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수 THE BEST: History (어쿠스틱 버전)
2008년 봄, 드디어 최성수는 자신이 걸어왔던 음악인생의 이정표를 세웠다. 자신이 그 동안 불러왔던 많은 히트곡들을 순수 어쿠스틱 버전으로 제작한 History - The Best Acoustic Ver. 이라는 타이틀의 앨범이 바로 그것이다. 나비 넥타이를 맨 말쑥한 자켓 사진으로부터 전달되는 반가움을 뒤로 하고 음반을 꺼내어, 정숙한 뒷배경과 정돈된 음상 효과 덕분에 최근 회자되는 악세사리인 CD 카본 매트를 얹은 뒤 조심스럽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최근 이 음반은 저 험난한 오디오파일 세계에서 유독 거센 칭송을 받고 있는 일종의 ' 현상 ' 으로 평가받고 있다 . 이러한 뜨거운 반응을 받고 있는 음반을 이렇게 뒤늦게 리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 오디오 매니아로서 자신의 명성에 부합하는 레코딩 퀄리티를 만들기 위해 음악과 음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던 최성수 . 그의 오디오적 관록과 열정이 고스란히 투영된 이 음반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는 부담감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
실제로 이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스튜디오의 모든 파워 케이블 및 인터커넥트 케이블을 하이엔드급으로 전격 교체했고 , 녹음 샘플을 다시 하이엔드 하이파이 시스템에 걸어 청취한 뒤 문제점을 짚어내 다시 녹음을 하고 , 이렇듯 쳇바퀴 도는 작업을 수없이 거친 뒤 탄생한 음반이 바로 이 어쿠스틱 베스트 앨범이다 . 음악적인 완성도만큼이나 음향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 예술성의 결정체 ! 그렇기에 이 음반에는 이슬보다 영롱한 최성수의 가창이 오롯이 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평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 그것이 바로 이 탐미주의자에 대한 느낌을 그저 들리는 대로 적어내려가면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가 부른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Tosca) 가운데 2막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를 들으면 그 애절한 호소력과 오싹한 전율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한 가수로서의 정직한 과거와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의 진솔한 감정 표현이 감상자의 머리를 때로는 혼란스럽게, 다른 한 편으로는 울먹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빅토르 데 사바타의 지휘로 이 아리아가 레코딩된 지 벌써 5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는 마리아 칼라스의 카리스마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데뷔 25년을 넘긴 백전노장의 가수 최성수. 아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최성수야말로 ‘예술에 살고 오디오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udio)라는 명제를 현실의 삶에서 지키고, 아니, 즐기고 있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오디오계의 토스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과 예술에 대한 헌신. 토스카로서는 멍에로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 최성수에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으니, 이 정도면 마리아 칼라스도 그를 부러워할 법하다.
수많은 히트곡들을 하나의 앨범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어쿠스틱 버전으로서 전자음을 배제한 악기들이 자아내는 인간적인 진솔함과 포근한 사운드야말로 이 앨범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이 도시에 과도하게 뿌려지곤 하는 전자음향들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신감을 뿜어내는 이 음반의 매력은 인간 본연의 호소력, 즉 자기 자신을 되짚어보고자 한 최성수가 오랜 자성( 自省 )의 시간들을 거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 최성수의 목소리는 친근하기 그지 없다. 이제 최성수의 목소리에서 마치 적멸( 寂滅 )의 세계로 향하는 듯한 초월감까지 느낀다고 하면 필자의 주제넘은 망상일런지... 젊은 시절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반항적인 눈동자와 헝크러진 머릿결을 뒤로 하고, 노래의 결과 면에서 느낄 수 있는 외향적인 촉감을 뛰어넘어 내면 세계의 고유한 촉감을 노래라는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실어올리는 모습이란! 그의 목소리로부터 지금의 나를 발견할 수 있기에, 피아( 彼我 )의 경계를 허무는 친연성을 갖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
그의 노래는 한층 여유로워졌다. 템포가 느려졌다는 말이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행간에 많은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사뿐히 도약을 하며 느낌을 강조하는 부분이나 슬며시 음표 사이를 포르타멘토 처리하는 모습이나, 한편으로 절묘한 스타카토로 쉼표의 의미까지를 음표 이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이 그러하다.
