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스즈키의 마태 수난곡을 보고

유창숭님이 스즈키의 마태수난곡 감상기를 올린 관계로, 같은 공연을 본 제 감상문 또한 올릴까 합니다. 다른 사이트에 올려논 것을 다시 올려 놓은 것이니, 이 점 너그럽게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활절이 가까와 오고 있지요? 국내에서도 부활절에 즈음해서 교회와 성당을 중심으로 종교음악들이 연주되지만, 제가 있는 뉴욕에서도 교회와 콘서트 홀에서 크고 작은 종교음악들 연주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물론 뉴욕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종교음악 단체나 원전악단들이 많지 않은 관계로, 런던, 파리 등 종교음악 단체들이 발달된 유럽도시 들에 비해서는 양과 질에서 약간 밀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역시 뉴욕 답게 부활절에 걸맞는 굵직한 단체들이 방문을 하여 그 명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일단 지난 4월 5일 유서 깊은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탈리스 스콜라스의 르네상스 음악 공연이 있었고, 지난 화요일 (8일)에는 카네기 홀에서 스즈키가 이끄는 바흐 콜리기움 재팬의 역사적인 첫 미국공연인 마태 수난곡 전곡 연주가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음주 금요일 18일에는 폴 메크리쉬가 이끄는 가블리엘리 콘소트 엔드 플레이어즈가 링컨 센터의 리사이틀 홀(즉, 소강당)인 앨리스 튤리 홀에서 요한 수난곡 전곡을 연주하게 되고, 아울러 일요일(20일)에는 같은 단체가 성 이그나시우스 로욜라 교회에서 부활절 오라토리오와 바흐 칸타타를 연주하게 됩니다. 또 다음주 부터는 뉴욕 5번가에 있는 대형 성당 "성 페트릭 성당"에서 요한네스 소마리 (뱅가드 음반에 단골로 나오던 그 지휘자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활동을 하는가 봅니다)가 종교곡들을 지휘하게 됩니다. 저는 그중 며칠 전의 마태수난곡 연주를 다녀 왔고, 또 요한수난곡 연주를 예매하여 놓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헤레베헤가 뉴욕에 와서 마태수난곡 전곡 (그것도 소강당격인 앨리스 튤리 홀에서)을 연주할 예정인데, 그 때즘이면 서울에 있어야 할 저의 입장이 무척 아쉽게 느껴집니다. 그밖에도 지난 수요일(9일)에는 에버리 피셔 홀에서 베를리오즈의 희극 오페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를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매우 인상이 깊었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최고 전문가인 콜린 데이비스가 이번에 뉴욕 필의 지휘봉을 잡았는데, 역시 그답게 다이내믹 하고 모호함이 없는 베를리오즈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익스피어의 희극 "Much Ado About Nothing"을 오페라화한 동 오페라가 레시스타티브 보다는 다이얼로그를 많이 쓰고 있다는 특성 때문에, 한 배역을 두 사람(전문 가수와 연극 배우)이 맡아 다이얼로그 부분에서는 배우들이 영어로 대화를, 음악 부분에서는 성악가들이 불어로 노래를 부르는 희안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콘서트 형식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인 연기가 가미되었기 때문에 재미가 솔솔했고 또 성악가들과 배우들이 경쟁적으로 우수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해 내어 오랜만에 음악회에 가서 실컷 웃고 왔습니다. 아울러, 헤리에트 해리스, 데이비드 하이드 피어스, 필립 보스코 등 브로드웨이의 연극, 뮤지컬, 그리고 티브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명성을 쌓은 명 배우들을 음악회에서 직접 볼 수 있었고, 또 베아트리체 역의 수잔 멘처가 주도하는 성악진들도 데이비스의 노련한 리드에 따라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수잔 멘처는 얼마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좌에서 본 낙소소섬의 아드리아드네에서도 "작곡가'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는데, 동 역은 속칭 '바지'역(여성이 남성역을 하는 것)인 관계로 그녀의 여성적인 매력을 볼 수가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역에서는 멋진 여성으로 탈바꿈되어 있더군요. 또한 늘 심각한 모습의 베를리오즈로부터 여유와 위트가 넘치는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얼마전에 본 베를리오즈의 최대 걸작 오페라 '트로이인'과 함께 이 곡을 이야기 해보기로 하지요. 스즈키의 마태수난곡 전곡을 듣기 위한 예습으로 집에서 오랜만에 칼 리히터의 1958년 구반을 틀어 보았습니다. 