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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2R 래더 DAC의 르네상스

최근 관심사는 단연 멀티비트 R2R 래더 DAC이다. 기존에 이를 접해본 것은 많지만 집에서 직접 운용해본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가장 음향적으로 좋은 결과를 보여준 것은 단연 MSB 테크놀로지였다. 최근에도 Analog DAC를 다시 들어보면 왜 이 DAC를 리뷰하면서 호평했는지 지금 와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론 Reference나 Select DAC를 들어보면 군침이 흐르지만 가격대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 외에도 아쿠아 퀄리티, 토탈DAC 그리고 국내 메이커 반오디오 등 래더 DAC는 그 종류가 델타 시그마 진영에 비해 많진 않지만 뭔가 보석을 찾아 헤매는 듯한 재미를 준다.

요즘 여러 DAC가 나의 시청 공간을 들락거리고 있는데 그 중 AMR의 제품도 눈에 띄었다. DP-777이라는 DAC로 요즘 한창 DAC 및 액세서리로 인기몰이 중인 ifi와 자매 회사. 말은 자매 회사지만 ifi의 디지털 관련 설계의 아이디어는 모두 AMR의 엔지니어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DP-777이 그 증거 중 하나로서 멀티비트 R2R DAC와 델타 시그마 방식 DAC를 모두 내장해놓고 사용자가 골라서 맛볼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다. 게다가 출력단은 쌍 삼극관을 적용해 다른 DAC에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아날로그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

트리니티 디자인

R2R 래더 DAC이라고 해서 모두 아날로직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R2R은 오히려 델타 시그마 방식보다 더 디지털 같은 사운드를 내주기도 한다. 모두 설계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구사한다는 DAC가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트리니티에서 출시한 DAC들이다. 종종 보는 해외 포럼 중 ‘What's Best Audio and Video Forum’에서 다양한 의견이 올라오면서 수 년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섰던 브랜드다. 홍보도 없이 오직 제작자와 사용자 간의 소통만을 통해 메이저 브랜드를 위협하는 매니악 브랜드. 최근 트리니티를 만나볼 행운을 얻었다.

트리니티의 뿌리는 하이엔드 오디오가 아니었다. 1995년 일종의 센서 관련 비즈니스를 위해 설립한 ‘TRINITY Electronic Design GmbH’가 모기업이다. 여기에서 ‘GTE GmbH’라는 회사로 분사한 회사가 센서 사업에 더해 DAC 및 앰프 등 하이엔드 오디오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트리니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때가 2011년이다. 약 11년에 접어든 독일 출신의 하이엔드 메이커지만 이들은 오랜 디지털 역사를 꿰뚫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적인 DAC 알고리즘을 설계해 신제품을 내놓는 족족 세간의 관심을 폭증시켰다.

실버 레퍼런스 DAC & PREAMP

Trinity Silver Reference DAC 전면

트리니티의 실버 레퍼런스를 처음 보면 요즘 영미권의 기기와 같은 세련된 첨단 기기 같은 인상이 아니라 수공 명품 같은 인상이 든다. 마치 폴란드 등 동구권, 예를 들어 폴란드의 램피 제이터 같은 풍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전면엔 단 네 개의 버튼만 존재하며 중앙에 작은 디스플레이 창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내부 구성을 살펴보면 예사롭지 않다. 이 정도 가격대 R2R 래더 DAC라면 으레 저항을 하나하나 붙여 디스크리트 방식 DAC 보드를 직접 구현했을 거라 예상했는데 예상보다 심플하다. DAC 칩셋을 다량으로 투입해 독자적인 오버샘플링 방식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참조. Trinity Silver Reference DAC 매뉴얼 링크

트리니티는 이를 LIONOTEC, 즉 ‘Linear Analog Oversampling Technology’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복잡한 필터 회로 대신 칩셋의 조합에 따라 자연스러운 필터를 구사했다. 예를 들어 2웨이 아날로그 오버 샘플링을 진행할 때는 두 개의 DA 컨버터를 활용하며 4웨이 오버 샘플링엔 네 개를 활용한다. 그리고 최대 8웨이 오버샘플링엔 총 여덟 개의 DA 컨버터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트리니티는 실버 레퍼런스에 채널당 8개, 양 쪽 채널 모두 합하면 무려 16개의 DA 컨버터가 필요했다. 매뉴얼을 보면 이 때 시간축, 주파수 축 측정 결과물을 예시로 들어 설명하고 있으니 더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를 참조하길 바란다.

