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여기서 주인공이 처음 여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대목이 나온다. 잘 지어진 단독 주택에 유럽의 고급 주택 뺨치는 호화롭고, 고풍스런 인테리어는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꽁꽁 얼어붙게 하지만, 갑자기 그의 눈이 환해진다. 구석에 놓인 오디오 시스템을 본 것이다. 달려가서 직접 조작해서 음악이 흐르자 드디어 마음이 풀어지고, 용기를 얻게 된다. 이때 놓인 시스템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마란츠 앰프 및 SACD 플레이어 세트다.

일본에서 마란츠는 꽤 독특한 성격을 지닌 브랜드다. 영상과 음성을 다루는 기기들을 주로 생산하는데, 최근 데논과 연합하면서 D&M 홀딩스로 발돋움, 업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중이다. 특히, 가와사키 근방에 새로 시청실을 열면서 음에 대한 보다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여타 일본 메이커들이 갖지 않은 오다꾸 정신이 살아있어 매우 믿음직스럽다.

참고로, 새로 지은 시청실의 설비가 전세계 어디 내놔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러워 눈을 크게 뜨게 한다. 무엇보다 이중 벽을 설치, 밖으로 음이 새나가지도 또 들어오지도 않게 한 완벽한 차폐성은, 모든 오디오 애호가들의 꿈이 아닐까 한다. 메인 스피커로 B&W 800D를 갖다 놓은 가운데, ITU-R 스펙에 맞는 5채널의 서라운드 환경도 조성해서 차세대 포맷에 적극 대응하는 대목은, 역시 마란츠답다.

마란츠는 SC7S1과 MA9S1이라는 플래그쉽 프리, 파워 앰프가 있다. 가격도 높지만, 완성도가 뛰어나 스피커를 제작하거나 CDP 등을 구상할 때 검청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톱 모델을 만든 실력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원가 절감과 기술 이전을 감행, 하위 모델들을 선보이는데, 그런 결과물이 이번에 소개할 SA11S1이라는 SACD 플레이어와 PM11S1이다.

모델명에서 볼 수 있듯이, 11이라는 숫자는 최상위 모델 7의 다음 그레이드다. 마란츠가 왜 7을 톱에 올려놓는지에 관해선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듯 싶다. 아무튼 7이 다분히 상징적인 만큼, 가격도 높고, 만듦새도 뛰어나지만 시장성은 별로 없다. 이런 제품과 견줄 만한 상대는 전세계에 널렸다 해도 좋을 만큼 많고 또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1이 포진한 그레이드로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대로, 이 정도의 퀄리티와 완성도를 뛰어넘을 제품을 찾기가 극히 희박하다. 그런 면에서 11 시리즈야말로 동사를 대표하는 모델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잠깐 7시리즈와 11시리즈를 짚고 넘어가자. 현재 7시리즈엔 SA7S1이라는 SACD 플레이어가 있고, 프리앰프로는 SC7S1(지금은 SC7S2로 진화)가 있다. 반면 파워 앰프의 톱 모델은 MA9S1(현재 역시 MA9S2로 진화)라고 해서, 9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왜 9인지는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어서 11시리즈를 보면, PM11S1과 SA11S1 두 모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 인티 앰프와 SACD 플레이어인데, 이의 염가판으로 15 시리즈가 존재한다. 결국 7(9)-11-15로 이어지는, 매우 간략한 라인업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제품을 쏟아내는 일본 업계의 관행상 이런 단촐한 메뉴는 참 신기하다. 그래서 음에 더욱 신뢰가 가기도 한다.

우선 인티 앰프부터 살피면, 일단 단단해 보이는 샤시가 눈에 띤다. 두꺼운 알루미늄 케이스인데, 여기에 신호 품질을 저하시키는 전자기의 간섭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리 도금을 했다. 톡톡 두드려보면, 손가락이 아플 정도도 단단하면서 음향학적인 배려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전면에 배치된 커다란 두 개의 노브는 각각 볼륨과 셀렉터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디스플레이어 창과 조화를 이뤄, 보기에도 좋다. 실제 노브를 조작해보면 감촉이 좋고,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구력을 지닌 메이커이기에, 이런 조작부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쉽게 상상이 간다.

