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판타지] 러시아 낭만주의의 찬연한 아름다움과 환상

몇 해 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지휘자로서 유럽 연합 유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했던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인터뷰이 자격으로 마에스트로와 가진 인터뷰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로서 어떠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통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인터뷰 당사자로 하여금 조금은 멋쩍은 느낌을 들게 했던 것이었다.
 
“내 삶에 있어서 전통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훌륭한 선생들을 거쳤고 그 분들이 나에게 전수해 준 정보와 충고를 항상 완벽하게 이해했죠. 나는 모든 것을 흡수해야만 했던 것에 얼마간 지쳐왔던 터라 내 자신을 둘러싼 삶과 음악을 내 자신의 의지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내용을 발전시켜야만 했고, 그래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가에 대해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복합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죠. 물론 모스코바 콘서바토리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 자신은 위대한 서구 음악 문화에 더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은 나로 하여금 제각기 다른 문화들에 노출되게끔 이끌었고, 더불어 나 또한 그 모든 것을 소화해내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내 자신을 어떠한 특정 문화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나는 다양한 문화와 음악가들, 많은 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문화들 사이의 명백한 상호교환이 일어나고 있고 이는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인터뷰 中
 

자신은 러시아에서 출발했지만 코스모폴리탄적인 성격을 흡수하고자 평생을 바쳤다는 내용이 요지다. 그는 1969년 아이슬랜드로 망명한 이후 바로크와 고전, 낭만, 현대를 오가며 실로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양의 레퍼토리를 레코딩으로 남겼다. 가히 피아노 레코드 백과사전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수 있는 모든 중요 레퍼토리를 커버했던 그의 엄청난 탐구력과 연주력은 지금까지도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많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이 자국의 레퍼토리에 함몰되어 보다 진지하거나 혹은 스타일이 전혀 다른 레퍼토리에서 실패를 거듭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아쉬케나지는 아마도 러시아라는 지역적 특성을 깨치고 나와 더 다양한 문화의 향기와 피아노 그 자체의 진실로 자신을 충만케 하고 싶었던 아프락사스를 경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피아노가 곧 세계였던 것이다.
 
이렇듯 범세계적인 것을 지향해온 아쉬케나지는 피아노에만 머물지 않고 지휘자로서도 오랜 동안 활동을 해 오며 음악의 다양한 세계를 다채롭게 꾸며왔다. IMF시절 한국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파격적인 개런티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내한공연을 열어 훈훈한 마음을 보여준 이후, 그 동안 자신이 이끌던 오케스트라와 지속적으로 내한공연을 가졌던 만큼 그는 우리에게는 이제 지휘자로 친숙해진 음악가이기도 하다. 20여년 전에는 LP와 테이프를 통해 그가 연주한 피아노 레파토리에 익숙해졌다면, 이제는 객석 앞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정력적인 지휘자로 익숙해졌다는 것이 옛날과 달라진 점일 것이다. 70년대부터 꾸준하게 지휘자로서 활동해온 만큼 지휘자로서 그의 위상은 다른 피아니스트-지휘자의 길을 걷고 있는 바렌보임이나 에센바흐, 플레트네프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전문적이고 독창적이다.
 
