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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파토스(Pathos) 앰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앰프를 만들 수 있을까’이다. 모델마다 디자인은 천차만별이지만, 진공관, 방열판, 섀시, 그리고 파토스 앰프의 강렬한 상징이라 할 붉은색 커패시터가 일궈내는 조형미와 색감이 일관되면서도 대단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8옴에서 35W 출력을 내는 인티앰프 ’T.T.’였다. ‘Twin Towers’라는 모델명 그대로 쌍둥이 타워처럼 자리잡은 검은색 히트싱크와 크롬 마감의 섀시, 붉은색 커패시터, 양 사이드 갈색 원목의 조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번 시청기 ‘InPol Heritage’ 인티앰프도 빼어난 외모를 자랑한다. 방열 구멍이 촘촘하게 뚫린 흰색 섀시에 가지런히 자리잡은 진공관 4발과 붉은색 커패시터 4개, 전면 상단에 자리잡은 디지털 표시창과 큼지막한 볼륨 노브 조합이 그냥 ‘파토스’표다. 여기에 사명 ‘PATHOS’로 디자인한 양 사이드의 히트 싱크라니. 사실 이 앰프는 지난 5월 뮌헨오디오쇼의 파토스 부스에서 잠깐 들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파토스 스피커 ‘Frontiers’를 낭랑하게 울리던 그 황홀한 자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기본 팩트 체크”

‘InPol Heritage’ 인티앰프는 앞단의 전압증폭에 진공관, 뒷단의 전력증폭에 파토스 전매특허인 ‘InPol’(인폴) 출력회로를 써서 8옴에서 80W를 내는 클래스A 증폭의 하이브리드 앰프다. 옵션으로 ‘HiDac EVO’ 모듈을 선택하면, 최대 32비트/384kHz(PCM), DSD128 디지털 음원을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할 수 있다. DAC칩은 ESS사의 ‘SABRE 9018K2M’을 썼다.  

진공관은 초단에 ECC803S, 드라이브단에 6H30을 채널당 1개씩 썼다. 인폴 출력회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트리플 싱글 엔디드 결속, 클래스A로 작동하는 MOSFET을 풀 밸런스로 배치했다. 게인(언밸런스 33dB, 밸런스 39dB)은 이미 진공관 전압증폭단과 드라이브단에서 확보한 상태이며, 인폴 출력회로는 단지 스피커 구동을 위한 추가 전류만을 보태준다. 네거티브 피드백(NFB)도 일체 걸지 않는다.

전면에는 좌우 출력 파워미터와 기기 내부온도, 볼륨 수치, 게인(4가지 중 선택) 등이 표시되는 디지털 표시창과 핸들 형태의 볼륨노브가 달렸다. 리모컨으로도 볼륨 조절이 되지만 볼륨 노브를 돌리며 ‘차르르르’ 소리를 듣는 맛도 좋다. 입력단은 밸런스(XLR) 2조, 언밸런스(RCA) 4조가 마련됐으며, 스피커 연결을 위한 바인딩 포스트는 채널당 2조씩을 갖춰 바이와이어링에 대응토록 했다. 프리앰프로 쓰기 위한 프리아웃단(RCA, XLR)도 마련됐다. 옵션인 ‘Hi-Dac EVO’ 모듈에는 디지털 입력단자로 동축, 광, USB B, 이더넷 포트 등이 마련됐다.

‘InPol Heritage’는 또한 지난 1994년 설립된 파토스의 현행 인폴 인티앰프 라인업 중 가장 높은 출력을 자랑하는 최신예 모델이기도 하다. 물론 가격도 가장 세다. 낮은 가격부터 ‘InPol Remix MK2’(20W. 이하 8옴 기준), ’T.T. Anniversary’(35W), ‘InPol2’(45W), 그리고 ‘InPol Heritage’(80W) 순이다. 모델명에 ‘Heritage’(유산)가 들어간 것은 인폴 출력회로에 대한 파토스의 자신감의 발로이자, 파토스의 공동 설립자이며 인폴 출력회로를 탄생시킨 고(故) 지아니 보리나토(Giani Borinato)를 기린다는 의미도 있다.