역시 감동적이더군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연주이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 연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합니다(오래전 일이지만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이 연주를 복사한 테이프를 워크멘에 넣고 밤에 침상에서 듣고는 했습니다). 그 후 나온 레온하르크, 아르농쿠르, 헤레베헤, 가디너 등 대표적인 원전연주를 들어 보았지만 역시 저에게는 리히터의 구반만큼 감동을 주는 연주는 없습니다 (굳이 더 추가하자면 저에게는 얼마전 운좋게 오이로디스크의 LP를 구하게 된 마우스베르거의 연주와 늘 이견이 있는 클렘페러의 연주입니다). 칼 리히터의 꽉 짜여지면서도 건실한 해석에 최고의 에방겔리스트인 해플리거를 들을 수 있고, 또 젊은 날의 피셔 디스카우의 음성 또한 인상적입니다. 늘 들을때는 신앙심이 넘치는 노련한 바흐 연주의 극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랜만에 녹음 데이타를 보니 (이 연주의 CD가 워낙 늦게 본사에서 CD화 된 관계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80년대 말 CD 판매를 거의 독점하고 있던 충무로의 영일전자에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일제 CD입니다) 이 연주에 참여한 거의 모든 연주자가 당시 30대였더군요. 소프라노이던 제프리드가 당시 39세인가로 제일 고령이고, 칼 리히터나 피셔 디스카우 등은 35세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들려주는 연주는 인생을 관조하는 것 같더군요. 저는 기독교인은 아닙니다만은, 신앙심이 넘치는 종교음악으로부터는 늘 깊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스즈키도 "바흐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종교를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하여 이견이 있으신 분들도 분명히 계시겠지만, 적어도 저는 스즈키의 말에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스즈키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바흐의 종교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도데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음악이 수행하려고 했던 본래의 종교적 목적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감동의 정점에 있는 곡이 바로 바흐의 마태수난곡입니다. 그렇기때문인지 몰라도, 연주에 대한 호, 불호를 떠나, 마태수난곡을 듣는 것 자체에 대한 감동이 대단했고, 그것을 실연으로 듣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세 시간 남짓 되는 긴 곡이지만(예상대로 1부와 2부 사이에 인터미션을 두고 있었습니다), 일단 곡이 연주되면 바흐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성경의 이야기에 몰입되고 맙니다. 비장하면서도 애절한 합창과 오케스트레이션의 조화, 그리고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각 솔로 파트와 레시스타티브임에도 왜 이렇게 음악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들리는지 모르는 에팡겔리스트와 예수의 레시스타티브 등은 음반으로 들을 때에도 느꼈지만 실연으로 들으니까 더욱더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 고전음악을 음반 또는 연주회를 통해 자주 듣고 다니게 됨으로써 만들어지는 나쁜 버릇중의 하나는 자꾸 연주를 비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와 같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곡을 다른 연주와 비교하게 되는 것은 적절한 태도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음악회의 감동을 감소시키겠지요), 이 나쁜 버릇을 쉽게 버리기는 어려운지라, 연주진행시 가슴으로는 감동을 하면서 머리로는 나도 모르게 다른 연주들이 떠올랐는데, 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좋은 연주이기는 하였지만 소문난 만큼 뛰어난 연주로 보여지지는 않았습니다 . 오케스트라는 거의 젊은 일본인 연주자들로 구성된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무난한 진행이기는 하였지만, 짜임새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리히터의 악단에서 듣던 깊이가 결여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나무는 있으나 숲이 없는 연주인 것 같더군요. 