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경지
필자에게 첫 하이엔드 헤드폰 시스템과의 만남은 약 10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 개인사정에 의하여 사용하고 있던 오디오 시스템을 모두 처분하고 지내던 중, 오디오와 음악에 대한 갈증으로 헤드폰 시스템을 장만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헤드폰 시스템을 통한 음악감상을 이른바 헤드파이 (Head-Fi)라고 부르며 대중화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필요한 정보들을 찾기 쉽지 않아 시스템 구축에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다. 이 때 해외 사이트 등을 통해 공부하며 만났던 최고의 제품 중 하나는 바로 젠하이져 HD 600이었다. 바로 이번 리뷰를 통해 만난 동사 HD 800의 한 세대 이전 플래그쉽 제품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급 헤드폰들은 대부분 임피던스가 높고 감도가 낮은 특성을 가진 바, 좋은 음을 듣기 위해서는 전용의 헤드폰 앰프를 요하는 것이 정설이다. 때문에, 단순히 헤드폰을 고르는 것에서 마무리 되지 않고 좋은 앰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일반적인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처럼 말이다. 나아가서, 소스기기, 케이블, 액세서리 등과 같은 주변기기의 실력도 받쳐 준다면 더욱 더 뛰어난 음을 재생해준다.
Bakoon Products AMP-11R이 전용랙에 설치된 모습. 좌측에 헤드폰 단자가 위치하고 있다.
헤드폰을 통한 음악감상은 그 장점과 단점이 분명하게 공존한다. 우선 최대의 단점으로는 헤드폰으로는 스피커에서 듣는 스케일을 경험하기 힘들다. 방안의 전체 공기를 울리는 스피커와 귀에 밀착되어 고막의 주변의 공기를 울리는 헤드폰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바로 이곳에서 오는 최대의 장점이 존재한다. 바로 스피커의 배치나 방의 음향상태와는 관계없이 항상 최선으로 세팅 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장점으로는 스피커 시스템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뛰어난 해상력과 이미징 그리고 포커싱 능력 등을 들 수 있다. 주변의 아무런 방해 없이 나만의 공간에서 울려주는 환경에서 기인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감상해보면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것을 경험한 사용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헤드폰의 태생적 특징으로 바로 좌/우 채널이 완벽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2채널의 스테레오 녹음은 좌/우의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고 청취공간의 영향에 따라 음장을 형성하고 우리의 귀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헤드폰은 좌/우 채널 모두 직접적으로 청취자에 귀에 전달되고 청취자의 머릿속에서만 이러한 음장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Sennheiser HD 800 (출처 www.sennheiser.com)
이러한 점을 보완하고자 해외의 HeadRoom 또는 Meier Audio 등에서 생산하는 헤드폰 앰프들은 이른바 크로스피드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스테레오 이미징을 보완하기 위해서 일종의 프로세싱을 하게 되는 개념으로, 좌측과 우측의 음악정보를 혼합 및 조절하여 헤드폰 감상을 통해서도 보다 자연스러운 음장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기능이다. 실제로 필자가 한동안 사용하였었던 HeadRoom의 최상급 제품인 Max에서는 크로스피드 기능을 통하면 좀 더 부담 없이 헤드폰 감상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프로세싱 기능은 원음을 왜곡한다는 큰 단점이 있다. 이미 스테레오로 녹음된 음원에 일종의 필터를 가하여 보정하려다 보니 원음 자체가 왜곡되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청음시에는 전체적인 정보량이 줄어들고 특히 고역대의 섬세함이 감소한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필자는 아쉬운 대로 음반들마다 크로스피드 기능을 켜거나 끄거나 하며 제품을 사용하였었다.
Bakoon Products AMP-11R (출처: www.bakoonproducts.com)
이번에 만난 바쿤 AMP-11R은 위와 같은 크로스피드 기능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HD 800을 통해 들어본 그 자연스러운 음은 현재까지의 필자의 헤드폰 청취경험을 모두 압도하고 말았다. 헤드폰 특유의 위화감이 없어 집중하여 음악을 감상하도록 하여 주었으며, HD 800의 최대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대역간 밸런스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투명하고 생생한 음악정보를 모두 전달해 주었다. 과연 어떻게 이러한 점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던 차 그들이 사용하는 SATRI 회로의 기술설명을 통해 해답을 찾아보았다.
Bakoon Products AMP-11R (출처 www.hificlub.co.kr)
SATRI 회로는 기존의 회로와는 틀을 달리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압증폭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전류를 사용하는 회로를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회로의 핵심은 전류입력-전류출력의 정밀제어이다. 이러한 구성으로 설계를 하여 일반적인 앰프에서의 문제, 예를 들면 다이나믹스의 감소, 시간의 지연, 주파수 특성 열화, 노이즈 레벨 변화 등을 모두 피하고 있다. 이번 조합에서 특히 빛을 발했던 것은 아마도 시간의 지연이 없다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음악에 딜레이가 생기지 않으니 헤드폰을 통한 청취라도 보다 더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점들은 실제의 청음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뛰어난 회로에 뛰어난 설계이니 어쩌면 음이 좋은 것은 따라오는 결과일 뿐일 것이다. SATRI의 뜻은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통해 이러한 회로를 발견한 개발자의 내공에 감탄하게 만든다.
