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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열린 스페리스테리오 오페라 페스티벌에 등장한 푸치니의 ‘나비부인’은 지금까지 발매된 동곡 영상물들 가운데 음악적으로나 연출적으로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지닌 무대로 기억될 것이다. 미체라타에 위치한 스페리스테리오는 19세기 초반 지어진 구기 운동장으로서, 아레나의 베로나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양대 야외 오페라 무대로 손꼽힌다. 특히 이 ‘나비부인’의 야외무대는 라이나 카바이반스카가 등장한 1983년 베로나 실황과 많은 면에서 비교될 만하다. 단순히 일본의 정취를 옮겨온 무대가 아닌, 일본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감수성을 얹어낸 무대는 가수들의 연기, 즉 극 자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라파엘라 안젤레티의 변화무쌍한 성격표현과 지칠 줄 모르는 지구력과 호소력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극의 캐릭터에 완전한 동화될 수밖에 없을 정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다운 무대의 향연과 드라마를 관통하는 극적 상상력으로 듣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우리 시대의 거장,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의 감각적인 창조력은 이 ‘나비부인’ 무대에서 단연 돋보인다. 특히 이번 연출은 스페리스테리오 야외 경기장이라 무대 전환이 쉽지 않은만큼 전막을 모두 아우르는 고정된 무대장치를 선보인 것이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는 전막이 언덕 위에 위치한 나비부인의 집에서 벌어지는 무대라는 전제가 깔려있기에 가능한 것으로서, 그 제한된 공간을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실내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사용했다면 이 넓고 개방된 무대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일이다. 대부분 집 밖에서 극의 상황들이 전개되는 탓에 2막과 같은 경우 조금 무대가 지나치게 커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공허함과 박탈감, 혼자와의 외로운 싸움 등등 나비부인의 심리적인 상태를 드러내기에는 대단히 효율적이다.

가장 먼저 건물들은 미닫이문이 설치된 작은 집을 중심으로 오른쪽 옆으로는 커다란 벚꽃나무가 서 있다. 그리고 건물 앞으로는 성악가들의 동선을 제한하는 나무다리들이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다. 그러한 까닭에 1막에서 초초상이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저 멀리서부터 무대 중앙으로 걸어오며 신비로움을 더하는 모습에 파졸리니 감독이 즐겨 사용했던 것과 같은 롱샷의 강한 집중력과 응집력을 안겨준다. 한편 무대와 조명의 기본적인 톤은 벚꽃을 연상시키는 하얀색으로서, 초초상이 그토록 기다리던 미국 성조기의 하얀 바탕색과 일본의 이미지를 모두 만족시킨다.

 

의상과 세트 디자인 또한 ‘나비부인’에서는 항상 논란거리가 되었던 부분인데, 장-피에르 폰넬이 연출한 카라얀의 영상물에서 등장하는 작위적인 의상과 과장된 분장을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최근 발매된 앤쏘니 민겔라 연출의 MET 버전처럼, 이제는 일본의 전통적인 복식과 무대 디자인을 고집하지 않고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범아시아적인 퓨전 분위기 혹은 적절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피치 연출에서도 되도록 전통의상과 가옥을 따르되, 백색의 신고전주의적 분위기에 따라 1막에서 여성들의 의상은 대부분 얇은 실크 재질에 어느 정도 변형이 가해진 신부복을 입었고, 이는 이질적인 느낌보다는 전체의 컨셉과 잘 맞아떨어지는 효과를 준다.

음악의 측면에 있어서도 이 영상물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특히 우리 시대의 최고의 ‘나비부인’으로 평가받는 라파엘라 안젤레티의 목소리와 연기, 분위기는 듣는 이를 압도한다. 1막의 수줍은 새신부의 표정은 어린 소녀의 그것과 흡사하고, 가문의 역사를 되새기는 부분에서의 비장함, 본조의 등장에 동요하지만 이내 사랑의 부름에 젖어드는 감각적인 연기는 실로 리얼하다. 2막에서 스즈키와의 2중창은 마치 잉그마르 베리만 감독의 ‘페르소나’를 보는 듯한 여성들의 은유적이되 강렬한 내용을 담은 대화의 강도를 발산하고, 샤프레스와의 대화에서는 기대감이 주는 희망과 죽음을 예견하는 비장함을 목소리와 연기 모두에서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특히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읽는 대목에서 바이올린 선율과 오버랩되는 안젤레티의 애절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눈물샘을 사정없이 자극한다.