한편 인폴 파워앰프(모노블럭)로는 ‘InPower MK2’(120W)와 ‘Adrenalin’(200W)이 있다. 물론 모두 퓨어 클래스A 증폭이다. 이에 비해 국내에 진작 소개됐던 ‘Classic One MK3’(70W), ‘Classic Remix’(70W), ‘Ethos’(100W), ‘Logos MK2’(110W) 등은 인폴 출력회로 대신 클래스AB 증폭의 솔리드 출력단을 채용한 인티앰프들이다. 물론 앞단의 전압증폭에는 진공관이 투입됐다.

“파토스 사운드의 첫 관문, 진공관”

‘InPol Heritage’를 비롯해 인폴 출력회로가 채택된 파토스 앰프를 들어보면 무엇보다 ‘깨끗한 사운드’와 ‘정숙한 배경’이 가장 두드러진다. 전형적인 클래스A 증폭, 싱글 구동의 진공관 앰프에게서 발견되는 덕목들이다. 그것도 EP-IP 곡선이 예쁘게, 리니어하게 나오는 3극관 앰프에서 느껴지는 그런 성향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파토스의 인폴 앰프의 증폭은 앞단의 진공관에서만 이뤄질 뿐이기 때문이다.

올 뮌헨오디오쇼에서 본격 출격한 ‘InPol Heritage’의 경우 초단 전압증폭관은 텅솔의 쌍삼극관 ECC803S(안쪽 2개), 드라이브관은 소브텍의 쌍삼극관 6H30(바깥쪽 2개)을 각 채널당 1개씩 투입한 2단 증폭 구성이다. ECC803S는 프리앰프단에 많이 쓰이는 쌍삼극관 12AX7보다 노이즈와 험이 적은 고품질관으로, 전압증폭률(뮤)이 무려 100에 달하는 하이게인관이다.

이에 비해 드라이브관인 6H30S는 뮤는 15로 낮지만, 플레이트 저항이 840옴으로 낮고 전류증폭률(gm)은 18mA/V로 높다. 드라이브관은 뒷단의 출력단을 말 그대로 드라이브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플레이트 저항은 낮고 gm은 높을수록 좋다. 1990년대 BAT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6H30이 하이엔드 앰프 드라이브관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유다.

참고로 현행 파토스의 인폴 인티앰프와 파워앰프에 투입된 진공관을 간략히 표로 정리해봤다.

“파토스 사운드의 완성, 인폴 출력회로”

이제 지금까지 몇차례 언급했던 ‘인폴’ 출력회로를 짚고 넘어가자. ‘InPol’은 이탈리아어로 ‘Inseguitore Pompa Lineare’, 영어로 옮기면 ‘Linear Pump Follower’다. 필자가 파악하기에는, ’소스 팔로워 방식으로 결합된 3개의 파워 MOSFET을 통해 리니어한 출력 특성을 보이는 회로’임을 나타내는 작명이다. 클래스AB로 증폭되는 수많은 하이브리드 방식의 솔리드 출력단과는 달리, 싱글 엔디드 구동(트리플 구성), 클래스A 증폭이 이뤄지는 점이 가장 큰 특징. 풀 밸런스 설계이기 때문에 이 인폴 출력회로는 채널당 2개씩 투입된다.

여기서 잠깐. ’소스 팔로워’(Source Follower)는 트랜지스터의 드레인(Drain)이 아니라 소스(Source)에서 출력신호를 뽑아내는 방식. 진공관으로 치면 캐소드 팔로워(Cathode Follower)이기 때문에 플레이트 팔로워(Plate Follower) 방식과는 달리 증폭도가 ‘1’이 채 안되지만 위상은 그대로 가져간다. 출력 임피던스가 크게 낮아지는 장점도 있다. 따라서 인폴 출력회로의 핵심은 3개의 파워 MOSFET을 이렇게 소스 팔로워로 연결, 트리플 싱글로 구동시키면서 바이어스 전류를 충분히 줘 전체 출력회로가 클래스A로 동작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폴 회로는 기본적으로 전력증폭단이므로 전압증폭(게인)은 이뤄지지 않지만 전류증폭(P=V x I)은 이뤄진다. 즉, 인폴 출력회로는 앞단의 진공관을 통해 이뤄진 전압증폭 신호의 순결함을 유지하면서, 솔리드 스테이트 클래스A로 동작하는 전류증폭을 통해 스피커 구동력과 리니어한 출력 특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설계인 것이다.

