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대구오페라축제]라 트라비아타-2014.10.16(목)
역시 오페라는 베르디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 우리의 고전 음악이 없다. 즉, 컨템퍼러리(contemporary) 고전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를 팝과 재즈에 내어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100년도 더 된 이런 음악에 여전히 열광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현대적인 음악의 세련미와 추상성을 내치기도 어렵지만 역시 인간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는 전통적인 음악 언어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바로크 오페라의 붐을 지나고 모차르트 등 독일 오페라를 넘어서 근대 오페라의 장을 활짝 열어 젓힌 사람이 베르디인 것이다. 그는 근대 이탈리아 오페라 신에서만 보자면 그의 선배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등의 이른바 벨칸토 오페라의 적자를 넘어서 당시 오페라의 스타였던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아마도 일반시민들에게나 음악 애호가들에게나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익숙한 오페라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오페라가 처음 상연된 것도 1948년, 이 라트라비아타였다. 내가 오페라에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던 7~8년전에 구해서 들었던 오페라 DVD도 바로 빌리 데커가 연출하고 비야손과 네트렙코가 열연한 2005년 잘츠부르크의 라 트라비아타였다. 그리고 성악 콘서트의 마지막은 흔히 1막의 ‘축배의 노래’로 끝맺어 연주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라 트라비아타란 길 가에 있는 여자란 뜻이다. 좀더 의역을 하자면 길을 잘못 들어선 여자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19세기 중반의 고급 창녀(코르티잔)을 의미하는 말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수많은 사생아 중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뒤마피스의 ‘카멜리아 레이디’, 즉 동백꽃 여인이란 소설을 근간으로 피아베가 대본을 쓰고 베르디가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노이마이어의 발레로도 유명하고 이 발레는 당시 마르시아 하이데라는 무용수를 위하여 만들어 졌으며 그녀의 뒤를 잇고 있는 이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강수진이다. 배경음악은 모두 쇼팽의 음악들로 채워져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1,2번, 피아노소나타 3번, 월츠, 에코세즈, 프렐류드 5번, 환상곡 등을 아름다운 발레와 함께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의 30개에 육박하는 오페라 중에서 중반기에 위치해 있는 작품이어서 그의 작품을 분류할 때, 이 작품과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를 중기 삼대 걸작으로 놓고 그 전과 후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1853년에 베니스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초연하였을 때는 폐병으로 죽어가는 비올레타가 너무 비대하고 건강해 보였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실패를 하였다. 전혀 이유가 안 되는 것도 아닌 것이 비올레타나 미미의 경우, 너무 건강해 보여서는 극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라 트라비아타는 베르디 오페라에서는 유일하게 프리 마돈나 오페라인데, 이런 류의 오페라는 여주인공에게 시선과 관심이 많이 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나 보다.
항상 그랬듯이 공연 전에 미리 예습을 하였다. 내게는 4개의 라 트라비아타 영상물이 있다.
1994년 코번트 가든/ 솔티/ 안젤라 게오르규, 프랭크 로파도, 레오 누치 (리처드 에어)와 2004년 라 페니체/로린 마젤/ 파트리차 초피, 로베르토 사카, 흐보로스토프스키(로버트 카슨)과 2011년 엑상 플로방스/ 나탈리 드세이와 위에서 언급한 2005년 잘츠부르크/ 리찌/ 네트렙코, 비야손, 토마스 햄프슨(빌리 데커)이 그것이다.
로버트 카슨이 연출한 라 페니체를 최고로 치는 분도 있으나, 비올레타가 너무 천박한 코르티잔으로 보이고 노래도 다소 바그너식 비장감을 앞세우고 있어서 내개는 안젤라 게오르규의 로얄 오페라 코번트 가든판이 더 다가온다. 드세이는 ‘연대의 딸’이나 ‘호프만의 이야기’에서의 코믹한 연기의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해서 아쉬웠던 반면 네트렙코는 빌리 데커의 파격적인 연출과 간결한 무대로 인해서 오페라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일본을 강타한 태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며칠전 내가 속해 있는 음악 모임에서 ‘장미의 기사’를 감상하였다. 마침 내가 강사로 선정되어 자료와 영상물을 준비하여 음악 동호인 여러분들과 뜨거운 오페라의 저녁을 보내었다.