AMP-11R & HD 800. 아이패드를 이용하여 컨트롤 한 Lindemann DAC에 연결해 청취하였다.
하이파이클럽에 설치된 조합을 통해 본격적인 청취를 하였다. 소스기기는 Pathos Digit, Meridian Sooloos, Lindemann DAC & Bakoon BPS-01 등이 사용되었고, 그 중 Lindemann DAC로 대부분의 감상을 하였다. 헤드폰 시스템 외에 B&W 802 Diamond도 사용하여 보았다.
하이파이클럽 리스닝룸
첫번째로 The Great Jazz Trio의 Autumn Leaves 앨범 중 Blue Bossa를 들어보았다. 매우 경쾌한 곡으로 세명의 연주자의 연륜을 들을 수 있는 명곡이다. 드럼의 경쾌한 리듬을 바탕으로 세 연주자들의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다. 헤드폰을 통하여 이 곡을 집중하여 들으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입으로 리듬을 맞추며 내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전부 들려준다. 스피커로 출력을 바꿔봐도 역시 매우 다이나믹하고 디테일한 소리를 들려준다. 자신의 체구에서 훨씬 벗어나 음을 풀어내는 앰프의 당돌한 능력이 특히 빛을 발하였다.
두번째로 번스타인 지휘의 말러 교황곡 제2번 1악장을 들어보았다. 도입부의 현의 연주를 메우 세밀하게 묘사한다. 활을 통해 전달되는 그 비장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러한 대편성은 기기의 능력이 부족하면 악기의 편성이 뭉게져 버려 감상의 즐거움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이번의 조합은 다르다. 음 하나하나를 모두 표현해 주었다. 중간 총주 부에서도 밸런스를 유지하며 큰 다이나믹스를 자랑이라도 하듯 시원하게 울려준다. B&W 802 Diamond를 통해 듣게 되면 무대를 매우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Diana Krall의 실황음반 Live In Paris에 수록된 A Case of You를 들어보았다. 이 곡은 청중의 숨죽인 고요 속에 피아노 연주로부터 시작된다. 피아노 타건음 하나하나 생생하게 들려오며 그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며 들으려 하는 청중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청중의 기침 하나하나까지 모두 생생히 전달하는 이 조합의 능력은 그녀의 보컬이 나오기 시작할 즈음 더욱 빛을 발한다. 멋진 목소리로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과 호흡하고 있는 무대는 어느새 큰 박수소리로 마무리된다.
마지막은 Michael Jackson의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이다. 그의 젊은 시절 발표된 이 곡은 매우 빠른 비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 특유의 꽉 차고 활기찬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사용된 전자악기 이외에도 사람의 박수소리로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감상용 오디오 시스템에서 이러한 디테일을 표현해주지 않으면 뮤지션의 곡에 대한 완전한 의도가 모두 사용자에게 전달될 수 없다. 압도적인 정보량과 자연스러움을 무기로 가지고 있는 이번 조합을 통해 발견한 의미 있는 사실일 것이다.
이번 이벤트 감상에 사용한 음반들
헤드폰 및 스피커를 통하여 들었을 때 공통적인 특징은 음의 장막을 모두 벗겨낸 듯한 세밀한 묘사와 표현력이었다. 두 조합의 장점이 만나 극대화된 것이었다. 앰프와 헤드폰 또는 스피커 모두 반응이 빠르고 왜곡이 적기에 나타난 특징으로 여겨진다. 사실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는 많은 주관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듣는이에 따라서 좋아하는 음도 다를 것이고 제품에 대한 평가도 다를 것이다. 제조사도 이러한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각 메이커 또는 나아가서 각 나라의 고유한 소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들어본 바쿤 AMP-11R, 젠하이져 HD 800, 그리고 B&W 802 Diamond는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한다. 일체의 왜곡을 가하지 않고 음반에 수록된 그대로의 정보를 빠짐없이 쏟아내며 들려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사용자에게 넌지시 건네준다.
바쿤과 젠하이져 (출처: www.hificlub.co.kr)
바쿤 AMP-11R과 젠하이져 HD 800 및 B&W 802 Diamond와의 조합. 이번 나는 리뷰어다 이벤트를 통해 큰 기대를 안고 대면한 이 제품들은 필자에게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오디오취미를 갖기 시작한 이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음을 선사하였으며,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제조사의 철학과 내공이 깊이 녹아 든 이 명품들은 최근 경험한 제품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며 특히 헤드폰과 스피커를 동시에 사용하고자 하는 동호인이 적극 청취를 권하고 싶다. 깨달음이라는 뜻의 SATRI. 필자도 이번 경험을 통해 신선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다.
추신
이번 리뷰 이벤트를 마련해주신 하이파이클럽 및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차후에도 이러한 기회가 있으면 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저의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 전하며 마무리 합니다. - 2011년 7월 9일 최원석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