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필자는 많은 제품을 리뷰하지만, 스피커를 리뷰할 때 제일 신이 난다. 아무래도 스피커는 다른 컴포넌트보다 구성이 간단하지만 개성이 제각각이어서 제품 간의 차이가 현격하므로 쓸 말도 많고, 개인적인 호기심도 많이 충족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 소스 쪽으로 말하면, 약간 부담을 느낀다.

우선 CDP로 말하면 골치 아픈 디지털 관련 용어가 가득하다. 어디 그뿐인가? 트랜스포트에 관련한 공학이나 진동 등의 문제도 공부해야 한다. 이래저래 문과 계통을 나온 필자에게 머리를 쥐어짜는 일만 가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스피커가 아니라 소스라고 생각한다. 만일 예산을 짠다면 전원과 소스 쪽에 반 정도를 투자하고 나머지에 앰프와 스피커를 투자하라 말하고 싶다. 하긴 한국의 일반적인 가정환경을 생각하면, 실은 북셀프 정도로도 충분하다. 저역의 문제 때문에 3웨이 톨보이나 플로어 스탠딩을 가지만, 이조차 바닥을 치는 막강한 구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대출력의 파워 앰프도 그리 필요치 않다.

반면 소스 쪽으로 말하면, 투자한 만큼 소리의 퀄리티가 올라간다. 100만원을 쓰면 100만원짜리 소리가 나오고, 1천만원을 쓰면 1천만원짜리 소리가 나온다. 이런 예외를 보여준 제품은 만난 적이 없다. 앰프나 스피커를 비교 시청하면 가끔 뛰어난 가격대비 성능을 지닌 제품을 만날 수 있지만, 소스 쪽엔 예외가 없다. 특히, 디지털 쪽을 말한다면 야박하게도 로또 복권이 없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 만나는 CDP는 어느 정도 그레이드일까? 과연 단품으로 3천만원이 넘는 제품이 현재 시장에서 존재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어중간한 분리형보다는 훨씬 낫고, 이 가격을 붙여도 좋을 만한 퀄리티가 있다! 이 답에 만족하셨다면 더 이상 다음 글을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분들을 위해 본 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다.

코드의 주재자인 존 프랭스(John Franks)는 원래 항공 관련 엔지니어다. 정확히는 전투기용 블랙박스의 전원부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말이 전원부지, 실제 500W 이상의 전원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은 어이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첨단 장비로 무장한 전투기지만 사이즈는 그리 크지 않다. 겨우 닭날개 정도쯤의 공간에 이런 전원부를 설치해야 하니, 그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정된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나중에 앰프에 접목되었음은 물론이다(당시 이미 존은 취미로 앰프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평이 좋았다고 한다). 코드의 앰프들이 그리 크지 않으면서 놀라운 성능과 파워를 낼 수 있음은 바로 이런 전투기에 관련된 기술을 응용했기 때문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존이 개발한 또 하나의 기술은 바로 어스에 대한 부분이다. 대개 플러스, 마이너스 그리고 그라운드로 구성된 전원부의 설계에서 대부분 그라운드 선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일체의 전류가 흐르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불안정하다.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대부분의 설계자들은 인풋 과정에서 조절하는데 반해 존은 크로스 커플드 마그네틱을 이용한 독자적인 기술을 갖고 있으니, 이 대목에서 코드 앰프의 진가가 숨어 있다 하겠다. 아무튼 안정적인 전원부를 바탕으로 한 앰프 설계는 코드가 짧은 시간에 주목받는 회사로 성장하게 된 밑거름이라 하겠다.

코드의 제품들은 그 디자인에서 독특한 면모를 갖고 있다. 코드의 본사는 영국 켄트시에 있는데, 1870년대에 강변에 지어진 고풍스런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매우 특이한 형상을 띠고 있으며, 이것이 결국 코드 제품들의 디자인 콘셉트로 연결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당초 BBC의 스튜디오 모니터용으로 개발된 스펜더의 LS5/8 스피커를 위한 앰프를 납품하면서 주목을 받은 코드는, 곧 성능을 인정받아 애비로드, 소니, THX 등에서 앞을 다퉈 채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프로 음향에서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홈 오디오에 진출, 21세기에 들어와 가장 빠르게 성공한 앰프 회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디지털 쪽에도 눈을 돌리니, 그 대표적인 성과가 코드 블루와 DAC 64 콤비였고, 이제 상급기 레드 레퍼런스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실 코드의 CDP 관련 제품들은 전적으로 존의 작품은 아니다. 로버트 와츠(Robert Watts)라는 사람이 주요 설계자로서, 지난 25년간 주로 DAC 부문을 연구했다고 한다. 로버트를 기용하면서 코드의 디지털 관련 제품들은 큰 주목을 받기에 이르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그 핵심인 DAC 칩에 대해 알아보자.