DAC 칩셋은 버브라운의 R2R 집적 칩셋인 PCM1704를 사용하고 있다. CH 프리시전 등 스스로 디스크리트 R2R 래더 칩셋을 사용하지 않은 멀티비트 DAC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칩셋인데 트리니티도 이 버브라운 DAC 칩셋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실버 레퍼런스는 DSD를 PCM과 다른 모드에서 별도의 DAC를 통해 아날로그 변환하도록 설계했다. DSD 음원의 변환을 담당하는 칩셋은 시러스로직의 WM8740을 사용하고 있다.

Trinity Silver Reference DAC 후면

이 외에도 트리니티는 실버 레퍼런스에 자사의 독자적인 기술을 꼼꼼하게 적용하고 있다. 디지털 신호 품질에 지대한 영향을 끼지는 클록의 경우 VCOCXO. 즉 ‘전압 조정형 오븐 제어 수정 발진기’를 총 두 개 탑재해 지터를 최소화하고 있다. 클록 정확도는 1ppb. 지터는 28fs(10Hz~100kHz)에 달한다. 참고로 입력은 USB는 물론 AES/EBU, SPDIF 등을 지원하며 비동기 USB 입력단의 경우 최대 384kHz PCM 그리고 DSD의 경우 128fs까지 대응한다. 특이한 건 USB 입력단으로 갈바닉 아이솔레이션이 적용되어 있으며 내부에 일종의 허브 형태로 설계해 기기 내부에서 5V 전원을 공급받는 구조다.

Trinity Silver Reference Preamp

이번엔 DAC 뿐만 아니라 프리앰프도 함께 테스트했다. 같은 실버 레퍼런스 라인업의 프리앰프로서 디자인은 DAC와 거의 동일하다. 이 프리앰프 또한 음질을 위해 일반적인 프리앰프와 차원이 다른 회로를 구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입력부터 출력까지 모두 풀 밸런스 구조며 모든 신호에 대해 클래스 A 모드로 작동한다. 더불어 12개의 게인 스테이지를 설계해 병렬로 구성, 입력 노이즈 전압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골자다.

물론 프리앰프의 생명은 무엇보다 볼륨이다. 그리고 아날로그 볼륨의 성능은 저항과 릴레이의 품질과 그 구조에 있다. 우선 이 프리앰프의 경우 허용 오차 0.1% 미만의 고정밀 박막 저항을 사용한다. 이는 매우 낮은 소음과 온도 계수를 가진다고 한다. 게다가 밀폐형 릴레이는 스위칭 소음이 적으며 거의 반영구적인 수명을 가진다는 장점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프리앰프의 경우 일반적인 로터리 스위치나 포텐셔미터를 사용한 볼륨과 달리 임피던스가 600옴에 불과하다. Mhz에 이르는 광대역에 낮은 저항과 소음 그리고 볼륨에 따른 임피던스 변동이 없는 점 등 프리앰프로서 상당히 이례적인 스펙을 가지고 있다.

청음

이번 시청은 트리니티의 실버 레퍼런스 DAC 및 프리앰프를 모두 사용하고 파워앰프는 비교적 모니터 성격이 강한 브라이스턴 28B3를 사용했다. 여기에 아발론 프리시전 모니터 2를 사용해 트리니티 실버 레퍼런스의 사운드를 살펴보았다. DAC와 프리앰프를 제외하곤 모두 기존에 들어보았던 제품들이고 트리니티의 사운드 특성이 강해 DAC와 프리앰프의 성향 파악은 비교적 쉬웠다.