 

3막은 안젤레티의 다양한 발성법과 폭발적인 가창, 이를 통한 음향적 연기력이 빛을 발한다. 특히 모든 사실을 알고 자결을 결심한 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어미의 마지막 노래는 마치 리얼리즘 계열의 연극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절규에 가깝다. 한 젊은 여인으로서의 연약함과 미묘한 심리 변화를 잘 묘사했음은 물론이려니와, 사랑받고 싶은 아내로서의 연약함 바람 및 어머니로서의 강한 모성애를 표현해낸 안젤레티의 탁월한 연기는 ‘나비부인’이라는 캐릭터의 인물분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자결 장면도 대단히 설득력 높다. 핑커톤이 부르는 “나비부인”을 들으며 뒤로 돌아 자결을 한 뒤 주인의 목을 들어 마지막 숨통을 끊어주는 스즈키의 마지막 헌신 또한 이 극의 비극성과 일본식 자결의 리얼함을 더욱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테너 마시밀리아노 피사피아의 핑커톤 연기 또한 수준 이상이다. 너무 과격하지 않은 연기를 통해 1막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부드러운 측면을 청량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하는 모습이 특히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2중창에서 안젤레티의 목소리와의 앙상블은 가히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안눈지아타 베스트리의 스즈키 또한 나비부인의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훌륭한 가창과 연기력을 보여주며 자칫 나비부인의 원맨쇼로 전락할 수 있는 이 극에 중요한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샤플레스역을 맡은 클리우디오 스구라의 가창은 너무 부드럽지 싶지만,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한 캐릭터의 본연의 성격을 충분히 전달해 준다. 고로역의 토마스 모리스는 어릿광대와 같은 영악한 성품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한편, 짧게 등장하는 야마도리나 본조 또한 그 존재감을 확실하게 어필한다.

이 연출의 특징적인 대목으로 3막 전주곡에서 핑커톤과 초초상의 분신으로 두 무용수가 등장하여 펼치는 파 드 되를 꼽을 수 있다. 최근 이 전주곡에서 무용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 무용의 삽입은 극의 분위기를 쇄신하며 마지막 비극으로 향하는 커다란 쉼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짙은 코발트 빛 조명 아래에 등장한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안무는 미처 성악가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애절하면서도 환희에 찬 사랑의 순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지상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의 연속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야외 오케스트라 공연의 레코딩 기술 또한 대단히 발전하여, 지휘자 다니엘레 칼레가리가 이끄는 마르케주 재단 오케스트라의 기량 또한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다. 대부분 성악가들의 대화에 집중되어 있는 오페라인만큼 각 대목마다의 투명하면서도 선율적인 효과음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부분 부분 등장하는 오케스트라의 폭발적인 음향 또한 시원한 폭포수처럼 스피커를 뚫고 나온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꽃의 2중창 앞뒤로 펼쳐지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이 일품으로서, 허밍 코러스에서의 오케스트라는 투명한 선율미와 더불어 극적인 고양감이 배가되는 모습으로부터 야외 오페라 특유의 시원함을 전달해 준다.

전체적으로 클래식 음악은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멀티채널의 볼륨보다 조금 높여서 듣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 DVD는 음질의 퀄리티 자체도 대단히 높고 채널 분리 또한 무척 리얼하게 잡혀있으며 볼륨 또한 작지 않기 때문에 굳이 불륨을 높일 필요가 없다. 한편 HD급 퀄리티를 다운컨버팅한 화질로서 훌륭한 색감이 잘 살아나는 화면 또한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환상적인 조명과 칠흙같이 어두운 뒷배경의 대비로 인해 콘트라스트 차이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짙은 밀도감과 입체적인 선명도를 선보인다.

마지막으로 이 DVD는 해외에서 생산된 인터내셔널 버전임에도 불구하고 수입사의 각별한 노력으로 인해 한글 자막이 수록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 시장에 유통되는 인터내셔널 버전에 한글 자막이 당당히 상위 메뉴에 뜬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로서, 한국 애호가들의 감상의 폭을 넓힘과 동시에 우리나라 언어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라는 측면에서 아낌없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더 나아가 라이센스 과정에서 오소링과 음향 컨트럴 과정에서 생기는 음질 변화가 생기지 않아 오리지널 5.1 채널 음원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또한 이 인터내셔널 한극 자막 버전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