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어쩌다 오디오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되도록 이쪽에 관한 화제를 올릴 생각이 없지만, 간혹 오디오가 화제가 되면,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만 듣고도 대부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케이블의 중요성, 전원의 문제, 진동의 처리 등, 미세한 부분에도 놀라지만, 아직도 진공관 앰프라던가 혼 타입 스피커가 엄연히 활약하고 있다는 데에 또 놀란다. 대체 오디오라는 세계는 뭐란 말인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경우도 있다. 정말 오디오는 이렇게 케케묵고, 황당무계한 물건일까?

 

왜 이런 말을 꺼내는가 하면, 이번에 소개할 WHT의 PR2가 혼 타입 스피커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관을 살펴보면 상단에 혼 자체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대체 혼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한데 WHT의 약자가 “Wide Horn Technologies”의 약자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뭐 빈티지 혼 타입 스피커를 이리저리 응용해서 대충 만들어낸 스피커가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참고로 동사를 주재하는 마크 모즈가와(Mark Mozgawa)씨로 말하면, 동시에 PSC 케이블을 만들고 있다. PSC! 케이블 좀 안다는 분들이라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만한, 하이 퀄리티에 만듦새가 좋은 브랜드다. 또 케이블은 최첨단 오디오 이론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오디오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양반이 스피커를 과거의 낡은 기술로 만들 리가 없다.

그럼 대체 왜 이 분이 혼 타입 스피커에서 영향을 받고, 그 전통을 계승하려 하는지 다시  한 번 체크해보자.

원래 이 분은 뮤지션이다.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기사를 살펴보면 베이스 기타로 추론이 된다.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1970년대에 이 분은 밴드와 함께 많은 곳에 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쓰려는 스피커 박스가 운송 중 실종되는 바람에 부랴부랴 다른 스피커를 구해야 했다. 그러다 장비 담당하는 친구가 큰 혼 타입 스피커를 가져왔다. “J Bin”이라는 모델이다.

사실 공연장에서 쓰는 PA쪽 스피커들은 내입력에 강해야 하고, 스피드와 에너지가 출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구닥다리 혼 타입 스피커라니! 일단 한숨부터 나왔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스테이지에 세팅을 했다.

정작 놀란 것은 실제 공연에 들어갔을 때였다. 놀랍도록 빠르고, 다이내믹하고, 명징한 베이스가 나왔던 것이다. 덕분에 함께 리듬 섹션을 구성한 드럼과 피아노쪽에서 연신 원더풀 찬사가 나왔다. 어쨌든 이 스피커를 갖고 이후 3주간에 걸쳐 멋진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 후, 분실된 스피커를 다시 찾아서 연결해보니 전혀 감이 달랐다. 부밍이 많고, 왜곡이 심한 음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이런 스피커를 갖고 그간 연주했단 말인가 반성이 될 정도였다.

사실 마크 모즈가와씨로 말하면,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다. 스튜디오와 스테이지 장비에 밝고, 전자와 물리학 등에도 조예가 깊다. 그러므로 자기 나름대로 PA용 유닛을 이용해서 “J Bin”과 유사한 스피커를 직접 제조한 것은 자연스런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폴디드 혼과 셀레스천의 12인치 우퍼 두 발을 사용해서 좀 더 콤팩트한 사이즈로 만들었다. 이것을 갖고 당연히 공연장에서도 사용했다.