대개 많은 CDP들은 아날로그 디바이스나 버 브라운 등에서 만든 DAC 칩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칩들은 가로세로 각각 3밀리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작을 뿐 아니라, 100～200마이크론 정도의 펄스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코드 DAC 64에 채용된, 로버트가 제작한 칩은 크기가 가로 세로 2～3인치나 되고 펄스 대응력도 위의 제품들보다 약 1만 배 정도 더 크다. 이런 막강한 DAC 칩을 바탕으로 16비트의 데이터를 80비트로 전송해서 다시 24 혹은 16비트로 다운해서 출력하는데, 이 과정에서 44.1, 88.2 혹은 176.4kHz로 클록한다. 여기서 176.4kHz는 듀얼 데이터 모드로서, 이 정도의 정보량을 도저히 하나의 케이블에 전송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선을 이용한 경우라 하겠다.

그럼 블루 레이 디스크나 HD-DVD 등 새로운 포맷이 나온 시점에서, 음악 역시 CD 다음 세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데 갑자기 레드 레퍼런스를 들고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 이에 대한 존의 답은 이렇다.

“그간 저는 전 세계에 산재한 숱한 음반 가게들을 방문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직도 CD가 전체 매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SACD와 같은 매체는 약간만 보급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비율로 나눈다면 200:1 정도 될까요? 한번 당신의 CD 라이브러리를 보세요. 드뷔시나 라벨, 쇼팽 등 어떤 음악가도 좋으니 대부분 CD로 되어 있을 것이고, SACD는 잘 모르는 악단이나 가끔 일본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채워져 있을 것입니다. 코드 블루 다음으로 레드 레퍼런스를 기획하게 된 배경엔 이런 시장의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코드 블루와 DAC 64를 개량해서 하나의 몸체 안에 담은 레드 레퍼런스는 필립스의 CD 프로 2 메커니즘을 트랜스포트부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오실레이터로 데이터를 전송한다. 매우 신속하면서 정확한 전송을 자랑한다고 한다. 여기에 4096 탭 렝스 WTA 필터를 사용해 일시적인 타이밍 오류를 최소화했다.

한편 DAC부를 보면, DAC 64를 개량해서 1024 탭 필터링과 64비트 디지털 신호 프로세싱 코어를 사용했다. 이를 통해 디지털 신호는 176.4kHz에서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된다. 이 과정에서 각종 노이즈 쉐이핑과 4세대 펄스 어레이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또 램 버퍼 기술로 지터를 완벽하게 제거하니 매우 클린하고, 해상도가 높은 음을 구현하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기술들이 FPGA(Field Programmable Gate Arrays)로 제작되어, 향후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면 EPROM 메모리칩을 교환하는 것으로 손쉬운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고 한다. 말하자면 한번 사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제품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레드 레퍼런스의 내부를 보도록 하자. 우선 밑판을 떼어내고 살펴보면 후면 왼쪽에 AC 코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입력된 전기는 스위칭 모드의 파워 서플라이에 연결되어 맞은편의 DC 파워부로 넘어간다. 여기서 각 파트에 전원을 공급해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DC 파워부와 스위칭 모드 파워 서플라이 사이에 트랜스포트부가 있고, 그 뒤에 176.4KHz로 데이터를 업샘플링하는 디지털 아웃풋 보드가 있는 것이다.

이어서 위판을 떼어내고 보면, 역시 앞부분에 CD를 수납하는 파트가 있는데, 그 각도가 45도인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본 기를 랙에 수납할 때 사용상의 편의성이 있기 때문이다. 존에 따르면 워낙 프로 2 메커니즘이 뛰어나 이렇게 각을 줘도 동작에 전혀 하자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뒷부분의 DAC 보드와 연결된 두 개의 케이블이 눈에 띈다. 바로 176.4kHz를 커버하기 위한 듀얼 데이터 모드용이다.

