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게르기예프가 키로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녹음한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에 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었죠. 그때, '5번도 좋다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최근에 운이 좋아서, 음반점에서 5번을 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번에는 악단이 바뀌어서, 빈 필과 게르기에프가 만났습니다. 9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실황이고 99년에 발매되었으니, 지난번 추천드린 6번 교향곡 녹음보다 오히려 최근의 것입니다.
5번 교향곡은 1888년 5월에 착수돼 그해 11월에 초연되었습니다. 4번 교향곡이 작곡된 시점과 11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간의 시차 중 가장 큰 것입니다. 이 기간중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대신 여러가지 오페라나 1812년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작곡가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차이콥스키의 내면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듯한 갈등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둘러싼 평단의 찬반양론,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대한 번민 등이 그를 괴롭혔답니다.
이 곡을 쓰던 중에 평생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과연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나는 내 자신을 완전히 쏟아내 버린 것일까요? 과연 이것은 종말의 시작일까요? 그렇다면 두려운 일입니다."라는 구절도 나온답니다.
또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내 모두를 드러내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울 정도로 쫓기고 있다"고도 썼다니까, 아마 이 시기의 차이콥스키는 참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악장에서 이런 번민을 모두 날려버리듯 찬란한 승리의 총주를 들려주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흔히들 차이콥스키의 5번교향곡을, 그의 "운명교향곡"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문을 노크하는 듯한 유명한 모티프를 갖고 있듯,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 역시 전 악장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반복적 모티프를 갖고 있지요.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불안한 서주로 시작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낸 영웅의 포효로 끝내는 점은 두 곡의 공통점이라 할 것입니다.
게르기예프가 빚어낸 연주는 이런 점을 아주 분명히 느끼게 해 줍니다. 속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게르기예프는 '이 곡을 이른바 운명교향곡이라 규정짓는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 하며, 나는 그런 언어를 사용해 곡의 성격을 한정짓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곡의 의미는 청중이 나름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미를 부여할 때 진정으로 완성된다는 얘기죠.
그렇다해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 연주가 끝날때는 누구라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칠 수 밖에 없겠다는 느낌입니다.
빈 필의 한 단원은 이 연주를 마친 뒤 "게르기예프와 우리의 만남은 '첫눈에 반한 사랑'같은 것이었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갑니다. 이 곡에는 수많은 명반이 있겠습니다만, 동호인들께서 많이들 갖고 계실 현대의 명연, 마리스 얀손스와 오슬로 필의 연주(샨도스)와 비교해 보자면 이 음반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우선, 얀손스 판보다 게르기예프 판의 템포가 약간 더 느립니다. 각각 10분이 좀 넘는 1,2,4악장은 공히 1분가량, 5분대인 3악장은 30초 가량 게르기예프 판의 연주가 깁니다. 제 취향을 말씀드리자면, 얀손스를 들으면서는 빠르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게르기예프를 듣고 나자 얀손스가 좀 빠르다고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게르기예프의 연주 쪽이 러시아적인 거친 맛과 장중함을 훨씬 잘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인 금관의 활약 역시 게르기예프와 함께 한 빈 필이 오슬로필을 압도합니다.
빈 필의 저 유명한 현악 파트는 여기서도 빛이 나는데, 이를테면 게르기예프 자신의 앞선 히트작, 차이콥스키 5번(키로프 오케스트라)과 가장 차이나는 부분 중 하나가, 빈 필의 현이 훨씬 다양하고 깊은 표정을 음악에 부여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음반의 장점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라이브라는데 있습니다. 게르기예프 자신이 인정하듯 이날의 연주는 지휘자와 악단, 청중의 3자가 완벽한 공감을 이루는 좋은 공연이었다는 점이 마지막 4악장의 코다에서 엿보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에너지를 휘감아 한번에 퍼부어내듯,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표를 눌러찍듯 터져나오는 감동의 총주. 그리고 찰나적으로 호흡이 멎은듯 했다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박수와 함성. 몇년 앞서 같은 필립스 레이블로 발매됐던 6번 연주음반에 비해 녹음이 다소 기대에 못미치기는 하지만, 이런 점때문에 저는 5번에 더 자주 손이 갑니다.
'그래도 녹음이 이거보다 더 좋아야 되는거 아니야?'하면서 한번 더 듣다가도 4악장 총주가 끝나고 나니 별 다섯개를 다 주게 되고 마는 그런 음반입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이현식.
