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1월말에서 2월초까지 뉴욕과 런던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 전에는 CES 관계로 라스베이거스와 LA에 머문 적이 있으므로, 이래저래 한 달 반 정도 외국에서 체류한 셈이 된다. 이 기간에 거의 지구 두 바퀴에 해당하는 여행을 한 것이다. 덕분에 시차라던가 음식 등 곤란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나,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아무튼 뉴욕의 물가는 대단해서, LA의 두 배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가 LA와 비슷한 물가라 치면, 뉴욕이 두 배인 셈이다. 이후 런던에 가보니, 뭘 집던 가격표에 쓰인 앞의 숫자는 동일한데, 뒤의 표시가 달랐다. 달러에서 파운드화로 바뀐 것이다. 다시 말해, 런던이 뉴욕의 두 배쯤 또 비싼 것이다. 참, 세상은 넓지만, 물가 또한 대단하구나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런던에서 여러 여행객들을 만나보니 런던도 한 숨을 내쉴 만큼 비싼 곳이 있다고 했다. 북구와 스위스. 특히 오슬로, 제네바 등은 가격표 보기가 겁날 정도란다.

물론 이렇게 쓰면, 뭐 스위스야 원래 부자 나라고, 개인들의 소득 수준이 높으니까 물가가 비싼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세계 각국의 개인당 GDP 항목을 보니 작년 기준으로 우리가 2만5천불 가까이 하는 데 비해, 스위스는 4만불 정도다. 물가만 따지면 10만불쯤 벌어야 한다는 건데 실제로는 채 두 배가 되지 않는다. 뭐, 이런 식의 단순 비교는 별 의미가 없지만, 아무튼 스위스 사람들도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땅의 반도 안 되는 면적에 그것도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경작지는 10%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겨우 750만 정도의 인구가 첨단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기적에 속한다. 특히, 강자들이 즐비한 하이엔드 오디오계에서 스위스 메이커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FM 어쿠스틱스, 골드문트, 다질, 다빈치, 피에가, 솔루션, 바이스…. 이번에 소개할 오르페우스까지 가히 명문가라 할 만한 메이커들이 즐비하다. 대체 스위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기회가 되면 애호가로서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기도 하다.

오르페우스는 디지털 소스, 그러니까 CDP, CD 트랜스포트, DA 컨버터 등에서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는 브랜드다. 특히, 모체가 되는 애너그램사와 연계해서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스펙을 발표, 이 분야의 선두 주자로 단연 발돋움하고 있다. 최근에는 헤리티지 DAC라고 해서, DAC 단품으로만 4천만원가량 하는 제품을 발표해 기염을 토하고 있는데, 필자가 봐도 현재까지 DAC의 지존이라 불러도 될 만큼 내용이 알차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제품을 손에 넣을 애호가는 많지 않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이런 플래그십 모델에서 쌓은 실적을 보다 대중화시킨 모델에 있다. 다행히 이번에 만난 제품은 그런 오르페우스의 내실을 엿볼 수 있는 가격대여서 여간 흥미롭지 않다. CDT와 DAC 콤비로 2천만원 내외. 이 정도 가격이면 웬만한 단품 CDP와 견줄만한 것으로, 최근 잇달아 발표되고 있는 코드, 볼더, 와디아, 에소테릭 등의 단품 CDP와 비교해봄직도 하고, 별도의 CDT나 DAC를 붙여서 새롭게 구성도 해보고, 아무튼 이래저래 2천만원대 안팎의 디지털 소스 시장이 재미있게 되었다.

