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쇳덩이^^
엊그제 자그마한, 그러나 꽤 예쁘게 생긴 물건이 하나 내 방에 들어 앉았다. 한 십년 전
쯤에 면을 익혀 지금껏 친구로 지내는, 기계로 소리 내 본 사람이면 최소한 한 번은 그 이름을 접했을 사람이 가장 최근에 세상에 내 보낸 물건이다. 요 며칠 약간의 상기된 느낌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중이다.
기준에 따라 수치가 달라 지기는 하겠으나, 꽤나 소극적으로 엄격한 기준을 선택하여 내 소유의 엘피 음반을 빈약하나마 내 소유의 오디오 시스템에서 울리기 시작한 1980년도를 기점으로 하더라도 벌써 30년 넘게 음악과 소리에 관심을 두고 살아 왔다. 지금 내 귀는 그 시절 쓸만하던 귀에 비하면 거의 먹통에 다름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소리 아닌 음악 듣는 귀는 별로 퇴화되지 않은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젊을 때의 청각적 기억이, 퇴화된 귀로 인하여 깎이고 패인 지금의 청각정보에 보정작업을 머릿속에서 하고 있는 듯 하다. 타인의 오디오에 대하여, 해학적 접근이 아니고 참으로 진지한 시청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버린지 이미 오랜 건 다 그 탓일 테다.
4천이 넘을 각종 음반과 수백권의 책을 포함 온갖 물건이 꽉 들어 찬 댓 평에 불과한 내 방에서 거의 가슴께까지 이르는 높이의 오데온 라트라비아타(구형)와 쇳덩이 받침대에 올려 논 ATC12라는 스피커 두 조가 나지막한 통가죽의자에 앉은 나를 압도하며 내려다 보는 가운데, 쌓아 둔지 오래라 눈에 익어 이제는 오디온지 그냥 허접한 가구인지 분간이 잘 안가는 구닥다리들 중에, 은백색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DAC 하나가 약간의 보잘 것 없는 공간을 새로 차지하였다 하여 뭐 그리 대단한 변화이고 사건일 수는 없으리라.
내게는 아직도 환경과 사정이라는 뚜껑으로 억압되어 있는 고압의 욕망이 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시스템에 새 식구를 맞아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시절이야 이미 옛이야기라 치더라도, 약간의 호기심조차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테다. 배달된 박스의 테이프를 떼어 내는 손이 약간 떨고 있었다면 과장일까? 나는 요즘 엘피와 컴퓨터파일을 주요 청취 소스로 삼고 있다.
절대적 관점으로 보아, 내 방에서 용인될 수 있는 재생음질의 최소한에 대한 개념은 회고컨대 아마도 사십대 중반경에 확립한 듯 하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흘렀다. 오디오 기계나 환경 액세서리등의 변경에 따라 소리가 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 계통에서 만인 공통의 콘센서스가 확립되어 있는 바 이지만, 계측기로서의 귀가 그 역할을 다한 나 같은 중늙은이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음악청취 환경을 결정해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소리의 품위에 관한 한 절대기준의 확립은 어쩌면 오디오 생활의 유일하고 불가피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비교청취의 전장에서는 탈주병이 된 지 오래다.
원래 전기를 먹어야 하는 오디오컴포넌트는 회로와 부품이 전기적, 물리적으로 정착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나 그렇다고 하여 박스개봉의 즐거움을 맛보기만 하고 소리를 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결선에는 이골이나 눈 감고도 해 치울 경지에 이른지 오래인데 어찌된 일인지 맥미니에다 거금 32만원이나 주고 미리 준비해 둔 트랜스페어런트 제 USB 케이블로 이은 DAC에서는 울긋불긋 LED램프의 불빛만 형형할 뿐, 300B진공관 인티의 출력터미널인 오데온 소리통에서는 험하나 없이 정적만 감돌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맥 OS X LION운영체제를 30불 주고 다운받아 설치한 후 내장 음성출력을 바꿔주는 설정변경을 하고서야 소리가 난다. 전기 넣고 줄만 이으면 소리가 나던 지난 날 아날로그 시스템이 이럴 때 가끔 그립기도 하다.
