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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확실하게, 하이엔드를 향한 사이러스의 발걸음
사이러스 CD XT SE (트랜스포트)
사이러스 DAC XP (D/A 컨버터 / 프리)
사이러스 PSX-R (파워서플라이)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에 제일 사랑받은 제품은 아무래도 영국제 인티 앰프가 아닐까 한다. 가격도 저렴했고, 디자인도 예뻤으며, 무엇보다 소리가 좋았다. 또 매칭할 만한 북셀프 스피커가 다양했으므로, 거의 브리티쉬 인베이션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브랜드들이 바다 건너 한국에 상륙했던 것이다.

네임, 캠브리지, 크리크, 뮤지컬 피델리티, 오라, 스털링 ... 이쯤 되면 분리형인 쿼드는 하이 엔드 기종에 속하며, 진공관 계열인 비어드나 레드포드가 되면, 세상 부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 중심에 사이러스가 있음은 물론이다.

사이러스. 참 그 당시 필자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앰프로, 다소 차갑고, 정교한 네임과 비교할 때 조금은 풍윤하고, 음색이 고와서 하베스나 로저스 등의 배필을 만나 참으로 다양한 음악을 들려줬다. 출력이라고 해봐야 고작 50W 내외요, 크기는 도시락통만하니, 외관만으로 보면 어딘지 허술하기만 하다.

조금은 사이즈도 키울 법한데, 여태껏 이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고집이다. 옆으로 잔뜩 키워서 일반 사이즈로 바꾼 네임과는 대조가 된다. 그래도 소리만 좋으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데 사이러스 인티를 쓰던 90년대 초 무렵, 우연히 PSX라는 파워 서플라이를 구하게 되었다. 어딘지 한 덩어리를 놓는 것보다 허전함이 덜했고, 또 출력도 조금은 올려준다고 하니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가격적인 메리트도 상당했으므로, 속는 셈 치고 들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경천동지할 만했다.

처음엔 약간 출력이 높아지니 조금이라도 힘이 붙지 않겠느냐 싶었는데, 웬걸, 스피커 구동력은 물론이려니와 장막이 한 두 개쯤 걷힌 듯 보다 디테일하고, 다양한 표현을 들려주었다. 거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사실 그 당시에는 전원이나 케이블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전무했던 때라, 그냥 전원 하면 AVR 정도 들여놓으면 되었고, 케이블은 막선만 피하면 큰 지장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파워 서플라이가 시스템 전체의 퀄리티를 일약 하이 엔드 급으로 올리는 데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사이러스는 앰프를 만드는 회사에서 분리형과 튜너, CDP 등으로 라인 업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래도 예의 파워 서플라이는 여전해서, 그간 차근차근 개량을 시도한 끝에 다양한 옵션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분리형 CDP + 파워 서플라이”라는 포맷을 들고 나왔으니, 참 세상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과 사전 크기의 앰프를 만들던 회사가 이제는 스피커를 제외한 전 품목을 생산하게 된 데다, 그 퀄리티 역시 놀랄 만큼 업그레이드 되었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이번에 소개할 CDP 세트는, 사실 단품으로 보면 가격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 단, DAC의 경우는 다르지만, 여기에 프리앰프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지면 납득할 만한 내용이다.

그래도 세트로 구입할 때의 가격표는 만만치 않다. 결국 음질면에서 그만한 값을 하느냐는 문제에 봉착하는데, 예전의 작은 인티 앰프가 그랬듯, 또 단품 CDP로서 높은 만족도를 줬던 전력에 어긋나지 않게, 정말로 훌륭하고 빼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역시 가격대비 성능에서 한번도 실망을 준 적이 없는 사이러스다운 만듦새요 완성도라 하겠다.

본 세트의 메인 컨셉은, 아무래도 전작인 CD8 SE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수많은 상을 받을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던 이 CDP에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CDT와 DAC의 기능을 분리해서 최고의 성능을 추구했다고 보면 된다.

우선 CDT인 CDXT SE부터 보자. CD8 SE에서 DAC 부분을 제거한 후, 여기에 CDT로서의 성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우선 전원부에 보다 심혈을 기울였으며, 데이터의 에러 정정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켰다.

일반적인 CDP보다 무려 다섯 배에 이르는 수치를 확보하고 있다. 노이즈를 적극 억제시킨 것도 음질상의 큰 메리트가 되었으며, 작동에 있어서의 정확성도 높였다. 여러 모로 전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이어서 DAC인 DAC XP를 보자. 우선 DAC부를 트랜스포트 바로 옆에 붙였을 때 받을 수 있는 메카니컬한 진동 부분에서 해방된 점이 크다. 당연히 신호를 전달할 때 미세한 부분까지 영향받지 않아서 유리하며, 이는 곧 해상력을 높이는 쪽으로 연결이 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클록의 안정화다. 이를 위해 크리스탈 VCO라는 리클록킹 회로를 개발했으며, CDXT와 연계될 때 한층 그 성능이 배가된다. 당연히 지터 제거에 큰 강점을 보이고 있다.