디스플레이창의 양옆에 일종의 도랑처럼 홈을 길게 파서 몇 개의 스위치를 단 점은 기능적인 면이나 디자인적인 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부분이다. 깔끔하면서 한 눈에 모든 조작이 다 들어온다. 샴페인 골드 색상에 몇 개의 스위치가 성의 없이 붙어있는 여타 일제 앰프들과 분명 차별되는 대목이다. 그러니 <전차남>에 등장하는 호화 주택에 어울리는 소도구로 편입되지 않았을까 짐작도 해본다.

본 기에서 중점이 되는 부분은, 역시 풀 디스크리트 회로와 이를 정밀하게 동작시키는 완벽한 전원부다. 이를 위해 차폐된 수퍼 링 트랜스포머와 맞춤형 부품을 투입하고 있다. 특히, 입력단에 초크 전원 공급기를 사용해서 정류기의 고조파 노이즈를 대폭 줄인 것은, 본 기의 뛰어난 음악적 퀄리티와 연결되는 대목이다. 본 기의 출력은 8오옴에 100W. 아슬아슬하게 커트 라인에 걸친 수치다. 그러나 4오옴에 정확하게 200W를 내니, 정공법으로 파워단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내부를 보면, 프리앰프 부분은 3개의 스테이지로 나뉘어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고, 파워단은 듀얼 스테이지로 구성, 완벽한 듀얼 모노럴 형태를 띠고 있다. 이로서 채널간의 간섭을 극도로 억제하는 효과를 얻는다.

한편 SACD 플레이어 SA11S1을 보자. 여기서 지적할 것은, 마란츠 독자의 디지털 필터링 기술이다. 사실 대부분의 CD 혹은 SACD 플레이어 메이커들은, 기존의 DAC 칩을 사와 나름대로 아날로그단을 꾸며서 음질을 보정하거나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즉, 디지털 부분에 대한 노우 하우가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날로그단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이런 디지털 장비를 구축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전문 연구소와의 교류도 필요하고, 대기업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공방 수준의 오디오 메이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란츠는, 독자적인 디지털 필터를 생산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전세계 몇 안 되는 오디오 메이커다. 당연히 이런 부분에 연구를 결집, 그 성과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SACD 및 CD를 재생하는 기기로서, 필터를 세 개나 제공하는 것은 마란츠가 아니면 힘든 옵션이다. 이 필터를 통해 소비자는 원하는 음색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능이 순전히 디지털 도메인 상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일반적인 아날로그단의 구성에서 예상되는 음질 열화나 디스토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지적할 것은, 앰프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전원부의 구축이다. 오디오에서 전원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마란츠는 이 부분 역시 정공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수퍼 링 트랜스포머를 이용한 안정적인 전원 공급 및 입력단에 초크를 사용해서 정류기의 고조파 노이즈를 줄인 것은, 역시 앰프를 만들어본 회사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PM11S1과 SA11S1을 나란히 놓고 보면, 디자인 면에서 통일성이 있고, 기능미도 뛰어나서, 과연 <전차남>에 어울릴 법한 고급스런 품격을 자랑하고 있음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사실 필자는 PM11S1을 나름대로 가격대비 성능이 매우 뛰어난 제품으로 점찍고 있었다. 이전에 이의 하급 모델인 PM15S1을 듣고 그 뛰어난 음질에 놀랐던 터라, 내심 PM11S1을 들어보고 괜찮으면 구매해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SACD 플레이어는 사면 이득인 제품이다. 특히, CD의 음도 뛰어나 별도로 CD 플레이어를 구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이번에 깨달은 것은, 인티 앰프 역시 어디 내놔도 떨어지지 않은 성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간 일제 앰프류가 보였던 약점을 슬기롭게 극복해서 수준 높은 음악성을 획득하고 있는 점에 큰 박수를 보낼 만한 제품인 것이다.

