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샤 하이페츠: 신의 피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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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arts ADVD-037

야샤 하이페츠가 이루어낸 저 전무후무한 승리는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모든 방향에 있어서 극대화한 연주가로서,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하이페츠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과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한 템포 조절은 물론이려니와 한 음 한 음에 부여하는 고도의 긴장감과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통해, 그는 바이올린 연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인 부분부터 바꾸어놓은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더 나아가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엄청난 레코딩, 독주와 협주, 실내악, 교육을 오가는 왕성한 음악 활동을 통해, 이전에는 그 누구도 누리지 못했던 바이올린계의 존경받는 제왕으로서의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말할 수 있는 꼿꼿이 세운 활과 바이올린, 감정에 동요됨 없는 무뚝뚝한 연주 모습으로 대변되는 아우어식 러시아 연주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차가운 듯한 냉정한 음색은 바흐나 모차르트와 같은 몇몇 작품들의 연주에서는 많은 질타를 받기도 했다. D와 A현에서 거트현을 사용하며 집중력 높은 톤과 정교한 왼손 비브라토를 사용하며 놀라운 뉘앙스를 만들어낸 하이페츠는, 당대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 바 있듯이 단순히 차가운 음색만을 냈던 테크니션이 결코 아니라 오크향이 가득한 황금빛 사운드를 발산했던 진정한 음악가였다.

피터 로젠이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한글자막)는 하이페츠가 태어났을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일생을 다룬 것으로서 피터 로젠 감독은 풍부한 영상 자료와 상세한 전기적 스토리를 토대로 한 예술가를 거의 완벽하게 훑어낸다. 그의 생을 따라 다큐멘터리는 다음과 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신의 피들러 - 레오폴드 아우어 – 아메리카 – 세계 여행 – 캘리포니아 – 편곡자 – 애국자 – 교사 – 친구들 – 가족 – 바다와 고독 – 끝. 이러한 순서로 러시아에서의 생활부터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의 어린 시절, 20대의 방황과 미국에서의 성공, 그의 스승인 아우어와의 관계, 연주가로서의 활동 외에 편곡자 및 만년의 교사로서의 활동, 친구들과 가족의 이야기 등등, 공식적인 연주회 영상과 그가 개인적으로 촬영한 프라이비트 필름 등을 토대로 그의 음악적 업적과 개인적인 삶 모두를 상세하게 조명한다.

하이페츠는 1901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는 작은 유태인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이미 세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다섯 살에는 왕립 음악원에서 아우어의 제자였던 일리아 다비도비치 말킨에게 사사했다. 1년 후에는 멘델스죤의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그는 여덟 살 무렵에 학교를 졸업했다.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모습을 본 아우어는 곧바로 그를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학교로 데려가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11년 오데사와 페테르스부르크, 베를린 등지에서 공개 연주회를 갖게된 하이페츠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전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은 분더킨트로 발돋음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당시 귀여운 소년이었던 하이페츠의 사진과 영상들이 흥미로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10대 이전에 ‘하이페츠’로 완성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가르침을 받았던 샤샤 라세르손은, 전성기 시절의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어린 시절의 연주와 똑같다며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하이페츠의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니키쉬의 도움으로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너무도 일찍 개화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하이페츠는 1차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하이페츠는 1917년 러시아를 떠나 10월 27일 뉴욕에서 경이로운 연주회라는 찬사를 받으며 이 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카네기 홀에서 하이페츠의 연주를 들은 미샤 엘만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여기, 너무 덥지 않은가?” 고도프스키는 이렇게 응수했다.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걸세.” 이에 대한 당시의 증언들과 자료들이 이 다큐멘터리 곳곳에 등장하며 역사적인 정확성과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또한 20대 초반 연습을 게을리하여 평론가로부터 악평을 받은 뒤 본격적으로 음악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움을 안겨준다.

1950년대부터 60년대는 그의 창조력과 지구력이 원숙함을 더하여 최고조에 도달했을 시기로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명반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케 하고 음악 애호가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기준인 양 그를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중과 작품, 그리고 작곡가들에게 겸허함을 바치고자 노력했다. 단 한 가지 그가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완벽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혹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잣대를 쉼 없이 들이댔던 것이다.

청중들 앞에서만큼은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이페츠. 오른쪽 어깨를 수술한 후유증으로 이전처럼 활을 높이 들 수 없었던 탓에 1972년 은퇴를 했고,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과 자신의 집에서 평생을 함께 한 동료인 피아티고르스키와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엄격한 규율로 인해 남다른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친구인 피아티고르스키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외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그리고 늘 엄격하게 대했던 제자들에게 파티를 열어주며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것, 괴팍한 성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대화를 중요시 했던 것 같은 장면에서는 인간으로서의 하이페츠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평생토록 자신을 채찍질해온 한 위대한 연주가에게 비로소 안식을 주려는 듯한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긴장감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는지, 1987년 12월 10일 그는 태평양이 펼쳐진 그의 집에서 그 큰 눈을 굳게 닫아버렸다. 음악만큼이나 엄격했던 삶을 살았던 하이페츠의 이 다큐멘터리는 한 연주자의 음악세계와 현실세계 모두를 정확하고 드라마틱하며 감동적인 방식으로 담아낸, 음악 애호가들이 반드시 경험해야할 역사적인 기록물이다.

박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