오르페우스사가 위치한 스위스의 이베르동-레-방(Yverdon-les-Bains)이라는 도시는 전체적으로 볼 때 프랑스의 영향이 강한 곳이다. 인근에 레만 호수와 뉴사텔 호수가 있어서 가보지 않아도 얼마나 빼어난 경관을 갖고 있는지 얼른 상상이 간다. 가뜩이나 공기가 좋은 곳으로 유명한 데다 알프스와 호수 모두를 아우르는 지역이므로, 이런 곳에서 오디오를 제작한다면 뭘 만들어도 소리가 좋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회사가 유명해진 것은, 일종의 유관 회사라 할 수 있는 애너그램사의 디지털 기술을 대폭 수용한 데에 있다. 물론 현재는 별개의 법인으로 되어 있어서 서로 연관성이 약하고 또 애너그램의 기술을 동사의 독자적인 테크놀로지로 개량하기 때문에 애너그램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다. 이 부분만큼은 정확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처음 오르페우스가 주목을 받은 것은 2002년, 애너그램의 'ATF 192/24 MK2' 기술을 메인 모듈로 사용한 원(ONE)이라는 DAC를 발표하면서다. 특히 미국쪽의 반응이 대단해서 사운드 스테이지라는 잡지가 수여하는 상을 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번에 소개할 것은 그 개량품인 One SE다. 두 모델의 차이에 대해선 잠시 후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DAC로 주목을 받은 오르페우스는 차츰 라인업을 늘렸는데, 제로(0)에서 포(4)에 이르기까지 간략한 숫자로 모델명을 만들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제로 시리즈는 CD 트랜스포트나 CDP 계열이고, 원은 DAC, 투는 프리앰프, 쓰리는 파워 앰프 그리고 포는 인티 앰프다. 또 현재 스피커를 기획중인데, 홈페이지에 가니 사진만 떠 있고, 아직 정식 제품이 발표되지 않은 상태다. 만일 이 부분까지 마무리된다면, 오르페우스는 당당히 종합 오디오 회사로 발돋움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제로 드라이브와 One SE 콤비는 여러 모로 오르페우스의 기본적인 음색, 기술력, 디자인 센스 등이 어우러진, 일종의 핵심 라인업이라 하겠다. 물론 이 둘을 합친 제로 CDP라는 단품 플레이어도 존재하지만(필자는 이 제품에 꽤 관심이 간다), 아무래도 본격적인 분리형이 갖는 포스를 따라갈 수는 없다.

우선 제로 드라이브부터 살펴보자. 외관을 보면 One SE와 같은 새시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께라고 해봤자 4.5cm에 불과해 과연 이런 얇은 패널에 제대로 기판을 넣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갈 정도다. 하지만 정교한 알루미늄 절삭 가공으로 프런트 패널이 갖는 강성이 대단하고 또 무게도 10kg에 달할 정도로 상당하다. 참고로 One SE 역시 10kg이다

여기서 제로 드라이브와 One SE 모두 버튼 배열이라든가 디스플레이부가 동일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디자인에서 일종의 통일성을 추구했는데, 하나만 놓고 보면 다소 빈약하지만 두 개가 함께 놓였을 때엔 묘한 카리스마가 풍긴다. 디스플레이의 발광 부분은 푸른색 도트로 처리했고, 그 밝기를 5단계로 조정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나이트 모드의 경우 아예 암전이 되지만 리모컨이나 패널의 버튼을 조작할 경우 짧게 반짝 빛이 나서 동작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미세한 부분에까지 놓치지 않고 정신을 쓴 것이다.

제로 드라이브는 프런트 패널을 얇게 한 대신 로딩을 윗부분에 처리했다. 그것도 슬라이딩 도어 방식으로 해서, 꽤 묵직한 알루미늄 소재를 동원했다. 이 뚜껑을 뒤로 밀면 역시 단단해 보이는 클램프가 나타나는데, 일종의 자력을 갖고 있어서 CD를 단단하게 압착시킨다. 트랜스포트 메커니즘은 정평 있는 필립스의 프로 2. CD 전용기인 만큼 CD 및 CD-R, CD-RW에만 대응한다.

뒷부분의 출력단은 AES/EBU, BNC, 코액셜, 토스 링크 등 다양해서 케이블의 선택폭이 넓다. 한편 제로 CD 플레이어는 여기에 DAC 보드와 아날로그 출력단 등을 더한 포름인데, 본 세트의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이 제품에 관심을 가질 법도 하다.

