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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BAT의 대표 빅토르 코멘코(Victor Khomenko)는 처음부터 비즈니스 기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사의 네이밍에서부터 풀밸런스에 대한 기조를 분명히 선언한 후에, 6C33C, 6H30과 같은 시각적으로나 성능에서 신세경과 같던 러시아제 프리미엄 관들의 지속 공급 루트를 하이엔드 진공관 업계에 연결시켰으며, 던래비와 같은 상징적인 제품과 커플링을 해서 화려한 쇼케이스를 이끌어 낸 인물이다. 1995년 CES는 조금 과장하자면 BAT를 위한 무대였다고도 할 만큼 낯선 이름의 BAT는 수많은 스폿라이트의 대상이 되었다.

 

VK-23SE는 BAT가 시간이 갈수록 진보와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메시지와도 같은 지표 제품이다. 진공관으로 출범한 BAT가 솔리드 부분에서도 질적으로 양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갖추었다는 의미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본 제품이 갖는 의미로서 다수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제작되었다는 인상이 분명하다. 본 제품에는 ‘낙수효과’와 같은 동사의 상급기로부터 이전된 BAT의 고급 기술들이 모두 투입되어 있으면서도 소수사용자를 위한 옵션을 생략한 BAT의 의식적인 ‘이코노미’ 버전이다. 여전히 가격의 절대치는 높지만, 기존 BAT의 사용자들이라면 VK-23SE의 가격은 ‘착해’ 보일 것이다.

VK-23SE는 BAT의 여러 제품 중에서 ‘솔리드 스테이트 라인스테이지’ 프리앰프의 포지션을 갖는다. 애니버서리 버전이라든가 하는 별도의 표기도 없고 스스로 굳이 의식하려 하지 않아 보이지만, 올해가 마침 BAT가 출범한 지 20년째 되는 해라서 본 제품은 동사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첫 제품이라는 히스토리를 갖게되었다. 파워앰프 VK-225SE와 페어를 구성해서 출시한 본 제품을 보고 듣고 있자니, 전술했듯이 이전의 어떤 제품보다도 컴팩트한 구성에 많은 내용을 담고자 했음이 잘 전해진다.

본 제품은 동사특허인 유니스테이지(Unistage)구성의 싱글 게인스테이지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통상적인 솔리드앰프의 N-P-N 증폭방식이 갖는 느리고 왜곡이 생기는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N극 바이폴라 트랜지스터 하나만을 사용해서 고압을 걸어 증폭하는 방식이다. 대용량의 트랜지스터와 안정적인 전류공급만 보장된다면 프리앰프에서는 적극활용할 만한 방식으로 최근 일부 하이엔드 브랜드들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발견되고 있는 방식이다. 

소스신호가 유니스테이지를 통해 증폭되는 전후의 독자적인 회로 구성과 고급 소자의 사용으로 BAT 고유의 품질을 구현하고 있는데, 특히 플래그쉽 ‘렉스Ⅱ’에 사용된 션트 볼륨 어테뉴에이터를 도입해서 140스텝에 걸쳐 0.5 dB씩 이동하는 정밀한 볼륨컨트롤은 본 제품을 장식하는 꽃과도 같은 부분이다. 비샤이의 벌크 포일 저항을 사용한 특급 볼륨 어셈블리는 프리앰프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하고 왜곡이 적은 볼륨으로 명성이 높다. 

또한 방열효과가 뛰어나고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좌우 페어로 장착된 황금빛 출력트랜스는 스웨덴의 룬달(Lundahl)사의 LL2747 특주품이며 본 제품을 통해 프리앰프 내의 증폭신호를 고품질로 푸쉬풀 출력한다. 알려진 바, 룬달의 제품은 종종 다이나믹하면서도 명료하고 세부묘사가 뛰어난 것으로 하이엔드 앰프의 매칭트랜스로 널리 사용되곤 한다. 또한 본 제품은 별도의 피드백 회로나 증폭 버퍼회로를 두지 않는 최로구성으로 제작되어있다.   