이런 저런 계기로 이번 달은 오페라에 젖어서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다시 추운 기온을 녹이는 열기가 넘쳐 흐르는 대구 오페라하우스의 불이 밝았다.
서곡이 연주되면서 막이 오르고 비올레타가 혼자 무대 위에서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생활을 보여주듯이 이리저리 서성인다. 이내 무도회 장면이 펼쳐지는데 분위기도 다소 어색하고 비올레타의 소리도 오케스트라에 묻히는 순간이 많다. 덜컥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레제로(leggiero)에 가까운 그녀의 소리는 섬세했고 고음에서는 스핀토(spinto)적인 성향까지는 아니더라도 리릭(lyric)을 넘어서는 강렬함도 얼핏 보여준다.
조금 전에 말했듯이 이 오페라는 프리 마돈나의 오페라이다. 비올레타에 의해서 오페라의 성패가 가려지고, 심지어 비올레타를 보기위해서 극장을 찾기도 하는 오페라이다. 그런 면에서 비올레타를 맡은 라나 코스(Lana Kos)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 저음의 발성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영웅적 카리스마가 필요한 배역은 아니고 그래서는 되지도 않는 역할이지만 소리가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연기도 신랄하게 말하자면 다소 데면데면하게 한다는 감을 떨치지 못한다. 아마 그녀의 성격이 좀 더 적극적 연기를 할 만치 외향적이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고 대구의 쌀쌀한 날씨가 그녀를 움츠리게 했을 수도 있다.
보다 극적인 연기 또는 연출이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무도회 장면의 흥겹고 흐드러지는 모습에서의 경직된 모습, 2막 처음 부분의 행복한 교외 생활이 보다 즐겁게 연출되어야 했음에도 비올레타의 표정은 무겁고 괴로운 모습으로 일관하였으며 순간순간 극적인 변곡점을 보다 표현력 있게 강조하거나 절절하게 구현하지 못하는 면은 오페라 전체의 굴곡 또는 리듬감을 살리지 못했던 것같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소리와 연기는 오히려 3막의 죽음 장면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특히 편지의 장면 이후 죽음에 이르는 신은 매우 밀도 높은 가창과 연기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역시 마지막에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가수였다. 편지의 장면은 떨리는 바이올린 독주가 연주되는 가운데 노래가 아닌 낭독으로 분위기를 살려야 하는데 효과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이어지는 ‘지난 날이여, 안녕’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오늘 라트라비아타 공연의 주인공은 지휘를 한 마에스트로 피에르 조르조 모란디였다고 생각한다. 오케스트라의 준동(?)을 매우 잘 콘트롤하고 있다는 느낌인데, 대부분의 가창 반주에서는 절제된 연주로 가수들의 노래를 살려주고 있었고, 그로 인해서 튜티 부분의 강력함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알프레도는 무난했고 제르몽의 ‘프로벤자, 네 고향으로’는 압권이다.
안니나의 영혼없는 연기는 너무나 아쉽고, 기타 단역들의 엉성한 연기가 너무 슬프다. 단역이지만 좀 더 당당하게 노래하고 연기해야만 했다. 파치니와 트로이시의 무대는 평범했다.
오늘의 공연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다. 해외 유명 오페라단이 반드시 훌륭한 공연을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과 아울러 앞서 투란도트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우리도 저 정도의 공연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페라를 준비하고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거기에 따른 중압감이 얼마나 큰 지 잘 알고 있다. 멀리 이탈리아 살레르노에서 우리를 찾아준 이들에게 아낌없는 마음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 대구 오페라축제도 2편밖에 남지 않았다. 아니 2편이나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깊어 가는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축배의 노래’보다는 ‘프로벤자, 네 고향으로’를 흥얼거리며 취한 듯 어지러운 흰머리를 쓸어 올리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