방문을 닫고..왜냐면 내자의 애호물인 거실의 텔레비전소리 때문에..가만히 들어 본다. 물론 소스는 하드디스크의 애플 아이튠즈 로스레스파일로 된 체스키 귀그림 테스트음반…스패니쉬할럼!! 도입부 콘트라베이스의 단단한무게감, 목소리의 질감, 타악기의 해상력 뿐 아니라, 타이틀 곡인 이유가 충분한 테스트 녹음인 건 다들 아실 테다.
참고로, 지금부터 쓰는 소리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다. 불교의 위대한 함의를 졸문에 갖다 쓰는 무례와 만용을 용서받는다는 전제하에서, 내가 참 좋아하는 용어이다. 뜻이 뭔지에 대한 부언은 시간 낭비일 것이니…
이미 가지고 있던 CD10과 DA100S로 들었던 소리에 대하여, 새로 태어난 놈이 월등하다 운운의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내 음향적 가치관을 의심케하는 언어유희에 불과할 것이므로, 나는 그 따위 평론가들 식 상투는 피하고자 한다. 그 소리들도 내 오랜 원칙과 기준에 합당하고 심미적 자격이 충분한 기기들이니까. 아마 경제력이 결정적 옵션이었겠지만 하이엔드라고 불리우는 고가격의 기물을 내 소유로 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우연인지, 선택의 산물인지는 몰라도 오늘 현재 내가 가진 DAC 셋과 인티앰프 하나가 ‘사월’표다.(또 다른 인티진공관앰프는 언더그라운드공방에서 반 자작한 300B이고, 수 없이 많이 스쳐지나 간 물건들 중에 제일 못 생긴 그러나 가장 진국인 친구다) 업프라이스가 업그레이드와 함수적 관계를 보이는 가격대의 구간에 대한 개인적 소견에 대하여 견강부회의 첨언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른 이에게 구체적으로 논쟁의 불씨가 될 테제를 제시할 만큼 내가 어리석지 않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다시 돌아가, 여시아문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10분 전기 먹인 예의 그 DAC소리를 들어 보자. 번인없는 소리로도 악당인지 선인인지는 대체로 분간이 가니까^^ 희안하게도 좁은 방이고 거의 정사각형에 천정이 낮은 전형적 아파트 안방의 음향적 환경에서도 내 방에 저역공진이 별로 없는 이유는, 사면의 아래 위에 포진하고 있는 다양한 기물들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데, 시스템의 소리를 평가하는데 꽤나 유용한 요소라고 평소 늘 생각하고 있다.
오랜만에 스패니쉬할럼의 도입부 컨트라베이스의 음정과 바닥을 기는 에너지감에 소름이 돋는다. 마우스로 디지털 볼륨을 올린다. 내 몸에 기별이 온다. 다들 아는 느낌일 테다. 찰랑거리는 탬버린의 색깔이 확연하다. 일전에 윈도7으로 구동한 아이튠즈 방식으로 DA100S를 경유, 사이즈가 작으나 한 가닥 하는 ATC12를 통하여 울렸을 때 들어 보지 못했던 소리다. 그 때, 탬버린 소리가 잘 구분이 안되고 다이나믹스가 좀 좁은 느낌이 들어, 나는 내 귀가 그 새 또 더 맛이 갔구나 하고 자조한 기억이 있다. 청각의 기억력에 관한 한 인간은 절대 장담할 존재가 못 된다는 점에 동의 하는 사람들은 손 들어 보라. 아마 꽤 많은 숫자일 거다.
이 정황의 표현에 대하여 이미 그런 함의로 파악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새 물건과 DA100S와의 비교가 아니란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누차 강조하지만, 현재 나의 오디오 청취 방식은 구성기기 간 상대적 비교가 아니라, 육체적 컨디션과 감정기복의 상황에 따라 갈대처럼 흔들리는 초로 이길범의 절대적 기준 충족여부다.
