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필자가 방문해본 도시 중에 제일 인상적인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단연 로마라고 대답하겠다. 그중에도 포로 로마노 지역은 여태껏 가본 곳 중에 압권에 속한다. 콜로세움을 구경하고,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을 지나 팔라티노 언덕을 오르다 보면 밑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 유적이 바로 포로 로마노다. 사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시대의 중심지로, 시조 로물루스의 묘가 있는가 하면, 시저가 브루투스 일파에 암살당한 원로원 건물이 있는 등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런데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본 포로 로마노도 장관이지만, 그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고 펼쳐진 로마 시내의 풍경이라니! 마치 고대 로마 시대에라도 온 듯, 최소 1천년 이상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웅장하게 버티면서 멋진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데,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십여 분 얼어붙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로마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인생에서 단 한 도시만 방문한다면 로마를 가십시오.”

여행 안내서로 유명한 론리 플래닛에 나오는 구절인데,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아무튼 최근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 로마 시대의 역사를 탐구중인데, 그 와중에 패토스의 엔돌핀 CDP를 만나 이래저래 감회가 새롭다. 우선 디자인에 놀라고 말았는데, 로마나 나폴리처럼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이탈리아지만 의외로 첨단 산업도 활발해 람보르기니나 페라리가 이곳 태생임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런 파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이 적극 반영되어, 단순한 오디오 기기라고 보기엔 미안할 정도의 멋진 미적 센스가 발휘되고 있다.

사실 정통적으로 '이탈리아 사운드'(뭐 정확히 이런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면 주로 스피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소너스 파베르를 위시해 오페라, 차리오, 징갈리 등 무수한 명가들이 즐비한데,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목재의 질감을 잘 활용해 디자인적인 아름다움으로 구현하는 점과 다소 특정 대역이 과장되기는 했지만 보컬과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호소력과 개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패토스의 앰프는 소리 경향이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목재를 적절히 활용한 디자인 센스는 여전해서, 적재적소에 첨가한 부분은 과연 이탈리아산이라 탄복하게 된다. 인폴 회로를 이용해서 진공관과 TR의 장점을 적극 활용한 부분은 다른 메이커들과 차별화되며,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음엔 독자적인 미학이 존재한다.

패토스가 창업한 해는 1994년. 베네치아와 베로나 중간에 위치한 비첸차에서 시작했는데, 지아니 보리나토라는 젊은이가 새로운 앰프 회로를 창안한 것을 계기로, 비첸차에서 오디오 딜러를 하던 개타노 자니니와 산업 디자이너 파올로 안드리올로가 뭉치면서 본격적인 오디오 메이커가 되었다. 당시 지아니니가 고안한 하이브리드형 설계는 나중에 인폴(INPOL) 회로라 명명되어 이후 전세계 오디오 팬들에게 소개되거니와, 특히 파올로가 목재, 메탈, 스테인리스, 진공관 등을 골고루 사용한 디자인(거기에 붉은색의 첨가!)에는 역시 패션 대국 이탈리아다운 감수성과 유머가 가득해 한번 힐끔 보기만 해도 강력하게 뇌리에 남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세 명의 사나이가 일종의 죽마고우로서, 음악 활동도 같이 한다고 한다. 개타노가 매니저 노릇을 하고, 파올로가 피아노, 지아니가 기타를 친다는 것인데, 특히 파올로의 경우 톰 크루스 뺨치게 잘생겨서 연주가 끝나면 일종의 오빠 부대에 둘러싸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취미의 영역을 넘어선 실력이라 보면 될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참 부러운 대목이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생을 즐기는 부분은, 아마도 패토스의 제품군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참고로 비첸차라는 도시는 인구 12만밖에 안되는 소도시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인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만든 여러 개의 궁전과 성당, 탑 등이 가득해 일명 '팔라디오의 마을'로 불릴 만큼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다. 이 도시가 팔라디오를 고용한 이유는, 인근의 강국 베네치아를 의식해 결코 거기에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온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화적 자존심은 지금도 면면히 흘러내려와 현재의 패토스에 이어지지 않는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세 명의 사나이들은 비록 장르는 틀리지만 팔라디오의 멋진 후예들이라 하겠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엔돌핀의 외관을 보자. 너무 첨단의 느낌이 강해 CD 플레이어라기보다는 무슨 SF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으로 보일 정도다. 이런 제품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면, 아무래도 모노톤의 미니멀한 인테리어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 패토스에서 나온 앰프류와 나란히 배치해도 잘 어울리니,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과연 팔라디오의 후예다운 작품이다.

프론트 로딩 방식으로 설계된 본기는 당연히 상단 중앙에 돌출되어 있는 트레이가 보이고, 왼편에는 디스플레이 창, 오른편에는 버튼류가 배치되어 있다. 이 디스플레이 창의 존재감이 대단해서, 본기를 조작할 때면 첨단 우주 용품을 만지는 듯한 착각을 줄 정도다. 반면 오른편에 나 있는 여러 개의 버튼은 일체의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처음 접했을 땐 황당하기까지 했다.

물론 여기에 부속된 리모컨에도 일체의 표시가 되어있지 않다. 참고로 앰프에 딸려오는 리모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리모컨이라는 것이, 일단 사용자의 손에 익숙해지면 굳이 뭘 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작동이 가능하다. 10분 정도 조작하다 보면 저절로 손에 익으니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다. 참고로 리모컨은 위에서 아래로, 본체는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각각 플레이, 포즈, 스톱, 포워드, 백 등의 순으로 버튼이 배열되어 있다.