‘동행'에서의 그 애절한 소망과 ‘해후'의 진실된 아픔이 주는 잔잔한 여운은 그가 오랜 시간 동안 숙성시킨 진솔함의 반증일 것이다. 이렇듯 감성적인 측면뿐 아니라 한층 정교해진 성량의 다채로운 팔레트 또한 듣는 이를 감동시킨다. 특히 ‘풀잎사랑'이나 ‘기쁜 우리 사랑은'에서의 다이내믹한 감수성의 변화와 입체감 넘치는 템포가 인상적인데, 이는 단순히 세고 약한, 혹은 빠르고 느린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음량에서도 음이 앞으로 밀려나오가다 갑자기 뒤로 빠지며 진공상태가 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모습, 정확한 피치를 기준으로 그 주위를 음향의 클러스터로 만들어버리는 두성과 비음의 신비스러운 조화야말로 최성수의 고차원적인 음악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테크닉적인 측면만으로 그의 노래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는 모르시더이다.' 최성수의 농익은 테크닉과 증폭된 감정 표현이 어우러지는 이 트랙은 단연 절창 중의 절창으로 손꼽을 만하다. 숨이 막힐 듯 미세하게 떨리는 비브라토와 시어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은유적 딕션, 맑은 음과 탁한 음의 교묘한 교차에 의한 긴장감 조성과 바이올린 선율을 듣는 듯한 매끄러운 프레이징 등등, 테크닉과 감수성이라는 이 두 단어가 다른 뜻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한 그의 노래는 신묘( 神妙 )하기 그지없다.
오디오파일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도 감동적인 대목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 첫 곡인 ‘해후'에서 읊조리는 첫 부분 “옷깃을”에서 나지막히 새어나오는 흉성도 그러하거니와 , ‘기쁜 우리 사랑'에서 나오는 단어인 “소중하다고”와 “기회에” 앞에 반박자 먼저 들어가는 호흡의 풍윤한 울림, 부드러운 치찰음과 임팩트 강한 파열음 등은 레코딩 컨디션의 우수함을 증명함과 동시에 음표 외적인 부분에서까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가수의 속깊은 의중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음색은 소너스 파베르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스피커를 통해 듣는 것처럼 밝은 파스텔 톤이며, 음굵기와 직선성 또한 PSC 오디오의 케이블처럼 단단하고 올곧되 유연하게 굽이치는 모습이 이채롭다 . 응당 오디오파일용 음반이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저역의 적절한 단단함과 중역대의 각이 잡힌 듯한 균형감, 특히 이 음반에서 확연이 느낄 수 있는 고역의 상쾌한 확산감은 스피커의 모든 유니트를 촉촉히 적셔주기에 충분하다.
한편 악기 배치와 관련한 정위감 또한 여느 음반들보다 우수하다. 기타 두 대가 좌우에, 그리고 첼로가 왼편, 더블베이스가 오른편에 각각 정확하게 위치하여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사운드를 들려주며, 여린 듯하면서도 찰라에의 황금빛 톤을 발산하는 최성수의 목소리를 감싸는 듯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악기들의 직접음과 반사음의 비율 또한 훌륭하여 최성수의 프레이징이 다른 음악적 요소들과 섞이지 않은 채 적절한 대립을 이루며 독특한 앙상블을 이루어낸다.
음악에 취하고 사운드에 빨려든 채 황홀경을 만끽하고 있던 필자에게 어느덧 최성수가 슬며시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거는 듯하다. “동행, OK?”
1. 해후
2. 동행
3. 당신은 사랑입니다
4. 후인
5. 풀잎사랑
6. 남남
7. 기쁜 우리 사랑은
8. 당신
9. 목련꽃 필 때면
10. 잊지 말아요
11. TV를 보면서
12. Whisky on the Rock
13. 공항의 이별
14. 누가 말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