최근에 운이 좋아서, 음반점에서 5번을 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번에는 악단이 바뀌어서, 빈 필과 게르기에프가 만났습니다. 98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실황이고 99년에 발매되었으니, 지난번 추천드린 6번 교향곡 녹음보다 오히려 최근의 것입니다.
5번 교향곡은 1888년 5월에 착수돼 그해 11월에 초연되었습니다. 4번 교향곡이 작곡된 시점과 11년의 차이가 나는데, 이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간의 시차 중 가장 큰 것입니다. 이 기간중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대신 여러가지 오페라나 1812년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의 다른 유명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작곡가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차이콥스키의 내면은 스스로를 갉아먹을 듯한 갈등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둘러싼 평단의 찬반양론,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대한 번민 등이 그를 괴롭혔답니다.
이 곡을 쓰던 중에 평생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과연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나는 내 자신을 완전히 쏟아내 버린 것일까요? 과연 이것은 종말의 시작일까요? 그렇다면 두려운 일입니다."라는 구절도 나온답니다.
또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내 모두를 드러내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울 정도로 쫓기고 있다"고도 썼다니까, 아마 이 시기의 차이콥스키는 참 고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마지막 악장에서 이런 번민을 모두 날려버리듯 찬란한 승리의 총주를 들려주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흔히들 차이콥스키의 5번교향곡을, 그의 "운명교향곡"이라고도 얘기합니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문을 노크하는 듯한 유명한 모티프를 갖고 있듯,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 역시 전 악장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반복적 모티프를 갖고 있지요.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불안한 서주로 시작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낸 영웅의 포효로 끝내는 점은 두 곡의 공통점이라 할 것입니다.
게르기예프가 빚어낸 연주는 이런 점을 아주 분명히 느끼게 해 줍니다. 속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게르기예프는 '이 곡을 이른바 운명교향곡이라 규정짓는 문제는 매우 신중해야 하며, 나는 그런 언어를 사용해 곡의 성격을 한정짓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곡의 의미는 청중이 나름의 것으로 받아들여 의미를 부여할 때 진정으로 완성된다는 얘기죠.
그렇다해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이 연주가 끝날때는 누구라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칠 수 밖에 없겠다는 느낌입니다.
빈 필의 한 단원은 이 연주를 마친 뒤 "게르기예프와 우리의 만남은 '첫눈에 반한 사랑'같은 것이었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이해가 갑니다. 이 곡에는 수많은 명반이 있겠습니다만, 동호인들께서 많이들 갖고 계실 현대의 명연, 마리스 얀손스와 오슬로 필의 연주(샨도스)와 비교해 보자면 이 음반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우선, 얀손스 판보다 게르기예프 판의 템포가 약간 더 느립니다. 각각 10분이 좀 넘는 1,2,4악장은 공히 1분가량, 5분대인 3악장은 30초 가량 게르기예프 판의 연주가 깁니다. 제 취향을 말씀드리자면, 얀손스를 들으면서는 빠르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게르기예프를 듣고 나자 얀손스가 좀 빠르다고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게르기예프의 연주 쪽이 러시아적인 거친 맛과 장중함을 훨씬 잘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의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인 금관의 활약 역시 게르기예프와 함께 한 빈 필이 오슬로필을 압도합니다.
빈 필의 저 유명한 현악 파트는 여기서도 빛이 나는데, 이를테면 게르기예프 자신의 앞선 히트작, 차이콥스키 5번(키로프 오케스트라)과 가장 차이나는 부분 중 하나가, 빈 필의 현이 훨씬 다양하고 깊은 표정을 음악에 부여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음반의 장점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라이브라는데 있습니다. 게르기예프 자신이 인정하듯 이날의 연주는 지휘자와 악단, 청중의 3자가 완벽한 공감을 이루는 좋은 공연이었다는 점이 마지막 4악장의 코다에서 엿보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에너지를 휘감아 한번에 퍼부어내듯,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표를 눌러찍듯 터져나오는 감동의 총주. 그리고 찰나적으로 호흡이 멎은듯 했다가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나오는 박수와 함성. 몇년 앞서 같은 필립스 레이블로 발매됐던 6번 연주음반에 비해 녹음이 다소 기대에 못미치기는 하지만, 이런 점때문에 저는 5번에 더 자주 손이 갑니다.
'그래도 녹음이 이거보다 더 좋아야 되는거 아니야?'하면서 한번 더 듣다가도 4악장 총주가 끝나고 나니 별 다섯개를 다 주게 되고 마는 그런 음반입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