그런데, 파토스의 인폴 출력회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최종 출력단에 대형 커패시터를 투입했다는 것. 파토스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색 전해 커패시터들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전원부에 평활용으로 투입되는 커패시터만큼이나 큼직한 것들을 사용, DC 차단은 물론 전체 회로에 충분한 전류를 공급해주는 일종의 에너지 창고 역할을 겸하게 했다. 따라서 인폴 출력회로는 기본적으로 커패시터 커플링 방식으로 스피커와 연결되며, ’InPol Heritage’의 경우 풀밸런스 앰프이기 때문에 이 커플링 커패시터가 채널당 2개씩 투입됐다.

또한 ‘InPol Heritage’ 내부사진을 보면 붉은 칠이 된 대형 초크트랜스(채널당 1개)가 눈길을 끄는데, 이 역시 평활용이 아니라 ‘로우 패스’(직류통과) 주파수를 최대한 낮춤으로써 인폴 출력회로 전체의 임피던스를 더욱 낮추기 위한 설계로 보여진다. 잘 아시는대로, 코일을 통과하는 주파수값이 높아질수록 코일의 저항성분, 즉 인덕턴스는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

“시청”

과연 ‘InPol Heritage’는 어떤 사운드를 들려줬을까. PMC의 3웨이 스피커 ‘IB2 SE’에 물려 집중 시청했다. ‘IB2 SE’는 공칭 임피던스 4옴에 감도 89dB를 보인다. 소스기기는 웨이버사의 ‘W NAS3’를 사용했다.  

Georg Solti - Mahler Symphony No.2

Chicago Symphony Orchestra

‘InPol Heritage’ 인티앰프의 첫인상은 매우 조용하며 음이 깨끗하다는 것. 앞단에 진공관이 있어 따뜻한 온색 계열의 사운드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늘한 느낌이 강하다. 특히 음의 윤곽선이 선명하다못해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예리하고 음끝이 야무진 점이 인상적. PMC 스피커에서 음들이 얇게 슬라이스돼 유려하게 흘러나오는 대목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 음원에 담긴 정보를 남김없이 긁어와 증폭을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일체의 착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팀파니 연타의 타격감과 양감을 보면 역시 클래스A 증폭의 80W 출력답다. 묵직한 한방을 너무나 쉽게 터뜨려준다.

Arne Domnerus - High Life

Jazz At The Pawnshop

탬버린의 생생한 금속성 울림, 색소폰의 푸근한 촉감이 제대로 전해진다. 기본적으로 앰프와 스피커 모두 광대역이다. 사운드스테이지와 각 악기들의 이미지를 세밀하게 펼쳐내는 스타일이며, 연주의 세세한 아티큘레이션도 잘 드러난다. 초대형 화면은 아니지만 4K UHD 화면인 것은 분명하다. 색채감과 음영이 아주 좋다. 이 곡에서도 노이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음이 있는 부분과 음이 없는 부분의 표현력이 마치 고해상도 음원을 듣는 듯한 것도 특징. 음 앞에 음, 음 뒤에 음을 투명하게 배치하는 실력 또한 출중하다. 전체적으로 조용하지만 음에 엣지가 살아있다. 파워는 차고 넘친다.  