특히 얼마전에 보았던 스즈키의 스승인 콘 쿠프만의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와는 분명히 수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스즈키의 해석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세심함과 지나칠 정도의 분석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가 곡의 텍스트를 중시하는 연주를 한다고 강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리히터, 클렘페러, 마우에스베르거나 레온하르트 연주 등에서 느낄 수 있던 텍스트와 연주와의 진정한 밀착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제가 스즈키의 마태수난곡 음반을 들어보지 않은 관계로 판단을 하는 것은 주저스럽지만, 이들의 음반상의 연주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면 진정한 '명반'의 대열에 들기에는 역부족이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악단 자체가 카네기 홀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에 지나치게 긴장을 한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스즈키는 아직 50이 안되었는데, 외모는 거의 70대더군요. 백발에 장발이라, 농담을 하자면 신선복만 입히면 완전히 신선으로 탈바꿈할 것 같더군요. 독창자들은 스즈키와 자주 연주를 하는 튀르크(에방겔리스트), 코지 (예수) 등에 노노시타 (소프라노), 블레이즈(카운터테너), 사쿠르다(케너), 요헨 쿠퍼(베이스) 등 BIS 음반에서 자주 접하던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일단 에방겔리스로 이름 높은 튀르크는 헤플리거의 수준까지는 되지 않지만, 그의 진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역시 보스트리지와 같은 영국계 테너보다는 독일계 테너들이 이 역에는 더 적합한 것 같이 개인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예수역의 코지도 무난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34세의 신예 베이스 쿠퍼입니다. 쿠퍼는 베이스 부분과 유다, 그리고 필라투스역을 맡았는데, 근래의 젊은 베이스한테 찾아보기 어려운 우렁찬 성량과 타고난 표현력을 지녔더군요. 개인적으로는 그날 독창자중에는 가장 발군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 쿠퍼가 체널 클래식스에서 슈베르트 가곡 음반을 내었다고 하는데, 무척 관심이 가는군요). 저 개인적으로 마태 수난곡의 알토 부분을 카운터테너가 맡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알토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블레이즈는 그런대로 괜챦은 카운터테너임에도 불구하고, "주어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 와 같은 아리아를 할 때는, 캐슬린 페리어와 같은 위대한 알토들의 음성이 너무 아쉽더군요. 두 명의 일본인 가수들은, 음반에도 자주 등장하는 멤버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외국 가수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테너는 그런대로 들어줄만 했는데, 소프라노 아줌마는 너무 기복이 심하더군요. 저는 1층 앞에서 5번째 줄에 앉은 관계로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뒤에 앉으신 분들은 성량이 부족하여 잘 안들렸다고 합니다. 합창은 그런데로 좋았고, 합창단들의 독일어 딕션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음악의 감동을 감소시키는 푸념들을 늘어 놓기는 했지만, 이들이 좋은 단체라는 점에는 저도 이론이 없습니다. 아마 저의 기대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해 봅니다. 그래도 동양의 단체가, 그것도 원전 연주로, 세계 최고 연주장인 카네기홀 대강당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 개인 독주자나 정명훈, 오자와 같은 지휘자들이 카네기홀 대강당에 서는 경우는 자주 있지만, 개인이 아닌 동양의 단체가 그것도 카네기홀이 직접 주최를 하는 연주에 서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거의 어렵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음악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고, 또 무척 부럽기도 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단체가 나와서 이러한 기회를 부여받는 날이 있었으면 합니다. 앞에 언급한 것처럼 다음주에는 멕크리쉬의 요한수난곡 연주를 보러 갑니다. 맥크리쉬는 수난곡 연주시 한 성부에 한 사람씩을 기용하는 이른바 '리프킨 학설'을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그 이상은 저도 잘 모릅니다), 무척 기대가 되는군요. 이런 연주를 대강당이 아닌 소규모 강당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매우 마음에 듭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연을 다녀와서 시간이 되면 올려보기로 하지요.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내요. 이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