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오디오 관련으로 중장년층 애호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대부분 청년기에 음악다방이나 카페의 경험을 갖고 있는 데에 놀라게 된다. 여태껏 서로 다른 인생 역정을 헤쳐와 전혀 별개의 직업과 취향을 갖고 있지만 청년기의 모습은 흡사 무슨 동창회 모임을 보는 것처럼 유사하다. 아마 60~70년대의 빈곤한 상황에서 서구의 음악 문화를 달리 접할 길도 없고 개인이 오디오 컴포넌트를 소유한다는 발상도 말이 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이런 현상은 일본에서도 비슷해서 특히 신주쿠나 시부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록, 클래식, 재즈 등의 카페들이 즐비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시부야의 한 클래식 카페는 연혁이 60년이나 될 만큼 오래되고 요코하마의 한 재즈 카페는 2차대전 이전에 오픈해서 90년대 말까지 영업한 경력이 있다. 이런 모습이 희한했는지 미국판 뉴스위크에서 그 재즈 카페가 다뤄지기도 했다.

꼭 그렇게 보지는 않아도 70~80년대에 오픈한 많은 카페들이 여전히 성업 중인 것을 보면 참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까 싶다. 어느 카페는 잡담 금지에 핸드폰 주의의 조항을 내걸었는데 이쯤 되면 절간에 가까운 음악 감상실이라 해도 좋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비슷한 길을 걸어온 우리나라가 이런 문화를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간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나머지 개개인이 오디오를 소유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러 굳이 카페나 감상실을 갈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디오로만 치면 감히 일본 앞에서 누가 폼 잡을 수 있을까? 또 아무리 좋은 오디오를 갖고 있다고 해도 혼자 듣는 재미와 여럿이 듣는 재미가 다르고 집과는 달리 큰 볼륨으로 쾅쾅 틀어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래저래 예전의 감상실 문화가 그리워진다.

사실 과거 대학로라는 곳은 굳이 '학림 다방' 과 같은 예를 들지 않아도 문화와 예술과 지성이 넘쳐나던 곳이었다. 거기엔 늘 카페가 있었고 진한 커피 향이 있었으며 클래식은 어김없는 OST 였다. 스크래치가 잔뜩 난 LP 소리지만 여기서 흘러나오는 하이페츠의 바이올린이나 굴드의 피아노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고상한 테마와 화제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요즘의 대학로를 가보면 어찌된 일인지 서점 보기가 힘들고 레코드숍은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으며 보이는 것이라곤 술집과 옷가게들뿐이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약간의 로맨스와 여유는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곳 1812에 오면 가뭄에 단비라도 만나듯 이 모든 아쉬움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1층과 2층에 각각 카페가 있는 듯해서 헷갈리고 또 모두 타셴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타셴에 대해 알아보자.

이 출판사는 이른바 '키치' 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저속한 문화로 다뤄지지만 그 안에 예술적인 에너지와 영감을 갖고 있는 부분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서 일반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를테면 과거의 코믹 북을 리프린트하거나 에로틱 사진의 역사를 정리한다거나 퀴어 아트를 다룬다는 식이다.

그럼 과연 GOAT가 누구일까? 놀랍게도 그 주인공이 무하마드 알리다. 알리의 경기 장면과 일상생활을 다룬 포토집인데 이런 가격표를 붙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서적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헬무트 뉴튼이나 다빈치 재즈와 같은 수 백만원짜리 책은 약소하게 보이기도 한다. 물론 필자는 윌리엄 클랙스턴이라는 사진 작가의 작품집 Jazz를 강력하게 원하지만 말이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1812와 타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여기엔 현재 마로니에북스의 대표로 있으면서 이번에 소개할 1812의 오너이기도 한 이상만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어찌 보면 한 음악 애호가의 평생에 걸쳐 모은 음반과 오디오와 꿈이 타셴과 1812로 수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원래 이 대표는 출판 쪽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곧장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베스트셀러와 관계하게 된다. 그 경력을 밑천으로 1990년에 독립해서 '정보문화사' 를 설립 주로 컴퓨터 관련 서적들을 발간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 컴퓨터가 급속하게 보급되던 때라 시의 적절한 기획이 적중한 것이다.

참고로 1812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잠깐 짚어보자. 클래식 애호가라면 아, 차이코프스키 얼른 답이 나올 것이다. 맞다 이 곡은 1812년의 보로디노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나폴레옹 대군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에 착안해 차이코프스키가 오케스트라 곡으로 작곡한 것이다. 바로 이 이름을 차용한 것은 아무래도 '클래식의 대중화' 라는 큰 모토가 있고 누구나 한번 들으면 알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1812에 오면 꼭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타셴의 출판물들을 비치해놔서 언제나 열람할 수 있게 해놨다. 사실 아트 북 자체가 고가인데다가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서비스는 대단한 결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손님의 손을 타면 떼가 탈 수밖에 없고 결국 판매는 불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타셴과 와인과 클래식 이런 완벽한 3박자는 전세계에서 이곳만 가능하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인 오디오 시스템을 살펴보자. 우선 한쪽 벽을 완벽하게 차지하고 있는 5,000여장의 LP를 배경으로 두 대의 스피커가 눈에 띈다. 하나는 알텍 A5이고 또 하나는 다인오디오의 컨피던스 C4다.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명기들이 나란히 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앰프를 보면 매킨토시인데 대부분의 카페들이 고물에 가까운 중고들을 가져와 오로지 진열을 위한 목적으로 매킨토시를 구매하는데 반해 여기는 완전 신품이다. 최신 모델인 C46 프리앰프와 MC501 파워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신품 매킨토시를 비치한 곳이 여기가 처음이다.

또 현재 플레이중인 음반은 카메라로 촬영해서 벽에 걸린 LCD TV의 화면에 나오게 해서 언제든 곡명과 연주자를 알 수 있게 해놨다. 가끔 천장에 설치된 소니의 프로젝터로 영상물도 보여준다고 하니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도 재미를 들일 수 있게끔 배려해놨다.

최근에 가끔 음악을 테마로 한 감상실이 문을 열었다 사라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우연히 방문해보면 너무 빈티지 일색에 고색창연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서 과거의 한 시절을 추억하는 데엔 괜찮지만 젊은 층을 끌어들이기엔 위화감이 많았다.

그러나 1812의 경우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에 신구의 장점을 적절히 혼합해서 어느 연령층이 오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한 부분이 큰 장점이다. 주말에 시간이 있으면 부부 동반으로 방문해도 좋고 아니면 퇴근길에 혼자 와인 한 잔 마시면서 음악에 빠져도 좋다. 데이트 공간으로는 두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개인적으로 앞으로 이런 공간이 더 많이 생겼으면 한다. 엄청난 경쟁과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우리의 일상에서 좀 쉬어갈 만한 공간이 몇 개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이 클래식을 들으며 진한 커피를 마시고 아트 북을 뒤적거리는 여유를 갖고자 한다면 이만한 공간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