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팅크, LSO 이야기 (3)

본론 이전의 사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요점은 ACO 상임시절 하이팅크는 최정상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도, "평범하다. 개성이 없다. 밋밋하다. 교과서적이다" 이런 평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실 하이팅크의 음악철학 자체가 지휘자와 연주자는 위대한 작곡가의 성과를 재현하는 역할이다. 즉, 작곡가 이상으로 지휘자가 주목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하이팅크가 우직할 정도로 이런 원칙에 충실하게 쌓아 왔던 음악적 내공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깊어졌습니다. 더 주목을 받았던 지휘자들이 세상을 떠난 것도 있겠지만, 이미 지휘자로 56년..ACO상임부터 계산해도 52년간 꾸준하게 정진해 온 하이팅크의 누적된 공부와 연주경험..이건 주로 LP로 음악감상을 했던 애호가들이 그의 60년대, 70년대 필립스 녹음에 대해 쉽게 언급하듯이  "평범하다. 무색무취" 이런 식으로 폄하할 수 없는 경지인 것입니다.
 
요즘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할아버지가 된 하이팅크의 연주활동에 대한 음악 본고장의 분위기가 음악애호가들에게 상당부분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번 LSO의 내한공연에서 지휘자들에게 거대한 산맥과 같은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하이팅크가 어떻게 풀어 나갈지 관심사가 된 것은 당연했습니다. (물론 기왕이면 LSO가 아닌, 유럽대륙의 명문이었으면 하는 욕심도 나기는 합니다만)
 
이번에 이틀간 하이팅크의 지휘를 공연장에서 보면서, 일단 협주곡 서포트를 잘한다는 명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LSO의 사운드가 모짜르트, 베토벤 협연에 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잡생각 없이 협주곡 연주에 몰입할 수 있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한국 공연의 현실이 협주곡 연주가 끝나고, 협연자의 앙코르가 기억에 남는다..는 식의 본말이 전도된 감상이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피레스의 원숙한 연주와 하이팅크의 충실한 서포트 덕분에 예술의 전당에서 38명의 소편성 오케스트라(트럼펫, 팀파니도 없는..)와 협연자가 들려주는 너무나 순음악적이고 맑은 울림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지나치게 익숙한 음악을 공연현장에서 좋게 듣기 어렵다는 징크스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연 200주년을 맞아 올해 유난히 자주 무대에 올라가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 또한 어지간해서는 좋은 느낌을 받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애호가들이 명반을 너무 자주 감상했기에..
하이팅크의 베토벤 7번은 LSO Live SACD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특히 팀파니가 부각되는 것이..음반의 음향밸런스 때문이 아니라 LSO의 연주 특성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음향이 매우 "dead"성향인 바비칸 센터가 본거지이기에 LSO 단원들은 섬세하고 여린 연주보다는 강력하게 몰아치는 연주에 익숙할 것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유튜브에서 이미 유명한 영상물로 기억되는 2009년 RCO와의 베토벤 7번과 오케스트라 편성도 다르고 해석 방향도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하이팅크는 연주홀의 특성과 오케스트라의 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적절히 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베토벤 7번에서 2악장 알레그레토의 빠르기를 충실하게 준수하는 점..그리고 4악장 내내 음악의 흐름 및 템포의 논리적 상관관계가 명쾌하여 부분적으로 연주가 미흡한 것이 부각되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특히 몇몇 영상물에서도 봤지만, 하이팅크의 왼손 움직임은 정말 절묘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브루크너 9번..이번 내한공연에서 가장 기대가 집중된 음악인데..도저히 저의 짧은 표현으로는 묘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1악장과 3악장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도대체 연주시간 60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의식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3악장이 진행되면서는..이 음악 끝나고 앙코르는 당연히 없을텐데..이제 하이팅크 옹과 함께 한 시간이 끝나는구나 하는 진한 아쉬움..1악장에서 트럼본쪽 실수가 나왔다고 하지만..저는 호른파트와 팀파니의 강력한 연주에 마비되어 의식하지도 못했습니다. 1악장 코다에서 웅장한 사운드가 마무리될 때는..이게 지상인가? 천상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1악장에서 LSO의 현악파트가 역시 좀 거칠구나 싶었는데..2악장, 3악장에서는 충분히 음악 특성에 맞게 순화되었습니다. 목관이 유럽 명문들에 비하면 평범한 편이지만..9대의 호른 (4대는 3악장에서 바그너튜바 겸)이 워낙 안정적으로 움직여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악장 아다지오가 마무리되는 현악부의 세마디 피치카토..
혹시 성급한 안다 박수나 안다 브라보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으나..지휘자의 손이 내려오기까지 짧지만 여운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2011년 사이먼 래틀 지휘 말러 9번, 브루크너 9번과 마찬가지로 청중들의 협조가 잘 이루어졌습니다)
 
1941년생 리카르도 무티가 건강때문에 시카고심포니의 역사적 내한공연에 동참하지 못했기에, 하이팅크 옹이 런던에서 서울까지 먼 여정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었으나, 84세의 마에스트로는 포디엄에서 기대 이상으로 정정한 모습이었습니다. 커튼콜 때 왔다갔다하는 걸음걸이는 조금 느렸지만..
 
카라얀, 뵘, 줄리니, 반트 등의 지휘자가 현역일 때 유럽 현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을 감상한 청중들은 어떠했을까하는 상상도 되면서..이제 이 시대에 브루크너 교향곡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거장들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좋은 지휘자들이 귀해지면서, 클래식음악이 내리막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