나윤선 - 아리랑

Lento

빈말이나 과장이 아니다. ‘그녀’가 바로 앞에서 진지하게, 마이크도 없이 노래하고 있다. 잡티 하나 없는 공간 창출능력이다. 보컬의 모든 기척과 아티큘레이션이 손에 잡힐 정도로 생생하다. 반주도 입체적으로 잘 깔린다. 한마디로 고결하고 무구한 재생음의 경지. 숨막힐 듯한 적막감을 바탕으로, 어쿠스틱 기타 줄의 촉감과 질감마저 느껴진다. 기타 현이 떨렸을 때 필히 일어났을 먼지들의 이탈현장까지 쉽게 연상이 될 정도다. 진정한 하이엔드 재생현장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음악의 모든 디테일 하나하나를 즐감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게 하이엔드 오디오의 처음이자 마지막인지도 모른다.  

Arthur Grumiaux, Clara Haskil - Violin Sonata No.26

Mozart 4 Sonnaten fur Klavier und Violine

노이즈가 한방울도 끼지 않은 상태에서 두 악기의 이미징이 확실히 잡힌다. 스피커가 기본적으로 모니터적인 성향이 강한데다 앰프마저 착색이 없으니 음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해부하고 관찰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곡에서 다시 확인한 것은 ‘InPol Heritage’ 인티앰프가 고음 재생이 아주 매끄럽고 유연하다는 것. 예리하지만 찔려도 아플 것 같지가 않은 그런 고음이다. 인폴 출력회로의 숨은 매력일 것이다. 이어 들은 바이올린 소나타 21번에서는 바이올린은 위쪽에, 피아노는 아랫쪽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피아노의 저역은 은근히 따뜻하고 명랑하며 음끝이 동글동글한 구석이 있다. 바이올린에서는 기분좋은 목향이 은은하게 풍겨나온다.

Ray Brown Trio - Fly Me To The Moon

Ray Brown, Monty Alexander, Russell Malone

오른쪽에 있는 베이스로부터 묵직한 질량의 음들이 자유낙하하는 것을 보면, 앰프가 스피커를 화끈하게 드라이빙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더 오른쪽에 있는 어쿠스틱 기타에서는 온갖 연주기법이 세밀하게 펼쳐지는 상태. 이 곡에서도 음의 윤곽선은 선명한데, 음끝을 마치 CNC 머신으로 정밀 가공한 듯하다. 녹음현장의 공간감도 잘 드러난다. ‘InPol Heritage’ 앰프의 특징이 거의 파악이 된다. 음원에 담긴 모든 디테일한 요소요소들을 남김없이 까발린다는 것, 이 과정에 ‘대충’이나 ‘적당’이 없다는 것, 재생음에 먼지나 노이즈, 보푸라기 같은 것들이 일체 없다는 것, 반대로 포근하거나 물컹물컹하거나 폭신폭신한 사운드를 처음부터 경계하고 있다는 것 등등. 매사가 분명하고 똑부러지는 그런 앰프다.

“총평”

‘InPol Heritage’ 앰프의 예쁜 겉모습만 보고 나오는 소리마저 예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런 선입견을 남김없이 깨부숴버린 시청이었다. 이 앰프는 그야말로 음들을 스트레이트하게, 무기질적으로 스피커에 전해주는 스타일이다. 깨끗이 빨래한 천 기저귀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풍미처럼, ‘InPol Heritage’ 앰프에서 풍기는 이 순백의 순결한 맛이 들을수록 중독성이 있다. 따라서, 화끈하고 열기 가득한 사운드를 원하는 취향이라면 이 앰프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훗날, 필자는 파토스의 ‘InPol Heritage’ 인티앰프를 이렇게 기억할 것 같다. 전압증폭률이 높은 고사양 초단 진공관으로 1차 증폭, 첫단추를 잘 꿰맸다. 드라이브관은 내부저항이 낮아 증폭신호를 잘 캐리어했으며 전류증폭률이 높아 출력단을 마음껏 드라이빙했다. 클래스A 증폭, 트리플 싱글 구동, 소스 팔로워 구성의 파워 MOSFET, 대형 초크트랜스 및 대형 커플링 커패시터를 핵심으로 한 인폴 출력회로는 순결한 증폭 신호를 유지한 채 스피커 구동력을 높인 신의 한수. 외모? 더 욕심을 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 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