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비이성적 세계의 창조

오랜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드보르작은 귀국과 동시에 프라하 음악원장에 취임했고 오스트리아 국회의 종신 상원의원이 된다.  1904년 고혈압에 따른 심장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그는 프라하 근교의 비쇼카 숲에 위치한 별장을 자주 찾으며 체코의 자연에 애정을 쏟았다. 이 별장에서 그의 11번째 오페라 가운데 10번째 작품인 ‘루살카’ Op.114가 완성된다. 
 


루살카는 1901년 프라하의 국민극장에서 초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드보르작은 후기에 접어들며 소나타 형식에 등을 돌리고 유독 교향시와 오페라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시기 Op.107부터 Op.111까지의 5개의 교향시인 ‘물의 정령’, ‘한낮의 마녀’, ‘황금 물레’, ‘작은 비둘기’, ‘영웅의 노래’(모두 구스타브 말러의 지휘로 초연)를 통해 지금까지의 음악어법에서 진일보한 인상파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독일어로 말하던 당시 체코의 교양 있는 음악 애호가들이 드보르작이 10번째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는 것을 두고 일종의 음악적 후퇴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는 후일 체코의 전설과 민담에 대한 작곡가만의 애정과 사랑이 담긴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드보르작의 대담한 행보는 체코 국민악파의 정점을 찍는 동시에 선배인 스메타나와 후배인 요제프 수크, 비체슬라프 노바쿠, 레오슈 야나체크, 보후슬라프 마르티누가 계승,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지극히 체코적인 소재가 하나의 예술장르로 통합하게 된 작품이 바로 오페라 ‘루살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는 창의성에 있어서의 아름다움과 악상의 탁월한 선택, 이 음악적 요소들의 다룸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인 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깊은 정념과 서정성, 극적인 감수성이 돋보이는 이 오페라는 작곡가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과 함께 왕자에 대한 물의 요정의 덧없는 사랑의 전설에 어떻게 공감했는가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인물과 상황을 특징짓는 멜로디와 하모니의 섬세한 매력이 곡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여기에 극적 장면에 있어서의 드라마틱한 표현력과 강인한 흡인력으로 하여금 이 작품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바그너의 악극을 듣는 듯한 느낌까지를 전달해 준다. 더 나아가 그가 이 작품에 얼마나 애정을 쏟았는지, 그의 별장 이름과 그 옆에 위치한 연못의 이름 또한 루살카로 붙였다.
 
이 작품은 인어공주 혹은 물의 요정인 온딘느를 합하여 슬라브적인 색채를 가미한 듯한 리브레토를 스토리로 채택하고 있다. 물의 요정인 루살카가 인간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목소리를 잃는 대신 육지에서 걸을 수 있게 되는 내용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다시 물로 들어오게 된 뒤에야 비로소 뒤늦은 고백을 토해낸 왕자가 죽음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루었다는 다소 비극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이 오페라의 스토리 자체는 동화적,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유니버셜한 기준으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체코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세계의 청중들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는 데에 무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연시 무대 연출에 있어서도 대단히 난해한 요소로 작용한다. 더군다나 체코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드라마틱과 리리시즘을 동시에 완벽하게 구사하는 훌륭한 성악가들 또한 흔치 않아 이 작품은 더더욱 공연하기 어려운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왔다. 
 
2010년 10월 독일 뮌헨 국립극장에서는 이 ‘루살카’의 획기적인 프로덕션이 선을 보이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연출가 마르틴 쿠세이가 진두지휘했는데, 그는 폭력적이면서 선정적인 장면을 극에 효율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체코의 전래동화(물론 창작된 스토리이지만)와 같은 ‘루살카’에서 어떻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해낸다는 말인가?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일대 파문을 일으킨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것은 자신의 친딸을 20년 넘게 감금, 강간해왔던 요제프 프리츨 사건으로서, 그는 루살카의 아버지이자 숲속의 지배자인 워터 고블린과 마녀 예치바바를 부부로 설정했고, 루살카를 비롯한 그의 자식들을 지하실에 감금해놓은 것이다.
 