이 또한 ‘나는 이렇게 보았다’일 뿐이니 인후에서 욕지기가 나더라도, 참으시는 게 피차 좋을 법하다고 충고를 드리면서 한 말씀 드리자면, 당초 이 물건의 공동구매가 시작될 때, 나는 제작자의 음악적 감성을 믿었던 것 뿐이고, 디자인에 별 애면글면치 않는 내 취향으로 인하여 선택에 아무런 주저가 없었을 뿐이지만, 이 친구는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기물로서, 참 잘 만들어 진 물건이란 생각이 든다. 외관상 보기 좋은 것들이야 세상에 한둘이랴만, 특히 나처럼 호사가인 사람이 이런 저런 짓거리를 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입출력 구성이 나를 사로잡는 매력이다.
. 명품백이라면 안색이 변하는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 내가, 샷시와 디자인값으로 너무 많은 요구를 하는 요즘 오디오 제품들의 마케팅스트래티지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한국의 현재가 양극화의 지구적 모델로서 손색없는 사회라 할지라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두 장이 채 못 되는, 이 계통에서 소위 껌값에 불과한 가격으로 공제된 물건이라는 선입견 혹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성적 인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분들은 한 번 구경이라도 해 보기 바란다. 청컨대, 혹여 손에 들어 온다거나 일청의 기회를 잡은 분들은 다른 물건들과 비교하려고 달려들어, (한때 나도 꽤나 열심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맹비청(盲比聽:blind test)에 목숨 걸지 마시고, 업프라이스는 업그레이드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흔들리지 않는 오디오의 철칙을 잊지 않으신다면 허심으로 그냥 들어 보시기 바란다.
십년넘게 지켜보았지만 ‘사월’의 튜닝도 변했다. 무게중심도 많이 내려오고, 밸런스가 다이아몬드에서 피라미드로 변한 느낌이다. 세상에서 하나 뿐인 내 귀로 들어 온 소견이니 시비는 걸지 마시라^^ 만든 이의 희끗한 머리칼의 숫자가 그 동안 는 만큼이나 소리도 중후해 지고, 기술이 진보한 덕이라기 보다는 그의 감성의 진화라고 믿고 싶지만 결도 한층 고와졌다. 그제나 저제나 그림 속의 벗은 여인보단 곁의 마누라가 현실감 있는 존재이듯이 내 물건이 될 리 없는 하이엔드프라이스의 기물보다는 ‘사월’이의 소리가 내겐 현실적인 이상(理想)이다. 품위상 내가 그은 내 소리의 하한선을 저 아래로 내려다 보는 소리다.
딸 둘 출가시키는데 얼마 없는 돈 다 써버린 60 가까운 초로의 얄팍한 지갑을 열어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 들인 물건에 대한 애착은, 냉철하고 분석적인 평가의 기반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고, 어차피 내 말이야 듣는 이 없을 테니 무책임을 전제로 끄적인 소감이지만, 세상엔 나 처럼 오디오하는 마이너들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니 먼저 받아 일청해 본 소감 또한 그들에게 약간의 참고가 될까 보아 횡설 수설을 해 보았다.
내가 첼로를 배운지 1년이 다 돼 간다. 악기를 튜닝할 때 나는 야마하에서 나온 전자조율기를 쓰지만 스물아홉이고 늘씬한 미녀인 내 첼로 선생은 절대음감의 소유자라서 귀로 조율을 하는데도 442헤르쯔의 A음을 기막히게 맞춘다. 나는 타고나지 못해 G음을 듣고나면 다음의 G# 나 A음을 알 수 있어도 절대음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오디오음악이라면 이 정도 소리는 돼야 한다는 기준은 서 있다. 이번에 내게 주어진 하나의 기쁜 선물인 에이프릴뮤직 엑시머스 DP1은 맥미니컴퓨터,300B진공관 인티앰프와 오데온 라트라비아타 스피커의 라인인 내 시스템에 끼워 졌을 때, 그 기준을 훨씬 높이 통과할 것 같다.
우리방의 친한 친구들에 대한 내 뽐뿌야 그들에겐 이미 오래 전부터 익숙한 해학이겠지만, 이 글은 뽐뿌가 아니다. 자라나는 오디오 아우들과 음악이라는 열락을 함께하기 위한 내 충심으로 수용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을 드물게 오랜만에 가져본다는 것을 실토하기 위한 글이다.
-한림의 골방에서 무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