VK-23SE는 동사의 상급기에 구현된 핵심기술을 이식시켜 어플리케이션을 넓힌 컨셉이라고 하면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리가 빠를 것으로 보인다. BAT의 제품들은 물론이고 타사의 파워앰프나 소스기기와도 연계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다양한 사용자에 어필하도록 제작되어 있다. 본 제품의 내부를 상급 진공관 프리앰프와 비교하면 상당히 심플해 보일 것이다. 중앙을 가득 메우고 있던 대용량 커패시터들도 작은 사이즈로 한산할 만큼 여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좌우대칭구조로 기판을 배열하고 있다는 점도 시각적인 BAT의 상징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밸런스 및 언밸런스를 모두 지원하고 있는 본 제품의 입출력은 상급기보다 폭이 넓다. 기본적으로 밸런스 및 언밸런스 출력을 지원하고, 테이프 아웃 언밸런스도 두고 있다. 입력은 언밸런스가 3개, 밸런스도 2개나 두어 디지털 플레이어 및 AV 소스들을 동시에 버라이어티하게 사용할 수 있다. 일반 프리앰프와 유사규모를 갖는 포노앰프는 언제나 그렇듯이 별도 옵션이다.  

섀시의 사이즈도 그렇지만 전면 패널은 대부분의 BAT 프리앰프의 포맷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세로로 3등분한 구획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브랜드 로고와 고유의 블루 LED 패널창, 그리고 5개의 입력 선택 버튼을 두었고, 왼쪽에 파워스위치와 오른쪽에 볼륨을 둔 디폴트 패널 구성이다. 블랙과 실버 마감 두 가지가 제공되지만 보편적으로 블랙톤을 많이 사용하는 본 제품의 미세한 알루미늄 브러쉬 헤어라인 마감은 볼 때마다 느끼지만 언제나 하이엔드스럽다. 좋은 소리가 나올 듯한 모습으로 준비가 되어있다고 얘기하고 있는 듯 하다. 뭔가 냉정해 보이지만, 이 제품을 통해 나오는 소리는 솔리드 프리앰프의 일반적인 성향과는 다른 따뜻함이 있다. 

 

VK-23SE의 사운드 특성은 기본적으로는 스피디한 온기라고 해야할 것 같다. 한정된 시청의 특성상 타사 파워앰프 및 프리앰프와 조합을 통한 시청이 다소 아쉽지만, 시청곡이 늘어나면서 파워앰프와 스피커의 구동상황을 감안할 때 본 제품의 특성이 보인다. 기존의 BAT 프리앰프나 파워앰프의 시청경험을 감안해 볼 때 특히 그렇다. 제품의 시청은 페어로 개발된 동사의 VK-225SE와 연결해서 아발론의 이데아로 시청했고, 소스로는 루민의 T1의 아날로그출력을 그대로 밸런스 연결해서 시청했다. 케이블은 모두 선야타 리서치의 지트론 코브라를 사용했다. 

시청은 디자인 & 오디오 메인시청실에서 진행했는데, 시청공간의 특성상 직사각형의 시청실 거의 중앙에서 시청을 하느라 잔향이 다소 많게 느껴지는 곡들이 일부 있었다. BAT 제품의 사용자에게는 익숙한 내용이겠지만, BAT 제품은 프리히팅은 물론 몇 가지 음원을 충분한 음량으로 연주해보는 절차가 매우 중요한 대표적인 제품이다. 그 전후의 사운드품질은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베이스가 단정하지 못하게 나온다던가 스피커를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 등은 준비가 잘 되어있지 못한 상태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약 30분이 지나면서 같은 곡을 다시 들어보게 할 만큼 반전이 시작되었으며 한 시간이 지나자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탓하기 어려운 소리를 들려주었다.

 

프리앰프의 사운드품질만을 분리해서 판단했을 때, 본 제품은 결이 곱고 에어리한 순간을 잘 포착해서 들려준다. 필자가 알고 있는 BAT 프리앰프의 장기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뛰어난 마이크로 다이나믹스를 들려준다.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쉰의 ‘Killing In the Name’ 도입부 서주가 끝난 정적 부분의 베이스는 약음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적극적이고 선명해서 탄력있는 프레이징으로 들린다. 의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이 부분의 연주는 굳이 모니터용으로 사용할 일도 많지 않은데, 그 이유가 제품간에 구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느낌을 리얼하게 살려주는 경우는 꽤나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BAT 특유의 스타일로 두텁고 위력있는 베이스보다는 다소 섬세하게 질감을 살려 듣는 이 부분의 베이스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이 다소 가늘게 느껴지지만 정적 속에 응집력있는 떨림이 정교해서 의외의 결과를 느낄 수 있었다.

