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파일을 위한 명반 - 3
우리 컨텐츠는 BTS 등 뛰어난 음악으로 세계인과 소통하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역시 우리 것이 최고”라고 말하면서도 해외 음악에만 관심과 존경을 표하는 이율배반적인 풍토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을 말하지만 외국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우리나라 음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외국 음식에 빠져 있는 사이 이제 김치 같은 음식은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하고 그들 것처럼 되어버렸다.
국악보다 클래식이 더 고상하고 우월하다는 식의 태도도 종종 보인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더 절실해 보인다. 바로 지금, 차별과 편견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져야 할 것은 바다 건너 저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닐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번엔 국내 음악 중 해외 음악에 비해서 고유의 독창적 음악성과 함께 녹음도 뛰어난 앨범들을 꼽아보았다.
1. 정민아 / 상사몽(모던 가야금)
2007년 발매된 정민아의 <상사몽>은 국악에 기반을 둔 음악에 우리 가요를 얹은 퓨전 국악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처음에 그녀의 등장은 무척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국악이라고 하면 뭔가 친해지기 힘들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가운데 ‘무엇이 되어’, ‘새야 새야’, ‘노란 샤쓰의 사나이’, ‘뱃노래’ 등은 무척 친숙하게 들렸다. 게다가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고전 음악 전문 공연장이 아니라 국내 인디 음악의 성지라고 할만한 홍대 인근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사실 이 당시 홍대 인디씬에 대해 친숙했던 필자조차도 정민아의 인기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어떻게 이런 음악이 인디씬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외국 음악을 카피하거나 그들 음악에 근간을 두고 가사만 우리말로 치환한 음악이 아니라 그 뿌리가 우리 정서에 맞닿아있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리다. 당시 이 앨범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1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 CD라는 매체의 하락세를 감안한다면 그리고 국악 기반의 음악을 주제로 홍대 인디씬에서 활동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기현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어보면 이런 의문은 금세 눅 녹듯 풀려버린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 음악을 해외 클래식 음악이 아닌 우리 국악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민아의 <상사몽>은 고전 음악을 현대적 변형이다. 하지만 이 또한 편견이다. 황진이의 시에 곡을 붙인 ‘상사몽’ 같은 곡에선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 서양 악기들과 조우하여 한국적인 멋을 살려내기도 한다. 주로 유럽이나 미국 클래시컬 음악에 익숙한 애호가들도 가야금이라는 악기에 관심을 가질만한 음질을 맛볼 수 있는 점도 이 앨범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2. 곽수은 – 가야금, 폭풍의 전설
음반을 고르는데 있어서 포맷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다. 동일한 앨범도 CD로 듣느냐, LP로 듣느냐 아니면 그냥 음원 스트리밍으로 듣느냐에 따라 첫인상이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인상은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상당히 오래간다. 첫인상을 바꾸기란 힘들어서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맞는 포맷으로 들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느 오디오 마니아들도 마찬가지지만 SACD는 해외 음반에서나 볼 수 있었고 아주 간혹 국내 음악이 SACD로 발매되곤 했다. 곽수은의 <가야금, 폭품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아주 유명한 앨범도 아닌데 갑자기 SACD로 발매된 것이라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앨범을 오디오 테스트를 할 때 들어보곤 깜짝 놀랐다. ‘그린란드의 회상’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마치 전면 패널처럼 새하얀 화선지가 뒷 벽에 두둥실 떠있고 그 위로 빠르고 예리한 붓놀림으로 그린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세부적인 약음 포착 능력 및 투명도는 이례적으로 뛰어나다. 한편 음의 온도감은 낮은 편으로 스산할 정도로 상쾌한 소릿결을 보인다.”
어떤 하이엔드 앰프를 테스트하다가 들었던 감상평에 위처럼 적어놓은 것은 단지 그 앰프의 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존에 들었던 일반적인 가야금 소리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일종의 개량악기라고 할 수 있는 25현 가야금으로 연주한 것이다. 더불어 제자들과 함께 조직한 라온 G라는 가야금 앙상블과 함께 한 녹음.
25현 가야금을 통해 농현의 깊이나 가야금에서 보편적으로 상상하는 질감은 조금 희생하고 있지만 다이내믹스가 높아 단단하고 강력한 어택, 도도한 표현력이 꿈틀거린다. 황병기 명인이 “나의 첫 가야금 창작곡 이후 30년간의 긴 간극을 뛰어넘은 후학의 열정이 고맙고 귀하다”라고 추켜세웠을 정도로 뛰어난 연주자이자 작곡가 곽수은의 앨범 중 가장 추천하고 싶다. 특히 오디오 마니아라면 꼭 일청을 권한다.
3. 앙상블 시나위 / 사랑이여
시나위라고 하면 정악에 대한 향악 또는 굿거리를 의미한다. ‘육자배기 특징으로 된 산조의 기악곡’이라는 게 국어사전의 정확한 뜻풀이다. 일반 대중음악 애호가들에겐 록 그룹 시나위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어렸을 때 시골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살풀이 따위의 무속음악, 그것도 시나위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앙상블 시나위는 그 시나위라는 이름을 빌어 우리 전통음악의 멋을 현대 음악 속에 버무려 가깝게 소통할 수 있는 음악으로 실험하고 있다. 시작은 ‘찬비가’, ‘눈 먼 사랑’등으로 유명한 <영혼을 위한 카덴자>였다. 아쟁에 신현식, 피아노에 정송희, 소리 이봉근, 가야금 하세라 등을 중심으로 일반적인 국악 편성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편성의 창작 국악 그룹으로 일궈낸 음악적 화학작용이었다.