특히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거쳐 체코 필하모닉과 NHK 심포니, 최근에는 시드니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는 그는 서서히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줄여나갔고, 현재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여러 문제로 인해 솔로 리사이틀은 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반주자로서 그리고 솔리스트로서(아직도 녹음해야 할 레퍼토리가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는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그가 최근에 발표한 바흐의 평균율과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솔로 작품들(모두 DECCA)은 전세계 평단으로부터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으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마에스트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한 분야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피아노 듀오다. 그 동안 다른 피아니스트와는 듀오 활동을 하지 않았던 아쉬케나지로서 자신의 아들인 보브카 아쉬케나지와 함께 팀워크를 이룬 부자지간의 호흡은 단연 최고 수준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전 시대에 로베르 카자드쥐가 부인과 아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것, 혹은 에밀 길렐스가 자신의 딸과 함께 했던 것에 비견할 만한 이벤트다. 2009년에 드뷔시와 라벨 듀오 작품집을 처음으로 발매한 이 아쉬케나지 부자 듀오는 급조된 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전 바르톡 작품집에서도 함께 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보브카는 다른 레이블에서도 활발한 레코딩 활동을 해왔던 어엿한 중견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매된 두 번째 듀오 앨범인 ‘러시아 환타지’를 통해 아쉬케나지 부자의 앙상블은 이제 최고의 듀오팀으로 자리매김하기에 모자람이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비록 자신의 지향점은 코스모폴리탄적이라고 앞서 밝힌 바 있으나 그가 연주하는 러시아 레퍼토리에서 다른 나라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이 미처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러시아 에스프리가 풍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러시아 낭만주의의 그 찬연한 아름다움과 환상을 아쉬케나지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현존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아쉬케나지 부자가 연주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보브카 편곡)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하는 다이내믹은 물론이려니와 내선율의 명징함 및 풍부한 상상력이 열광적으로 펼쳐지는 이들의 연주에는 러시아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서늘한 서정성까지 녹아 있기에 더욱 귀에 쏙쏙 꽂힌다.
 
라흐마니노프의 모음곡 1번의 아름다움 또한 절경이다. 바르카롤과 밤, 눈물로 이어지는 탄식과 회환의 연속을 듣노라면 아쉬케나지 부자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마지막 부활절에서 울려퍼지는 러시아 정교회 종소리의 그 요란함 또한 정신을 환기시키는 최면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라흐마니노프와 호로비츠가 듀오로 이 작품을 녹음했다하더라도 이 정도의 아름다운 음향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역시 보브카가 편곡한 보로딘의 ‘이고르 공’ 가운데 폴로베치안 무곡 또한 압권이다.
 
2011년 10월 12일 이들 부자가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듀오 리사이틀에서 동일 작품에서 보여준 그 엄청난 에너지감과 환상적인 호흡을 생각해본다면 음반에 수록될 수 있는 정보량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저 유명한 멜로디가 스펙타클하게 펼쳐지는 와중에 보브카의 고역은 쭉쭉 뻗어올라가고 블라디미르의 장식음과 내선율은 더욱더 정교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나가는 모습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절로 뱉게끔 한다. 이 작품 하나 만으로도 이 앨범을 구입해야만 하는 수집적 당위성은 충분하다고 단언할 만하다.
 
이와 함께 글린카의 왈츠-환타지 B단조와 스리아빈의 환상곡 A단조도 수록되어 있다. 그 누구보다도 일체감 높은 톤과 정교한 앙상블, 여기에 둔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리듬과 터치의 산뜻함과 독특한 음색을 가지고 있는 아쉬케나지 부자 듀오의 연주는 멜랑콜릭한 매력을 한껏 살려내어 이들 작품이 짧은 길이의 소품임을 말끔히 잊어버리게끔 한다.

 

Vladimir Ashkenazy/Vovka Ashkenazy -Russian Fantasy
01.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 Night on the Bald Mountain Arranged for 2 pianos by Vovka Ashkenazy
02.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uite No.1 (Fantaisie-tableaux) for two pianos, op.5 G minor I Barcarolle (Allegretto)
03. II La Nuit… L'Amour (Adagio sostenuto)
04. III Les Larmes (Largo di molto)
05. IV P?ques (Allegro maestoso)
06. 미하일 글린카 : Valse-fantaisie in B minor Arranged for piano 4 hands by Sergey Liapunov& for 2 pianos by Vovka Ashkenazy
07.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 Fantasy in A minor for two pianos
08. 알렉산더 보로딘 : Polovtsian Dances from Prince Igor Danses polovtsiennes Transcribed for 2 pianos by Vovka Ashkenazy Introduzione: Andantino
09. Allegro vivo
10. Allegro
11. Presto
12. Moderato alla breve
13. Presto
14. Allegro con spirito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 보브카 아쉬케나지 - 러시안 판타지
음반사 유니버설뮤직
음반사 홈페이지 http://www.universalmusi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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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처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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