는 음악을 음악답게 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캐치프레이즈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엄청난 물량투입과 아주 특별한 소자 또는 자신들만의 독보적인 설계를 주장하는 하이엔드 메이커는 아니지만 그 대신 제품의 설계에 오류가 없고 내구성이 뛰어나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기의 전반적인 장점 중 하나로 사용 편의성이 뛰어나며 다양한 기능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번 리뷰의 주인공인 TRV-88SER 이라는 진공관 앰프를 보면 그러한 일본 제작사의 합리적인 실용주의와 뛰어난 완성도 등 음질을 둘 째 치고 설계와 내구성, 만듦새 등에서 일단 좋은 인상을 갖게 만든다.

TRV-88 인티앰프는 출시 이후 TRV-88 SE 버전에 이어 현재 TRV-88SER 버전까지 3세대에 걸쳐 이어져오고 있는 트라이오드의 베스트셀러 모델이다. TRV-88SER 와 기존 SE 버전의 차이점이 당연히 궁금할 터. 불편했던 부분 중 하나인 리모콘이 드디어 추가되었고 최근 불어 닥친 아날로그 LP 붐을 의식한 탓인지 MM 전용이긴 하지만 포노 스테이지가 추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원 트랜스가 더욱 보강되어 기존 버전보다 편의성과 음질 모든 면에서 꽤 많은 향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에 일본에서 설립되어 이제 20년이 갓 넘은, 진공관 앰프 전문 메이커 치고는 그리 오래된 역사는 아니지만 유독 진공관 앰프 그 중에서도 300B 등 3극관 마니아여서 브랜드 이름마저 트라이오드로 지은 대표.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인기를 끈 것은 가장 대중적인 출력관인 KT88을 사용한 TRV-88 시리즈였다.

TRV-88SER 은 앞서 말한 대로 KT88 진공관 네 알을 사용해 푸쉬풀로 구동하는 가장 스탠다드 형태의 진공관 인티앰프 타입이다. 여기에 초단으로 쌍삼극관인 12AX7 1개를 사용했고 12AU7 두 알을 드라이브관으로 채용한 심플한 형태다. 출력은 8옴에서 채널당 45와트의 중출력으로 설계되어 작지도 크기도 않은 수준이다. 후면의 입/출력단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시디피 또는 DAC 등을 연결할 수 있는 라인단이 후면에 2개, 전면에 한 개, MM 포노 카트리지에 대응하는 포노단이 1개 그리고 녹음을 위한 출력이 1개 마련되어 있다. 또한 전면에 헤드폰 출력까지 꼼꼼하게 설계해놓은 모습이다. 스피커 출력단은 6옴과 8옴 등 두 개의 옵션을 마련해 스피커의 공칭 임피던스에 맞게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진공관 앰프의 사용상 편의성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바이어스 조절 방식은 예상을 깨고 고정 바이어스 방식이다. 이번 SER 버전부터 전용 리모콘이 제공되어 편의성이 향상된 점은 특히 환영할만하다. 내부 소자 또한 KOA 정밀 저항과 고품질 커패시터, 스피커 터미널을 채용하고 있다.

 

첫 인상은 자그마한 몸집에 세련된 와인색 컬러 등이 소유욕을 자극한다. 폭 345mm 에 깊이는 320mm, 약 185mm 정도의 높이에 상단 진공관을 덮을 수 있는 덮개가 제공되어 이름 모를 가족과 친구들의 갑작스런 테러와 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다. 무게는 사이즈에 비하면 꽤 무거운 편으로 17kg 정도인데 대부분 트랜스 무게로 짐작된다. 테스트를 위해서 준비한 것은 맨 처음으로 스펜더의 중급 스피커를 준비했으나 공간 특성인지 아니면 매칭 탓인지 딥베이스 재생에서 과도한 저역 양감 덕에 리뷰를 위해 다른 스피커를 찾았다. 