Olga Pashchenko
Beethoven: Appassionata, Les adieux & Waldstein

우선 피아노 소나타 몇 곡을 연이어 재생해보면서 전체적인 음상과 음정, 토널 밸런스 등을 체크해보면서 진행해나갔다. 예를 들어 올가 파슈첸코의 베토벤 소나타와 크리스티앙 짐머만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24/96, flac) 등을 들어보면 트리니티 실버 레퍼런스의 색채가 전체 시스템을 지배하는 느낌이 강하다.

피아노는 청량감이 높은 편으로 찰랑거리며 넓고 깊게 자신의 음색을 물결치듯 펼쳐나간다. 중, 고역은 꽤 예쁜 편으로 앙증맞을 정도로 또랑또랑한 사운드다. 같은 R2R DAC지만 MSB보다 선이 굵고 잔향이 깊으며 아쿠아 퀄리티보단 고역이 더 트여 있는 사운드다.

Diana Krall - A Case Of You
Live In Paris

다이애나 크롤의 ‘A Case Of You’(24/96, flac)를 들어보면 관객의 기침 소리마저도 짧고 명료하기보단 좀 더 길게 공간에 퍼진다. 충분히 세밀하지만 비유하자면 기계로 조탁한 느낌이 아니라 손맛이 느껴지는 듯한 리퀴드 사운드다.

피아노는 마치 유리잔을 부딪칠 때 나는 여음 같은 잔향이 따라다녀 상쾌하게 청감을 간질인다. 기음 위주의 딱딱하고 메마른 질감은 그 어디에도 없고 항상 충분한 배음과 잔향 시간을 가지고 싱싱한 아날로직 사운드를 표출하다. 다행히 보컬 치찰음은 거슬리지 않으며 전체 토널 밸런스나 음상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Fourplay - Chant
The Best Of Fourplay

심지가 곧고 칼로 잰 듯한 냉정한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고 마치 생물처럼 충만한 에너지로 꿈틀대는 소리다. 포플레이의 ‘Chant’(16/44.1, flac)를 들어보면 중, 저역 무게감은 높은 편이다. 마치 16비트 필립스 DAC 칩셋을 사용했던 당시 시디피로 듣던 포근하면서 묵직한 사운드가 되살아난 듯한 착각에 잠시 빠졌다.

최신 델타 시그마 칩셋을 사용한 DAC의 치밀하고 견고하면 냉정한 사운드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렇다고 디테일 감소로 인해 눅눅하게 짓눌린 사운드로 흐르진 않는다. 두텁고 무거운 저역과 달리 고역은 생생한 청량감으로 넘쳐난다.

Anne-Sophie Mutter, James Levin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Carmen-Fantasie

교향곡 등 대편성 클래시컬 녹음에선 활기 넘치는 무대를 표현해내며 꿈틀거리는 현장감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는 대부분 중, 고역 특성에 의해 지배 받는다. 예를 들어 안네 소피 무터와 빈 필이 함께 한 비제 ‘카르멘 환상곡’(16/44.1, flac)을 들어보면 싱싱한 바이올린, 디테일과 다이내믹스 모두 좋지만 무엇보다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실체감이 매력적이다.

인공적으로 다듬어낸 무채색의 석고상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천연의 색감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네추럴 사운드다. 단, 샘플링레이트가 다른 음원을 연속해서 재생할 때 틱 소리는 거슬리는 편이었다. 더불어 프리앰프는 게인이 상당히 낮은 편으로 게인이 높은 파워앰프와 매칭을 권하고 싶다.

총평

최근 여러 R2R 래더 DAC를 들여 비교 청취하고 있는 가운데에 있던 차 궁금했던 트리니티와 만남은 유의미했다. 그 중 실버 레퍼런스 DAC는 특히 각별한 개성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운드로 나의 기대에 부합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디지털 기기지만 소리에 있어선 마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자유롭게 넘나들 듯 미묘한 음악적 뉘앙스를 솔직하게 가감 없이 표출해주었다. 다음엔 트리니티의 레퍼런스 파워와 함께 시청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면 좋을 듯. 실버 레퍼런스 DAC와 프리앰프는 하이엔드 오디오의 관습을 허문 문제작이다.

글 : 오디오 평론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