이어지는 One SE를 보면, 구체적으로 원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우선 메인 모듈은 애너그램의 'ATF 192/24 MK2'에서 'Quantum V3 Sharc'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다이내믹 레인지가 107에서 109dB로 올라갔을 뿐 아니라, SN비도 117에서 121dB로 향상되었다.

One SE의 가장 큰 특징은 24비트/192kHz로 업샘플링하는 DAC부에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부의 구성도 충실해서, 역시 프리 및 파워 앰프를 만드는 회사다운 노하우가 곳곳에 숨어 있다. 특히 마스터 클록을 DAC와 가장 가까운 부분에 설치해서 지터의 감소라던가 외부 신호의 유입 방지 등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작은 몸체에 구석구석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빽빽하게 기판과 기술력을 투입하고 있는데, 그 점에서 작은 국토지만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스위스다운 기술력이 느껴진다.

이번 콤비를 시청하기 위해 동원한 기기들은 다음과 같다. 스피커는 이소폰의 카사노, 프리 및 파워는 다질 콤비다. 중간에 본 세트의 음질을 비교하기 위해 CDT만 CEC의 TL0X로 교체했다. 그 교체의 효과는 너무나 대단해서 전체 시스템의 표정이 달라질 정도인데, 그런 점에서 이 부분을 집중 소개하기로 하겠다. 참고로 시청에 동원된 CD는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No. 26" 제 1악장. 클라라 하스킬(p), 아르투르 그뤼미오(vl)

-Miles Davis "Four"

-헨델 "울게 하소서" 조수미 노래

-캣 스티븐스 "Wild World" 등

모차르트를 들으면, 오르페우스 콤비는 다소 담백하면서 아큐톤 유닛의 쨍 하는 맛을 잘 살리고 있다. 특히, 고역으로 치달을 때의 바이올린 음색이 절묘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는 인상이다. 58년 녹음에다 리마스터링도 안했는데, 매우 신선하고, 해상도 높은 표현력이 절묘하다. 반면 CEC로 바꿀 경우, 다소 표정이 온화해지고 또 차분해진다. 바이올린의 표정도 착해져서(?), 아큐톤 특유의 맛이 감소하지만 뛰어난 밸런스감으로 보상하고 있다.

마일스의 경우, CEC쪽이 다소 풍윤하고, 정보량이 많아진 듯하다. 잔향이나 여운이 살아, 예전 녹음 방식의 장점이 잘 부각된다. 그러나 오르페우스 특유의 미음이 희석된 느낌이 되어,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린다. 전통적인 재즈 음향을 선호하는 필자에겐 CEC와의 콤비를 추천하고 싶다.

그러나 조수미의 노래를 들으면, 과연 오르페우스 세트의 진가가 발휘되어 매우 인상 깊은 음이 나온다. 특히, 하프시코드는 음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분해되어 화려하게 공간을 장식하는데, 여기에 잔뜩 슬픔을 머문 조수미의 음성과 맞물려 제목 그래도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이런 음 조성을 들으면, 과연 CEC의 모범생다운 모습이 모든 장르에서 어울릴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캣 스티븐스의 노래는 오르페우스에서 다소 어쿠스틱 기타의 음향이 과장되게 들리는데, 대신 목소리에 묘한 정취가 있어서 평소 건조하게만 느꼈던 그의 음성을 재조명하게 한다. CEC로 오면 잔향이 풍부해지고 설득력 있는 재생이 되지만, 목소리의 마력은 사라졌다. 같은 DAC에 서로 성격이 다른 트랜스포트로 AB 테스트하는 것도 참 각별한 맛이 있다.

정리해보면, 오르페우스의 독자적인 음색과 미학을 즐기고자 한다면, 역시 세트로 구입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여기에 성격이 다른 트랜스포트를 하나 더 붙여서 록이나 재즈의 경우 다른 음색으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만일 그럴 경우, 한동안 스피커나 앰프 교환의 충동은 상당히 억제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