두툼한 알루미늄 새시에 튼실한 네 개의 기둥으로 본체를 들어 올린 구조는 진동에 강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코드 특유의 디자인이 가미되어 마치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포름을 띄고 있다. 문제는 음질인데, 이 대목에서 가히 탄성을 지를 만한 퀄리티를 지니고 있어 과연 이 시대에 이런 몬스터급의 CD 플레이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시청에 동원한 기기는 다음과 같다. 스피커는 틸 CS 3.7로 고정한 가운데 앰프는 다질의 프리 파워와 B.A.T.의 렉스 & 150SE 콤비를 번갈아 걸었다.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커티스 풀러 “Blues Ette" 중
-허비 행콕 “River-The Joni Letters" 중
-윌코 “A Ghost Is Born" 중
-롯시니 “눈물”

커티스 풀러의 작품은 50년대 말, 루디 밴 겔더의 녹음이다. 두툼한 베이스에 진한 혼 소리에, 착착 감기는 하이햇의 스윙감은, 당시 녹음만이 갖고 있는 재미라 하겠다. 당연히 레드 레퍼런스가 풀어내는 해상력이 발군인데다가 그 음의 끝이 고와서 매우 기분 좋은 재생으로 이어진다. 특히 트롬본과 테너색스가 엮어내는 2중주의 앙상블은 가히 백미. 눈을 감으면 당시의 재즈 클럽에 간 듯, 갑자기 진한 담배 연기와 위스키 냄새가 난다.

허비 행콕의 최신 음반은 현재 녹음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 보컬의 반주를 즐기지 않는 허비지만, 조니 미첼과의 오랜 인연을 살려 적극적으로 의자에 앉아 두드렸다. 이 곡에 등장한 가수는 노라 존스. 과연 노라라 할 만큼 풋풋한 음성이 실내 가득 감싸는데, 천의무봉으로 엮어가는 피아노의 유려한 반주에 맞춰 실감나는 텅잉과 발성을 들려준다. 너무나 청순하고 싱그러운 보컬의 개성 때문에 시청실에 상큼한 꽃송이를 가득 담은 화병을 갖다 놨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 물론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면 아무 것도 없지만.

윌코의 작품은, 처음엔 나직이 중얼거리듯 읊조리다가 점차 고조되면서 드럼이 쿵쿵 두드리고 나서는 마성의 기타 솔로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그 높낮이나 강약이 명확하고, 여기에 밴드 특유의 음울함이 부각되어 진한 필링을 맛보게 된다. 대개 요즘의 록 그룹들이 깔끔하고, 인텔리한 반면 확실한 개성이 없는데 반해, 윌코가 드러내는 이런 중독성 깊은 사운드는 너무나 강렬하다. 그런 맛이 듬뿍 전해져 긴장감을 갖고 시청에 임하게 된다. 좋은 녹음이 갖는 장점을 포착하면서도 감상자가 요구하는 맛까지 잃지 않는 재생음은 레드 레퍼런스의 진짜 실력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롯시니의 작품. 잔잔한 현악기들의 앙상블이지만, 울림이 풍부하고 새김이 깊은 음이 나온다. 특히, 다분히 귀족적인 음색이 풍겨 나오는데, 이런 고상함은 과연 이 정도 기기를 소유할 사람들이 바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록이며 재즈도 좋지만, 특히 클래식에서 이런 미음을 내는 대목은 레드 레퍼런스가 가진 최대 장점이 아닐까 싶다. 객관적인 스펙이나 테크놀로지에서 별로 흠 잡을 데 없거니와 최종적으로 나오는 음에서의 높은 음악성과 고급스러움은, 과연 이 시대에 이 정도 CDP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런 음을 듣고 나면, 한 동안 집에서 음악 듣기가 꺼려진다. 요즘 억대를 호가하는 아날로그 턴테이블의 격전도 재미있지만, 그 사이 이렇게 진화해버린 CDP의 출현 역시 신선하다. 코드 블루와 DAC 64에서 배양된 기술을 한껏 진화시켜 이렇게 놀라운 음으로 다듬은 레드 레퍼런스는 단순한 디지털 기기가 아닌 예술의 경지로 올라선 명품이라 할 만하다. 만일 기회가 되면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