디지털 소스를 192KHz로 업샘플링하는 부분도 다른 단품 DAC에 결코 뒤지지 않는 부분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어떤 형태의 디지털 신호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즉, 32K, 44.1K, 48K, 64K, 88.2K, 96K, 128K, 176.4K 심지어 192K까지 종래에 나온 모든 디지털 소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놀라운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함께 커플링되는 CDXT뿐 아니라, 여러 형태의 디지털 기기를 아울러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프리앰프부에 대한 배려도 대단하다. DAC XP의 내부를 보면 정확히 DAC부와 프리앰프부가 나뉘어 있다. 단순히 디지털 볼륨을 단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이러스가 만들어온 앰프의 노하우를 듬뿍 담아, 풀 밸러스의 아날로그 회로 설계로 프리앰프부를 설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별도의 아날로그 입력 단자를 두 개씩이나 제공하니, 턴테이블이나 튜너 등 아날로그 입력으로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 설계가 가능하다. 물론 이런 기능들이 충실히 발휘되도록 튼실한 트로이달 트랜스를 부착한 것은, 당연히 정공법적인 접근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것이, 사이러스 제품군에 전가의 보도처럼 활약하는 PSX-R이라는 파워 서플라이다. 이 제품은 비단 본 세트 외에 사이러스에 만든 다양한 제품군 모두에 매칭할 수 있다. 인티 앰프뿐 아니라 단품 CD 플레이어, 튜너, 프리앰프, 파워 앰프, DVD 플레이어, 서라운드 디코더 등 닥치는 대로 가능하다.

이번 시청에서 CDXT에 연결해보고는 역시 탁월한 성능을 입증했다. 여유가 되면 DAC XP에도 하나 더 연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고로 이번 시스템에 아울러 발표된 것이 X 파워라는, 단품 파워 앰프다. 가격은 DAC XP의 절반 정도 하니, 만일 본 세트를 구입한다면 한번 고려해볼 만한 옵션이라 보인다. 출력은 70W인데, 종래의 사이러스 앰프들이 그랬듯, 수치를 훨씬 상회하는 구동력과 해상도를 보여주는 만큼, 스피커 매칭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만일 좀 더 자금을 투자하고 싶다면 모노 볼록 파워 앰프도 있는 만큼, 선택의 폭은 넓다 하겠다.

이번 시청을 위해 파워 앰프는 플리니우스의 SA 250 MK2를 사용했고, 스피커는 틸의 CS 3.7을 동원했다. 시청 CD는 다음과 같다.

-조수미 "Dona Dona"
-다이어 스트레이츠 "Sultans of Swing"
-그레이트 재즈 트리오 "S Wonderful"
-베토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No.9" 아르헤리치 & 펄만

사실 PSX-R의 가세 여부가 전체 퀄리티에 큰 영향을 줬으므로, 이를 붙이느냐 붙이지 않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달라진다. 물론 파워 서플라이가 없는 상태로 들어도 이 콤비는 충분한 실력을 발휘한다. 무엇보다 가격대비 성능 면에서 아무런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퀄리티를 선사한다. 그러나 예산을 좀 더 들여 PSX-R 하나만 더해도 놀라운 변신을 하는 만큼, 이 세트에서 파워 서플라이는 필수라 하겠다.

우선 조수미의 노래를 들으면, 클라리넷과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등으로 이뤄진 단촐한 악기 편성이지만 그 존재감이 상당히 뚜렷하다. 특히 클라리넷의 음색이 귀에 오래 남을 만큼 인상적이다. 조수미도 팝의 보컬 형태로 편하게 노래해서 듣기에 편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고역에서의 놀라운 기교, 매력적인 음색, 몰아칠 때와 쉴 때를 적절히 구분하는 부분이 역시 조수미라 찬탄하게 하고, 이런 맛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대목에서 과연 이 세트가 얼마나 높은 퀄리티를 갖고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드럼과 베이스가 안정적으로 저역을 구축한 가운데, 특유의 손톱으로 뜯는 일렉트릭 기타의 질감이나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이 가격대에서 상상할 수 없는 높은 리졸루션을 자랑한다. 안길이도 깊고, 밸런스도 좋으며, 상당히 디테일한 표현에 능하므로, 딱히 꼬집을 부분이 없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 투입된 마스터 클록의 성능이 꽤 대단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싱싱하고, 딱 떨어지는 음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아울러 프리앰프도 높은 퀄리티임을 깨닫게 된다. 사이러스 특유의 온화하면서, 두터운 중역을 바탕으로 했지만, 실제로 꽤 넓은 대역을 커버하고 있는 것이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GJT의 경우, 인트로를 장식하는 드럼의 텐션이나 잔향 등이 놀랍도록 선명하고, 북과 심벌즈의 높이까지 정교하게 재생된다. 잭 디조넷이란 드러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작게든 크게든 두드리는 스타일인데, 그 의도가 명쾌하게 이쪽에 전달된다.

베이스 솔로시의 볼륨도 적당하고, 피아노의 터치도 여유만만하면서 힘이 있다. 과연 이 회사가 만인의 찬사를 받았던 CD8 SE를 뛰어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베토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역사적 만남인데, 시스템에 따라 또 그 퀄리티에 따라 표정이 다양하게 변하는 것이 재미있는 연주다. 기본적으로 라이브 음반이라, 도입부에 웅성거리는 관객들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고, 천천히 시작하는 바이올린의 음향히 공간을 침투하면서 유려하게 피아노가 백업하는 부분이 일목요연하게 포착된다.

다소 실키 톤인 펄만이지만, 여기서는 충실한 중역을 바탕으로 꽤 따스한 톤으로 다가온다. 피아노도 신경질적이지 않고, 적절하게 펄만과 호흡을 맞춰가는 모습이다. 서로 긴장하면서도 눈짓이나 몸짓으로 적절히 대화하는 부분이 그려질 만큼 사실적인 재생이다.

과연 사이러스를 하이 엔드 메이커에 집어넣을 수 있느냐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리형 CDP를 듣게 되면, 퀄리티만 따져볼 때 웬만한 하이 엔드 부럽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참 오래 전에 앙증맞은 인티 앰프로 시작해서 지금은 하이 엔드를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사이러스. 그 느리지만 확고한 발걸음에 커다란 찬사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