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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카레라스와 아그네스 발차가 제임스 레바인의 바톤 아래 공연한 메트 영상물(DG) 이후 비제의 카르멘에 있어서 오랜 동안 그 아성을 깰 만한 위력을 갖춘 영상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갑자기 카르멘 영상물이 여러 편 발매되면서, 고전적인 메트 실황을 능가하는 괄목할 만한 아이템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먼저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카르멘)와 요나스 카우프만(돈 호세)이 함께 한 2006년 로얄 오페라 하우스 실황(DECCA)이 눈에 띈다. 이 영상은 철두철미하게 베리스모적 관점에 입각한 연출로서 프란체스카 잠벨로의 숨 막히는 연출이 백미다. 최근 급상승세를 타고 있는 미남 테너 카우프만의 절절하면서도 남성적인 호세역도 훌륭하거니와 안토나치의 끈적거리면서도 뜨거운 집시 여인은 섹시함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2막 첫 대목에서 군중들의 화려한 플라멩고 군무와 4막에서의 화려한 투우사의 행렬 등등 황홀한 눈요깃거리도 압권이다. 
 

그 다음으로는 또 다른 메트 실황으로서 러시아의 엘리나 갈랑차(카르멘)와 돈 호세의 현존 최고 캐스팅인 로베르토 알라냐가 등장한 2010년 실황(DG)이 있다. 리차드 에이레의 연출로 이루어진 이 무대는 막강 메트의 자금력이 동원되어 한 편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스케일 크고 정교한 무대 장치와 조명이 압도적이다. 특히 갈랑차의 컴퓨터와 같은 정교하면서도 탁월한 테크닉과 노련한 알라냐의 절창이 어우러지며, 특히 마지막 카르멘의 죽음에 돈 호세에게 치욕을 당했던 상사가 옆에서 총을 겨누는 장면과 회전무대를 통해 투우사가 소를 죽인 장면이 동시에 보이는 시퀀스는 극에 상상력을 더한 최고의 연출로 손꼽힌다. 게다가 차세대 마에스트로인 야닉 네제-세귄의 싱싱하면서도 탄력적인 지휘가 전체의 극을 뜨겁게 달구어낸다. 
 

이렇듯 고전적인 연출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가 카르멘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대중들의 카르멘에 대한 기대치 또한 한껏 높아져 있다. 그렇다면 여기 소개하는 영상물은 어떠한가? 2010년 스페인의 리체우 그랑 극장에서의 실황으로서 카르멘 역으로는 세계 최고의 카르멘으로 일컬어지는 베아트리체 우리아-몽종과 로베르토 알라냐가 등장한다. 여기에 에스카미요 역으로는 네트렙코의 남편인 어윈 슈로프가 출연하며, 미카엘라역으로 떠오르는 샛별인 마리나 포플라브스카야까지 등장하는 초호화 배역을 자랑한다. 최근 스페인에서 주목할 만한 오페라 영상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 이 또한 배역들만 보더라도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버전이다.
 
칼리스토 비에이토의 1막 연출로부터 우리는 대단히 현실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한 카르멘이 펼쳐질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기합을 받는 군인들과 농땡이를 치는 상사, 카메라를 들고 군부대에 나타나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는 미카엘라, 화가 나서 필름을 빼 던지는 돈 호세, 여기에 동네의 노는 언니격인 카르멘 등등, 현재 우리 주위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삶이 배경인 듯한 인상을 준다. 다른 무대 장치도 거의 등장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성악가들의 열창과 연출가의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이 연출은 신선함과 어설픔이라는 양날의 검 위를 첨예하게 걷기 시작한다.
 

HD급 화질로 포착된 몽종은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음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실로 정석적인 연기와 여전히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하바네라’와 ‘세기디야’를 부른다. 발차 이후 가장 훌륭한 카르멘으로서, 이 버전에서는 유독 노출신과 베드신, 펠라치오를 연상하는 듯한 야한 장면이 많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이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알라냐의 돈 호세다. 10개월 전 메트에서도 좋은 열창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뻣뻣한 연기를 보여준 바 있는 알라냐는, 이 리체우 버전에서는 갑자기 연기력이 급상승한 듯 실로 리얼한 카리스마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간절한 사랑의 갈구와 질투심에 의한 살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알라냐에게 제2의 전성기가 올 것인지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지만, 적어도 이 버전에서의 연기는 카레라스 이후 최고라고 감히 칭송할 만하다.
 

2막의 무대 또한 간결하기 그지없다. 어린 여자 아이 한 명만 등장할 뿐 화려한 군무는 일체 찾아볼 수 없고, 술집의 취객들 대신 실제 자동차를 탄 동네 건달들이 등장한다. 파파뇨 지휘의 로얄 오페라단 버전에서의 그 화려함에 한 번 맛을 들인 감상자라면 못내 아쉬움을 피력할 만하지만, 연출자의 의도에 의거한다면 대단히 효과적인 연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슐로프의 에스카미요는 조금 평범한 느낌이 드는데, 그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저음은 오히려 감정과잉된 에스카미요들에 비해 훨씬 설득력이 높다. 
 

그러나 3막에서 숨어들어온 미카엘라가 자동차 시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은 조금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투우장의 4막에서는 비키니를 입은 한 명의 여자가 선탠을 즐기는 장면이 등장하여 투우사들의 화려한 입장을 대신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라냐가 보여주는 연기력은 단연 최상이다. 마지못해 칼을 들어 카르멘을 죽이는 장면에서의 그 망설임과 질투가 교차하는 듯한 연기와 피가 끓는 가창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 연출에서 주인공은 카르멘이 아니라 돈 호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비에이토의 연출은 집요하다. 몽종과 알라냐, 최고의 카르멘 전문 성악가들이 만나 최상의 음악적 완성도를 이끌어낸 이 리체우 버전 또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카르멘을 위한 또 다른 가능성으로서 그 가치가 자리매김될 것이다.
 

화질과 음질 모두 훌륭하고, 특히 리체우 극장의 선명하면서도 효과적인 조명효과가 HD급 화질에서 돋보인다. 유니텔 클래시카에서 출시되는 다른 영상물들처럼, 이 카르멘 또한 한글자막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