루살카에게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주는 예치바바는 고블린의 폭압에 입을 다물고 있다가 1막 마지막에서 결국 딸의 탈출을 도와주며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몸소 실현한다. 끼워 맞추기 식이 아니라 현실과 극의 조화로운 통합을 보여주는 이 연출은 작품에서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부각하는 동시에 등장인물들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며 강력한 극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막의 무대는 고블린과 예치바바가 사는 지상의 무대와 자식들이 감금되어 있는 물이 흥건한 지하실로 2등분되어 있다. 무대의 공간설정에 있어서 최고의 배분을 보여주는 이 장치를 통해 공간과 영역의 충격적인 대비는 물론이려니와 현실과 극이 경계 없이 통합되는 짜릿한 순간을 제공해 준다. 특히 마르틴 쿠세이가 설정한 속옷 차림의 아이들과 이를 파렴치하게 애무하는 고블린의 선정적인 효과는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생생한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상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달의 노래’에서 달을 상징하는 동그란 유리 스탠드를 통해 정상적인 삶을 갈구하는 루살카의 절실함과 이를 깨뜨림으로 인해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상징하는 연출 또한 대단히 설득력 높다.
 
2막에서도 색욕에 눈이 먼 인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처음에 등장하는 산지기가 어린 요리사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모습 또한 현대인들의 타락한 심리를 묘사하기에 충분하고, 외국의 왕녀와 눈이 맞은 왕자가 뜨거운 정사신을 나누는 장면 또한 그러하다. 특히 왕자의 애정행각은 단순히 성적 효과만을 위한 연출이라기보다는 호기심 많고 싫증을 잘 내는 왕자의 성적취향과 이에 대한 루살카의 절망을 극대화하기 위핸 훌륭한 오브제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고블린이 다시 나타나 물로 돌아가라고 회유하는 장면에서, 성적 학대를 받은 여자가 다시금 학대를 한 사람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을 고려한 듯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비윤리적이고도 반사회적인 캐릭터들과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무대에는 축제를 위해 사냥해온 사슴 한 마리가 걸려 있다. 피와 내장을 빼고 가죽을 벗기는 것으로서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의도도 분명히 전달받을 수 있거니와, 결혼식을 위해 웨딩 드레스를 입고 나온 무용수들이 가죽 벗긴 사슴을 한 마리씩 들고 나와 그 피에 흥분하며 뜯어먹는 집단 광기의 장면 또한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이성적인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홀로 금붕어가 떠다니는 어항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격리시키는 루살카의 모습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리얼리즘을 떠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끔 한 멋진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3막에서 아버지 고블린의 지하감옥은 발각되어 법의 처벌을 받게 되고 형제들은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다시 물의 세계로 돌아온 루살카는 자신을 찾아온 왕자가 자결함으로 인해 자신의 운명은 바뀌지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게 된다. 육감적이면서도 히스테릭한 연기와 이를 노래로 완벽하게 소화해낸 라트비아 출신의 소프라노 크리스틴 오폴라이스는 마르틴 쿠세이의 연출 의도와 이상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왕자 역의 쿨라우스 플로리안 보그트는 힘을 갖춘 미성이 인상적으로서 본능에 이끌려야만 하는 수동적인 인물의 표현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고블린역의 퀸터 그로이스뵈크는 파렴치한으로서의 매력보다는 아버지로서의 인간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그의 풍부한 성량과 절제된 연기력이 돋보인다. 마녀 역으로서 힘없는 어머니 역을 맡은 야니나 베클레 또한 훌륭하다. 여기에 강력한 사운드와 풍부한 표현력으로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의 연주력과 다채로움을 더한 지휘자 토마슈 하누시의 탁월한 지휘는 ‘루살카’ 음향 가운데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막 마지막에서 무너지는 듯한 장대한 클라이막스는 실로 뛰어나다.

 

HD 소스의 탁월한 화질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은색에서의 다채로운 채도의 대조도 훌륭하거니와 이와 대비를 이루는 의상과 조명의 감각적인 배치 또한 황홀할 정도다. 루살카의 피부에 돋은 솜털과 옷에 흘러내리는 물방울 하나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해낸 디테일한 화질은 음악 이상의 A/V적 쾌감을 배가시킨다. 특히 무대 위 출연자들을 담아내기 위한 다양한 앵글과 클로즈업과 같은 숨가쁜 카메라 워크가 이 영상물을 더욱 박진감 넘치고 진지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려니와 섬세한 관찰력까지를 보여준다. 
 

음향 또한 최고다. 영상물 소스에서 항상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바이에른 극장의 웅장한 저역과 스케일 큰 사운드를 고스란히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멀티채널 스피커에서 바쁘게 쏟아지는 음향들을 통해 기대 이상의 입체감을 경험할 수 있다. 루살카에 있어서 한국 최초로 한글 자막이 지원되어 극의 이해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33분짜리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획자와 음악가들의 다양하고도 정확한 견해 및 이 프로덕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토록 커다란 충격과 설득력을 던지는 현대적 연출과 엄청난 음악적 감동을 동시에 담은 A/V 소스를 만나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DVORAK Rusal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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