마침 하이파이클럽 홀에 세팅되어 있었던 B&W 805 다이아몬드가 눈에 띄어 바로 낙점되었다. 리뷰용 모니터로서 B&W 만한 스피커도 흔치 않다는 경험 때문이었다. 이 외에 소스기기로는 앰프와 스피커에 비해서 훨씬 더 그레이드 높은 기기들을 사용했다. 뮤직서버로 오렌더의 플래그십 모델인 W20, 그리고 DAC 로는 MSB 의 더 아날로그 DAC을 매칭했다. 이 외에 헤밍웨이 The Creation 등 레퍼런스급 케이블과 BOP 등의 악세서리가 세팅된 환경에서 테스트했음을 밝힌다. 트라이오드 앰프와 시디피는 개인적으로 사용해본 경험도 있지만 트라이오드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어떤 스피커와 매칭해도 저능률의 스피커만 아니라면 상당히 편안하고 윤기 있는 소릴 쉽게 쉽게 들려준다는 점이다. 

카산드라 윌슨의 ‘Another Country'(24bit/96kHz)를 들어보면 음정은 약간 높고 중고역 대역은 화사하면 밝은 편으로 약간 느슨한 중저역에 비해 고역이 달콤하고 촉촉한 편이다. KT88을 출력관으로 사용하는 중출력이지만 대역이 아주 넓지는 않으며 물샐틈없는 현대적인 하이브라이드 하이엔드 앰프와는 추구하는 소리가 대척점에 놓여있다. 특히 음색적인 부분에서는 805 다이아몬드가 여실히 노출시키는데 약간 밋밋해지기 쉬운 스피커의 중고역에 특유의 미음이 가해져 촉촉하고 따스한 온도감을 심어준다. 고역 끝은 롤 오프되며 동그랗게 말려 시종일관 청자를 편안하고 여유 있게 만든다. 

호프 앙상블(Hoff Ensemble)의 [Quiet Winter Night] 앨범 중 ‘Dronning Fjellrose’ (24bit/192kHz)에서는 각 대역의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게 다가온다. 앰프 특성상 소리의 어택 이후 스피드가 약간 느린 편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자기만의 패턴을 가지고 평균적인 스피드를 조화롭게 품격 있게 재 조율한다. 다이내믹스의 낙폭은 크지 않지만 대신 이 녹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홀톤과 스테이징, 악기들의 정위감은 트라이오드 특유의 컬러링과 함께 결합되어 묘한 잔향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현대적인 고해상도과 광대역,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단단한 밀도감은 트라이오드가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다. 트라이오드의 소리는 KT88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3극관에서 느낄 수 있을 법한 맑고 간드러지며 고혹적인 음이다. 대신 3극관보다 스피커 커버리지를 대폭 확장시키고 음악 장르에 구분 없는 다이내믹스 등을 심화시킨 소리다.

[Tutti] 에 수록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과 발레리 게르기에프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등에서 보여주는 다이내믹레인지 폭은 일반적인 솔리드스테이트에 비해서는 작은 편으로 크게 크게 음폭을 그려나가기보다는 대역간의 세밀하고 부드러운 이음매와 마이크로 다이내믹스에서 강점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악과 목관 악기 등의 클래식 악기군의 표면 텍스처는 감촉이 부드러운 실크의 표면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고 유연하며 촉촉하다. Jean-Guihen Queyras와 Alexander Melnikov가 함께 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 5번에서 피아노와 첼로의 울림은 풍부한 하모닉스와 촉촉하고 보플거리는 듯한 질감이 자연스럽게 살아나 깊고 진한 느낌이 배어나온다. 트라이오드 같은 진공관 앰프가 왜 필요한지 되새기게 만드는 장면이다. 

저능률의 북셀프 또는 높은 댐핑을 요구하는 하이엔드 지향의 플로어스탠딩보다는 전통적인 모니터 계열과의 조합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 앰프로 평가된다. 이 외에도 805 다이이몬드 또는 PMC, KEF 등의 모니터에 여유롭고 따스한 음결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대안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작은 서재에 반듯한 디자인의 3/5A 와 함께 메인으로, 또는 메인 시스템 곁에서 종종 메인 시스템보다 더 매력적인 튜브 사운드의 세계로 안내할 음악의 언어의 매개체로서 트라이오드의 팔색조 매력은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