 

필자의 시청곡들을 듣기 이전에 오히려 필자가 반복해서 서버에서 찾아내는 곡들은 주로 녹음이 그만그만한 록음악들이었는데, 구분이 애매한 부분을 어떻게 들려줄 지 곡을 거듭할 수록 궁금증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 제품은 록음악에서도 특유의 미세한 하모닉스도 잘 표현하고 있었는데, 마치 포토샵으로 만든 액자의 그림자를 연상케 하는 미세한 3차원 음상을 쉽게 떠올리곤 했다.

그룹 아시아의 ‘Only Time Will Tell’ 도입부에서 저프리 다운스의 키보드는 꽤나 에어리하게 울려서 허공에서 울려오는 음원의 느낌을 준다. 짧은 잔향을 선명하고 미세하게 구분해서 약화시키는 정교한 하모닉스가 크게 기여하고 있어 보인다. 이 연주가 이렇게 입체적으로 들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간혹 최상위 진공관앰프들에서 관찰되는 고급의 하모닉스이다. 키보드 뿐 아니라 보컬의 울림도 연장선상에 있어서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고급스럽게 연출되며 웅장한 프레즌테이션과 결합되어 매력적인 ‘Only Time Will Tell’이 되었다. 

 

본 제품을 통한 정적의 느낌은 녹음의 품질이나 스타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물론 해상도가 뛰어나고 배경이 정숙한 녹음이라면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그래서 얻어지는 뛰어난 레이어링과 투명한 프레즌테이션은 최고 수준이다. 잘 만들어진 밸런스 회로의 효과가 고순도의 경로를 통해 구현되는 순정 음원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빌 에반스 트리오의 ‘My Foolish Heart’를 96/192 리마스터 품질로 시청해보면 도입부의 하이햇과 브라스의 소위 깨알같이 번져가는 입자의 느낌이 무대의 반경과 깊이를 잘 짐작케 해준다. 디테일과 투명감이 더해져서 무대의 뒤쪽과 연주자가 투명한 레이어로 겹쳐보이는 느낌을 쉽게 연출한다. 무대가 사실적으로 떠오르자 베이스에서 탄력과 에너지가 응집력있게 실리게 되었다. 모호한 다이나믹스가 위력을 주는 연주가 아니라 사실적인 연주가 무대 위에 펼쳐지는 매우 독특한 느낌이다. 

 

N단 하나만으로 설계한 유니스테이지 구성으로 순도높은 스피드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본 제품은 얼마 만큼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출력하고 있을 지 궁금했는데, 느린 패시지의 곡들은 프리앰프에서의 다이나믹스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곤 한다. 울림이 큰 부분에까지 아주 잘 정돈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 깊이 내려간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찰리 헤이든과 팻 메스니의 ‘Waltz for Ruth’는 베이스가 큰 반경으로 깊게 울린다. 선이 약간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고 공간의 상황이 울림을 다소 크게 만들 때가 있긴 했지만 질감의 표현이 구체적이고 큰 동작으로 줄이 당겨지고 놓여져서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기타 또한 투명해서 이 음원이 의도했을 만큼의 좋은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베이스나 기타 모두 음상이 작게 나타나는 모습 또한 연주공간에서의 울림을 구체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90년대 진공관 앰프의 신경향을 주도한 꽤나 혁신적인 브랜드로서의 BAT의 위상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퇴색하지 않았으며 점차 영역을 넓히고 있다. 향후 네트워크 관련 제품 등 부문을 넓히는 것도 예상되지만 앰프의 영역에서는 점차 대중화를 의식하고 있어 보인다. 가격을 낮추면서도 품질을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존 BAT 팬들로부터 많은 호감을 얻어낼 것으로 보인다. 특히 MOSFET을 사용해서 BAT 진공관의 사운드품질을 연장시켰다는 점은 본 제품에 대한 시선을 가장 관심있게 이끌어 낼 것으로 예상된다.

제품의 핵심과도 같은 고유의 진공관들을 제외시킨 BAT제품의 경쟁력을 따져봤을 때,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의 제작은 BAT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 지 모르겠지만 그 위험한 항로를 구축해서 대형 포트폴리오를 완성시키게 된 것이다. 진공관 전문업체에서 만든 솔리드 앰프가 아니라 솔리드로 구현한 고유의 진공관사운드라는 칭송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일 지 모르겠지만, 디지털 증폭기술을 도입하며 인티앰프가 다시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은 파워앰프를 중심으로 한 기술발전의 영향이 축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해도, 프리앰프에서의 투명도를 손상받지 않는 차폐기술이 지원하지 않았다면 불가한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만큼의 품질이 출력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 증거를 BAT의 보급형 프리앰프를 보면서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