시청에 동원한 것은 하이페리온의 HPS-968이다. 하이파이 클럽의 새로 개장한 시청실을 방문한 분은 알겠지만, 큰 쪽이 20여평, 작은 쪽이 12평 정도 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사이즈다. 그런데 968과 마란츠 세트를 큰 시청실에 설치했다. 어찌 보면 가미가제 특공대 식의 자폭이 아닐까 싶은데, 눈 딱 감고 도전해봤다.

막상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놀랍게도 스피커가 노래하기 시작한다 ! 이 커다란 시청실을 기분 좋게 채우면서, 스피디하고, 단정하며, 와이드 레인지하게 음의 소스를 풀어헤치는 것이다. 재즈는 재즈답게, 록은 록답게, 클래식은 클래식답게, 전천후의 대응력을 보여주며, 누가 들어도 납득할 만한 음이 쏟아지고 있다. 새삼 이 마란츠 세트의 위대함에 놀라고 말았다.

우선 파트리샤 바버의 는, 지난 번 하이 엔드 스피커 특집 때 사용한 소스여서 매우 친숙한 음이다. 그 정도의 압도적인 베이스나 큰 스케일의 음장감은 아니지만, 통상의 시청 환경에서는 별 이의를 달 수 없는, 매우 투명하고 밸런스가 좋은 음이 나온다. 더블 베이스는 자연스럽게 부유하고, 두꺼운 줄을 뜯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 스피디하게 춤춘다. 중앙에 위치한 보이스는, 적절한 육질감을 가지면서 기분좋게 부유하는데, 소스가 갖고 있는 다분히 관능적이고, 요염한 기운이 물씬 풍겨난다. 한 마디로 스피커를 꽉 움켜쥐고 소스에서 전달되는 신호와 분위기를 한껏 쏟아내는 기분이다.

이어지는 보위의 는, 역시 지난 하이 엔드 스피커 특집에서 사용한 소스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전혀 쏘거나 혼탁한 기운이 없이 스트레이트하게 나온다. 보컬이 일체 머뭇거리거나 밴드에 가린 기운이 없고, 그루비한 리듬감이 넘실거리며 어깨춤을 추게 한다. 스튜디오에서 의도한 각종 이펙트가 선명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아, 이런 소스도 경우에 따라선 충분한 감상용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한편 SACD로 넘어가 노라 존스의 를 듣는다. 익히 들은 노래지만, 역시 포맷상의 와이드 레인지가 두드러져 개방감이 훨씬 증가하고, 악기와 보컬이 더욱 자연스럽게 들린다. 특히, 이 녹음은 약간 고전적인 스타일로 해서 음상이 좀 크다. 그런 부분이 얼마나 음악적으로 녹아드느냐에서 마란츠의 해석은 상당히 훌륭한 것 같다.

이어서 반 클라이번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1악장. 프리츠 라이너 지휘의 시카고 심포니와 협연으로, 1962년 녹음이다. 다소 뭉친 듯하면서 기세가 등등한 녹음 당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지금처럼 정밀한 녹음과는 달리 단점이 많지만, 이런 녹음은 또 이런 맛에 듣는다. 장엄하게 밀어닥치는 현악군의 움직임이나 피크에서 몰아치는 클라이번의 신들린 연주는 손에 땀이 날 정도여서 오랫동안 LP에 매달려서 이룩한 사운드 퀄리티에 가볍게 근접한다.

이번에 접한 마란츠 세트는, SACD 플레이어뿐 아니라 인티 앰프 역시 뛰어난 퀄리티를 갖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아무래도 세트로 묶는 편이 여러 모로 이득이라 여겨지는데, 일제 하면 눈살을 찌푸리는 많은 애호가들도 이 음에 관한 한, 야멸찬 평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음질과 별도로 뛰어난 내구성과 안정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이 세트가 지닌 또 하나의 강점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