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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케스트라의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정체성과 인지도를 과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년 음악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빈 필하모닉을 꼽을 수 있는데, 매년 1월 1일에 펼쳐지는 왈츠의 향기가 가득한 그들의 신년 음악회는 전세계의 TV로 방송되어 한 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음악을 통해 이렇듯 신년을 알리는 지표 역할을 하는 연주회는 사실상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만이 아니다. 이웃 나라 독일에서는 매년 12월 31일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송년 음악회(New Year’s Eve Concert)를 통해 한 해가 저물었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새로 부임한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함께 레하르의 오페레타 음악으로 송년 음악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어 새해를 기념하는 중요한 이벤트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송년 음악회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갖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카라얀 시대에 정착한 이 연주회는 카라얀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를 갈라 형식으로 연주하거나 촉망받는 연주자와 함께 협주곡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졌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진행했던 송년 음악회는 그 축제적인 성격 때문인지 음반보다는 영상물(SONY)로 남겨져 있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느 카라얀 연주회처럼 근엄하고 치열하며 영웅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클라우디오 아바도 시대로 접어들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송년 음악회는 주로 독일 출신의 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아카데믹한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일별해 보자면 베토벤(1991년), R.슈트라우스(1992년), 바그너(1993년), 슈만(1994년), 멘델스죤(1995년)이 바로 그것이다.

 

아바도의 진지한 접근은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들뜬 분위기보다는 성찰의 의미가 더 컸는데, 이후 그는 다시금 솔리스트를 내세운 갈라 형식의 프로그램을 선보이다가 2000년에 베르디 프로그램으로 마지막을 맞이했다. 2001년에는 잠시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봉을 잡아 무곡 중심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했고 2002년부터는 새로운 상임 지휘자로 추대된 사이먼 래틀이 등장했다. 래틀의 송년음악회 프로그램은 다시금 전형적인 갈라 형식으로 회귀했다. 그러나 레퍼토리에 있어서 이전 지휘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았던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여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첫 송년 음악회에서 쿠르트 바일, 번스타인, 거쉰의 음악을 다룬 것을 비롯하여 오르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코플랜드, 바버, 존 아담스와 같은 영미권 작곡가와 러시아 작곡가들이 그 뒤를 이었다.

새로운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 래틀의 송년 음악회 가운데 음악적으로나 내용면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할 만한 연주회를 꼽는다면 아마도 이번에 Euroarts를 통해 영상물로 발매된 2011년 12월 31일 공연일 것이다. 대부분 무곡을 위주로 구성된 이번 프로그램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으로서, 예프게니 키신과 함께 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가 너무나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키신은 지금까지 이 작품을 기록으로 남긴 적이 없었던만큼 더욱 궁금증을 중폭시켰는데, 첫 악장부터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엄청난 집중력으로 청중을 압도시켜나간다. 1악장이 끝난 뒤 터져나오는 박수소리가 이 연주가 얼마나 감동적인가를 반증해 주기도 한다. 한층 성숙해진 키신의 손끝에서는 더욱 밀도 높은 터치가 묻어나오며 완벽한 템포와 밸런싱, 치밀하게 설계된 다이내믹과 클라이맥스의 과정을 토대로 작품을 한층 진지하고 엄격하게 이끌어나가는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다.

 

느린 악장에서의 그 차분하면서도 상상력 풍부한 느낌도 훌륭하거니와, 3악장에서는 정련된 테크닉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며 리듬과 분절, 옥타브의 향연이 아름답고 극적으로 펼쳐진다. 침머만-카라얀(DG)의 시적이고 탐미적인 연주의 대척점에 서 있는 거장적이고 맹렬한 해석으로서 디지털 시대 최고의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으로 손꼽을 만하다.

 

이 피아노 협주곡의 중심을 이루는 노르웨이 무곡 리듬과 밸런스를 맞추어 앞뒤로는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과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들이 배치되어 있고, 더불어 라벨의 ‘알보라다 델 그라치오소’와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가운데 ‘일곱 베일의 춤’이 등장한다. 래틀의 음악적 역량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로서 디테일과 리듬의 액센트를 한껏 강조하면서도 베를린 필 목관수석 연주자들의 감정이 잘 드러나는 신선한 해석이 듣는 내내 새롭게 느껴진다.

 

후반부 프로그램의 핵심인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악마의 춤-자장가-피날레)은 아바도-루체른 페스티벌 영상물처럼 전곡이 아닌 발췌이지만 베를린 필-래틀 파트너쉽에 아직도 음악적 가능성이 남아있음을 보여준 훌륭한 연주다. 베를린 필 단원들의 탁월한 기량이 온전히 발휘되면서 모든 부분이 살아숨쉬는 듯 꿈틀대는 이 연주만큼 시각적인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연주는 찾기 힘들 것이다. 최근 래틀은 2018년까지만 상임을 맡겠다고 발표했는데, 남아있는 기간 동안 베를린 필과 더 특징적이고 역사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베를린 송년 음악회로서의 색다른 음악적 완성도와 이벤트로서의 흥미진진함 모두를 오랜만에 충족시킨 영상물로서, 최근 베를린 필하모닉의 현주소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서 추천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한 가지 래틀의 베를린 필 송년음악회에서 아쉬운 점은 바로 공연장에서의 조명이다. 연주회의 이벤트적인 성격 때문에 붉은 조명과 푸른 조명을 섞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자 했는데, 연주회장에서는 혼합된 독특한 색감이 시선을 끌지 몰라도 부분을 근접촬영하는 영상물에서는 이 보색의 대비가 시각적으로 집중하기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을 받으며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연주자들의 피부색은 화면 칼리브레이션으로는 도저히 조절할 수 없는만큼 어느 정도의 감상자의 적응과 인내를 요한다. HD급 화질은 지금까지 발표된 베를린 필 영상물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서, 무엇보다도 선명하고 다양한 검은색들이 시각적인 다채로움을 제공해 주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