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발렌티나 리시차 2005.3/20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나 봅니다.
음악계를 떠들썩하게 하면서 등장한 젊은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바로 우크라이나의 Valentina Lisitsa!
그 때 앳되 보이던 그녀가 이제 40이 넘어 대구를 찾은 것입니다.
이게 그때 CD표지입니다. 아마 데뷔 앨범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 2집이란 이름으로 한장의 CD가 더 나오고 거의 잊어져 버렸습니다.
저도 이 앨범 한장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기교 위주의 젊은 연주자는 승승장구하기가 쉽지 않은 전례가 많이 있었죠.
이후 Naxos 등 몇몇 녹음이 더 나오기는 했지만 역시 세인의 관심을 다시 받기는 힘들었습니다.
Naxos가 반드시 후진 음반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녀의 몸부림(?) 혹은
안간 힘을 쓰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유니버셜에서 5장 정도의 음반이 줄줄이 나오면서 그녀의 재기를 간접적으로 보고 있던 중, 이렇게
대구시민회관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아쉽습니다.
아니, 아주 훌륭한 부분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내 감성과 그가 그린 작품과의 화학적 융합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제겐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나라 연주자가 이렇게 연주했다면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등장을 지켜 보았고 또 그녀의 장기인 힘과 기교 일변도로 인하여 대중과 멀어졌던 이력을 보아온
터라 그 부분이 자꾸 오버랩되면서 신경이 쓰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첫곡은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17번 '템페스트' 두번째는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그리고 휴식.
이어서 브람스 만년의 피아노 소품 Op117,118,119와 발라드 그리고 또 휴식.
다시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와 쇼팽의 연습곡 Op10과 Op25 중에서 발췌해서 5곡을 연주하였습니다.
휴식시간 15분씩 두번 30분을 제외하고도 꼬박 3시간을 꾹꾹 눌러 연주를 해 주었습니다.
이건 정말로 큰 선물이자 그녀의 성의를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열정이었습니다.
교향적 연습곡과 발라드는 매우 훌륭한 연주를 들려 주었습니다.
반면 템페스트나 브람스는 지나치게 명상적인 연주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 부분이 바로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점인데, 본인의 장기이자 단점인 기교를 넘어서 보겠다는 의도는 잘 알겠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곡 자체의 느낌을 살려 내기보다는 리시차의 템페스트, 그리고 리시차의 브람스가 되고 만 것은 아닌지 모르
겠습니다. 저는 브람스의 이 만년의 피아노 소품을 매우 좋아 하는데 켐프의 무심한 듯 관조적인 느낌도,
리히테르의 명상적 멜랑꼴리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녀식의 탈피를 꿈꾸는 몸부림만이 느껴져서 안타까웠
습니다.
전 악장이 아타카로 쉼없이 연주되는 리스트의 이 소나타는 호로비츠의 말을 빌자면 곡이 끝날때까지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제법 긴장감있는 연주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라자르 베르만이나
폴리니 등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포르테나 포르테시모에서 그녀는 자기가 내는 음량의 70%만 내면 훨씬더 좋은 연주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강한 타건이 반드시 좋은 효과를 내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그녀의 연주를 문제시할 이유가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치가 거의 없는 기가 막힌 스킬,
대공연장이 떠나갈 듯한 강력한 타건 - 이건 가히 정상급의 연주자가 보여주는 훌륭한 무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쇼팽 연주에서의 트릴은 실로 접신의 경지였습니다. 게다가 3시간을 풀(full)로 채운 연주시간은 압권이었습니다.
11시가 넘어 달구벌대로를 달리면서 명멸하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또 그렇게 명멸해간 연주자들을 그려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