본기에 투입된 CD 트랜스포트는 필립스의 CDM 프로다. 상당히 안정성이 높고, 진동에 강한 제품이다. 여기에 마운팅 메커니즘을 스테인레스로 제작해서 한층 퀄리티를 높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별도의 클램퍼를 올려놓도록 되어 있다.

한편 트랜스포트 밑에 토로이달 트랜스를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트랜스포트가 진동에 강하게 대응하도록 일부러 무거운 것을 밑에 설치한 것이라 보면 된다. 그 옆에 다양한 필터 캡들의 배치에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이는 전체 CDP를 동작시키기 위한 12개의 독립된 전원부다. 원래 이런 CDP는 보급형의 경우, 아날로그용 하나, 디지털용 하나 정도로 전원부를 나눠서 공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각 파트를 나눠 보다 세심하게 전원을 분리할수록 음질상의 이득이 크다. 이 점을 엔돌핀은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DAC부를 보면, 24비트짜리 크리스털 칩셋을 썼고, 192kHz까지 업샘플링된다. 이어지는 아날로그부를 보면, 역시 앰프 메이커다운 실력이 가득 발휘되어 있다. 특히 최종 출력단에 러시아제 6H30을 채널당 하나씩 배치해서 최종 음질을 튜닝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역시 패토스만의 노하우가 담겨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실 패토스는 배터리 전원을 공급하는 포노 스테이지 외의 모든 제품에 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포노 스테이지를 제외한 이유는, 미세한 신호를 증폭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진공관에서 발생하는 노이즈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토스는 기본적으로 TR 앰프를 만드는 것이 골자이며, 진공관은 오로지 음질상의 튜닝에만 관여시킬 뿐이다. 이런 철학이 역시 엔돌핀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럼 본격적인 시청에 들어가기로 하겠다. 이번에 동원한 제품은 앰프로 역시 같은 패토스의 인폴 2 인티 앰프를 연결한 가운데, 스피커는 지난 번 시청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덴마크산 가무트의 PH7을 사용했다. 시청에 사용한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 Oscar Peterson Trio "You Look Good to Me"
- Stacy Kent "Shall We Dance"
- Beethoven "Concerto for Violin & Orchestra in D Major" Vadim Repin & Riccardo Muti Wiener Phil.
- Joni Mitchell "This Place"

오스카 피터슨의 곡은, 처음에 더블 베이스를 깊게 긁어가다가 사뿐하게 베이스 라인을 형성하면서 영롱한 피아노와 맞물리는 대목이 매력적인데, 그런 느낌이 즐겁게 다가온다. 강한 타건과 빠른 테크닉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감추듯 여유 있게 눌러대는 오스카의 흥겨운 리듬감은 매우 활기가 넘치고, 그에 수반하는 리듬 섹션의 스윙감도 절묘하다. 마치 지중해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의 레스토랑에 앉아 상큼한 샐러드를 먹는 듯, 음 하나하나가 또렷한 개성을 지니면서 전체적인 조화가 멋들어진 재생이다.

켄트는 필자가 최근에 깊이 빠져 있는 여성 보컬로서, 그 청아하면서 관능미 넘치는 보컬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배어나오면서도 악단의 리듬감이 잘 포착되어 듣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퍼진다. 사실 이 가격대의 CDP는 어찌 보면 어중간할 수도 있다. 좀 더 예산을 들여 분리형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재생되는 독특한 맛은 과연 패토스가 아니면 불가능한 대목이어서, 특히 이런 음악에선 그 매력이 철철 넘친다고 하겠다.

레핀은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는 바이올린 주자로, 첨단 녹음이 갖는 해상력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질감이 매우 따스해서 베토벤의 엄격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특히, 바이올린이 출몰할 때엔 심해에서 홀연히 돌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오르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다. 바이올린 특유의 질감과 디테일 묘사가 뛰어나 듣는 쪽에선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만큼 음악적인 에센스를 잘 포착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신보를 발표한 조니 미첼은, 첨단 스튜디오 음향을 적극 활용하면서 포크 가수로서의 배경을 잊지 않아, 이 부분이 매우 신선하게 들린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더욱 까칠까칠해진 목소리가 얼핏 들으면 언밸런스하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이런 여러 요소들이 잘 조화되어 음악적 감흥으로 승화시키는 부분에서, 엔돌핀이 단순히 해상도만 추구한 차가운 메커니즘의 산물이 아니라, 음악성을 적극 활용한 일종의 예술품임을 깨닫게 한다. 겉보기엔 상당히 이질적인 디자인이라 선뜻 다가서기 힘들지만, 이렇게 모니터링을 하며 즐겁게 감상을 하고 나자 느낌이 달라진다. 참, 사람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패토스는 정열을 뜻한다. 여기에 엔돌핀이라는 단어를 붙였으니, 다소 기계적이고 중립적일 수밖에 없는 CD의 음에 이태리적인 활기를 잔뜩 불어넣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만일 이 제품을 선택한다면 당연히 패토스의 앰프를 걸어 힘차게 오페라를 듣고,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 싶다. 벌써부터 비발디며 베르디, 푸치니, 롯시니가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파가니니도 멀리서 손짓하고 있다. CDP를 선정함에 있어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등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