그러다 점차 혼 타입 스피커에 매료가 되었고, 동시에 하이파이쪽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PA용 드라이버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공간을 커버하는 방향으로 제작되었다. 반면 하이파이로 말하면, 고작해서 2~6미터 정도의 길이만 해결하면 된다. 대신 질감이나 디테일 등 세밀한 부분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사실 과거의 명 유닛이라는 것도 그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PA용이다. 이런 것을 갖고 빈티지 오디오다 뭐다 해서 집에서 길들여 쓰려고 한다.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후, 그는 하이파이쪽 비즈니스에 뛰어들어 단기간에 150개 이상의 스피커를 들어본다. 그중 그의 성에 찬 것은 겨우 3개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는 멍청하거나 약하거나 물러터졌다. 스튜디오 마스터급의 사운드 재생은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현황은 오히려 그에게 용기를 줬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스피커를 제조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94년경의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의 요구에 맞는 드라이버를 구할 수 없었다. 첫 번째 항목인 감도라는 면에서조차 그를 만족시키는 제품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10년의 세월이 그대로 흘러갔다. 그 사이, 새롭게 오디오 이론을 공부하고 재정립하는 가운데, 드라이버, 인클로저, 크로스오버 등 여러 요소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켜서 나온 제품이 바로 PR1. 2004년에 CES에 정식 데뷔하면서, 이후 WHT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어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만난 PR2는 그 후속작에 해당된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뮌헨 쇼에 전시된 WHT의 음을 개인적으로도 무척 인상깊게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혼 타입이 문제가 되는가 한번 짚어보자. 일단 두 개의 스피커가 있다고 하자. 하나는 감도가 87dB이고, 또 하나는 94dB다. 아무래도 전자가 앰프 밥을 더 먹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오로지 두 스피커의 차이는 요구되는 출력이 다르다는 것뿐일까?

실제로 87dB의 경우, 약하게 파워가 전달되면 드라이버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94dB짜리는 어쨌든 반응을 한다. 미디엄 정도의 출력으로 두 스피커를 구동해보면, 전자가 다이내믹스를 고작 3개의 단위로 나누는데 반해, 후자는 7단계 이상으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영상쪽에서 계조 표현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같은 컬러라고 해도 여러 단계로 나눠서 표현하는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스피커에선 다이내믹스의 표현이 중요하고,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계조로 나눌 수 있냐가 관건이 된다. 그런 부분에서 감도가 높을 수록, 다이내믹스의 표출도 좋아지는 것이다. 참고로 본 기는 무려 100dB의 감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감도라는 면뿐 아니라, 저역의 묘사력도 문제가 된다. 이를 위해, WHT는 과거 백 로드 혼의 장점을 개량시킨 “J Scoop”이라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중저역의 에너지를 일종의 혼처럼 발산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특별한 고안을 한 것이다.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본 기의 하단부는 커다란 개구부가 나 있다. 여기에 미끄럼틀처럼 위에서 경사를 갖고 밑으로 쭉 이어지는 커브가 보인다. 이 부분이 바로 “J Scoop”인 것이다. 실제로 중저역 드라이버에서 발생하는 음의 2/3는 이쪽으로 전달되어서 밖으로 배출된다.

이 스쿠프를 보다 제대로 만들기 위해, 동사는 호주에서 나는 특별한 하드우드인 자라(Jarrah)목을 동원했다. 성형이 쉽지는 않지만, 일체의 로쓰와 왜곡 없이 음을 전달하는 도구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한편 인클로저를 좀 더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HDF, 그것도 강도가 무척 높은 것을 채용해서 정밀하게 CNC 머신으로 가공했다. 이후 음향적인 고려를 위해 위와 앞 부분에 고급 천연 가죽을 덧대었다. 푸조 승용차에 투입되는 가죽이라고 한다. 또 수 차례에 걸쳐 피아노 래커를 칠해서 고급스러움을 더한 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어서 드라이버를 보면, 상단에는 네오 리본 트위터가 장착되어 있다. 이것이 커버하는 주파수 대역은 1250Hz~42KHz. 일종의 수퍼 트위터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10인치 미드베이스는 페이퍼 콘을 채용해서 감도를 무척 높인 바, 밑으로 26Hz까지 떨어진다. 이래서 결국 26Hz~42KHz라는 광대역이 투 웨이 스피커의 방식으로 구현된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혼 타입 스피커를 보면, 대역이 무척 좁다. 고역은 고작해야 17Hz에서 끊어지기 일쑤다. 또 저역은 대개 50Hz에서 맴도는 형국이다. 인클로저가 크고, 혼의 위세가 등등해서 상당한 대역을 커버할 것 같지만, 요즘 나오는 북셀프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따라서 혼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광대역을 실시한 점은 본 기의 최대 미덕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미드베이스의 경우, 일체 크로스오버를 걸지 않았다. 앰프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높은 감도는 이래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는 것이다.