이후 2012년 <시간 속으로>를 지나면서 앙상블 시나위 음악은 더 넓은, 광의의 퓨전 국악으로 진화한다. 2018년 발매한 <사랑이여>가 그 증거다. “사랑이여, 사랑이여, 사람이여”로 시작하는 CD 부클릿을 보면서 가슴이 찡해왔고 음악을 들어보면서 앙상블 시나위 음악의 본질은 더 확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사물놀이 명인 김덕수, 두 번째 달과의 공연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간의 경계 I’ 부정놀이를 시작으로 마지막엔 ‘시간의 경계 II’ 부정놀이로 끝내는 수미쌍관식 구성으로 그 사이사이에 총 다섯 곡을 배치해놓고 있다. 가야금, 아쟁, 양금과 보컬을 기반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그리고 김덕수의 장구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펼쳐내는 하모니는 동, 서양이 음악으로 화합하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사랑이여’에서 코러스, 성악까지 합세하면 절정을 이룬 후 마지막 ‘시간의 경계 II’로 막을 내리는 대작이다.
4. 강은일 / 오래된 미래 Vol.1
최근 몇 년 간 국악기 중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은 건 아마도 해금일 것이다. 두 줄로 된 찰현 악기로 유라시아 호궁류 악기가 고려 시대에 국내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된 악기. 국내 음악에 이 해금은 사실 꽤 많이 사용되었다. 잘 들어보면 안치환, 강산애의 음악 그리고 한때 국내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살타첼로와의 작업에서도 해금이 등장했다. 이를 연주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해금 연주가 강은일. 가요는 물론 파바로티, 조수미 등 클래식 음악가들과 협연으로 대중화에 크게 기여해왔다.
그런 해금이 갑자기 크게 조명 받은 건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일 열리던 날이었다. 양 국 두 정상의 만남에서 해금이 등장한 것. 이때도 강은일이 해금을 켰다. 흥미로운 건 북한의 옥류금이라는 악기가 함께 호흡을 이루어 연주되었다는 사실이다. 줄을 긁어서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 해금과 손을 뜯어서 소리를 발현악기의 화합은 정삼회담의 분위기와 어울려 주목받았던 것이다.
바로 강은일의 가장 대표적인 앨범이 바로 [오래된 미래 Vol.1]이다. 이 앨범은 ‘초수대엽’부터 ‘라다끄의 여인’까지 단숨에 듣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해금만으로 전통 음악을 연주했다면 아마 중간에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러 서양악기들과 조화를 이룬 크로스오버 퓨전 국악은 국악이라는 경계를 넘어 장르화하기 힘든 독특한 음악 세계로 감상자를 이끈다.
찰현악기 해금이 건네는 구슬프면서도 삶과 단단히 밀착된 음결. 아름답고 넉넉하며 고른 호흡으로 그 음색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대하드라마 같은 장편 소설이 아닌 정갈한 시 한 편을 읽은 듯한 느낌이랄까. 서양 악기나 음악에선 당최 느낄 수 없는 감흥이며 음색이다.
5. 두 번째 달 / 국악 프로젝트 : 판소리 “춘향가”
국악이 우리 음악이나 관심을 갖고 아끼며 사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은 요즘 세대에 전혀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수궁가’, 즉 ‘별주부전’에서 얻은 스토리텔링에 판소리 그리고 베이스, 드럼 등 서양 리듬 악기를 결합해 상상 이상의 퓨전 음악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더해 애비규어스 댄스 컴퍼니가 합세하면서 국악과 팝, 댄스까지 아우르는 독창성을 획득했다.
이전에 이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두 번째 달도 마찬가지인데 초창기 아이리시 음악 등 주로 유럽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우리의 정서를 얹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후 광고와 드라마 등 여러 영상에 싱크되면서도 상업적인 음악으로 나아가지 않고 더 다양한 길을 모색했다. 그 결과가 판소리에 이른 것은 사뭇 이색적이었다. 갑자기 왜 국악으로 뱃머리를 돌린 걸까?
이 앨범 [판소리 : 춘향가]를 들어보면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악기들이 전통적인 국악기와 거리가 멀다. 베이스 기타, 건반, 아코디언에 퍼커션과 바이올린 그리고 기타와 만돌린 등 국경과 장르를 벗어난 악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춘향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표와 기의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직조해냈다. 기존의 아이리시 음악은 물론 장르의 배합과 화합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팝 음악과 판소리 그리고 때론 블루스 음악이 합세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춘향가’가 탄생한다.
판소리라는 우리 고유의 안료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주제일 뿐 방법론에 있어 세계 여러 음악이 멋지게 화학작용해 만들어진 음악. 새로운 어법과 다양한 악기들은 더 이상 판소리 ‘춘향가’를 고답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서로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교차할 때 창조적인 무엇이 태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가’의 극적인 요소를 와해시키지 않으면서 완성했다는 게 이 앨범의 핵심이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