본 기는 감도가 높은 만큼, 실제로 1W 정도의 출력으로도 구동이 된다. 동시에 400W의 강인한 출력에도 견딘다. 그만큼 사용자가 요리할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한 것이다. 통상진공관 앰프나 소출력 클래스 A TR과 매칭시키는데, 어떤 제품을 사용하든 양질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번에는 방향을 달리해서 T+A에서 나온 대출력 앰프를 걸어봤다. 역시 빼어난 음을 들을 수 있었다. 시청에 동원한 라인 업은, 앰프에 T+A의 P3000 프리와 A3000 파워다. 여기에 PS3000 전원부를 더한 내용이고, DAC도 PDP3000으로, T+A의 제품을 사용했다. 한편 네트워크 플레이어는 오렌더의 N10이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브람스 <헝가리 무곡 No.1> 아바도 지휘

-비발디 <사계> 이 무지치

-패트리시아 바버

-레드 제플린

Claudio Abbado - Brahms Hungarian Dance No.1 

우선 브람스를 들으면, 무곡인데도 불구하고, 음울하고, 고독한 분위기가 가득한 데에서 이색적인 느낌을 받는다. 장중하게 몰아치면서도 스피드가 발군이다. 리얼 타임으로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을 듣는 듯하다. 또 전통적인 혼 타입 스피커들이 음장에서 약점을 보이는데 반해, 본 기는 그런 부분이 일체 없다. 잘 조율되고, 밸런스가 좋으며, 음장이 풍부한 음이 확실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브람스라는 작곡가의 외롭고, 우울한 분위기가 솜씨 좋게 다듬어져서 나오고 있다.

이어서 이 무지치의 역사적인 연주로 비발디를 들어본다. 거의 60년 전의 녹음이지만, 덕분에 아날로그 테잎의 히쓰 음도 약간 들리지만, 매우 싱싱하고 활기차다. 또 리본 트위터지만 의외로 직진성도 좋아서, 이런 부분에 대한 우려는 지워도 좋을 것같다. 무엇보다 저역의 반응이 빨라, 과연 “J Scoop”의 장점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덕분에 전대역에 걸쳐 통일감이 넘치는 반응을 엿볼 수 있다.

Patricia Barber - Black Magic Women

패트리시아 바버의 노래엔 묘한 분위기가 숨어있다. 정통파 재즈라기보다는, 다소 무속적이고, 주술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음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발라드 댄스라는 장르를 만나게 된다. 어떤 면에서 바버는 그 원형에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나른하게 배후를 감싸는 올갠 위로, 기타, 퍼커션 등이 가지런히 얹힌다. 그러나 참 단촐하고, 수수하다. 에너지를 발산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마다 주역이 되는 악기에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애드립의 바톤 터치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포착이 된다. 또 마성이 가득한 바버의 보컬은 잊을 수 없는 뒷맛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레드 제플린. 역시 타격감이 일품이다. 단순히 드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공기감이 흔들리고, 이쪽으로 확실하고 단호하게 어택해온다. 거기에 공격적인 베이스가 어우러져, 이 밴드 특유의 야성미가 물씬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어그레시브하지는 않다. 보컬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확한 타이밍으로 발성한다. 듣다 보면 매우 정교한 컴비네이션이 발견되는데, 그 정도로 밴드의 기량이 무르익은 상태. 그 절정의 하모니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발현된다. 과연 온고지신. 결코 이 제품은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빈티지의 장점과 하이엔드의 미덕이 기분좋게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