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렐의 멋진 진화, 에볼루션 202프리, 402파워
몇 해 전 필자가 크렐의 앰프를 한번 써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때 L님이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다. 그는 원래부터 아름다운 디자인을
선호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오디오 철학은 확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악을 듣는 행위는 단순히 귀에만 한정된 것만이 아니다. 따라서
소리를 귀에 와 닿는 부분이라고 한다면, 디자인은 눈에, 그리고 인터페이스는 손과 몸에 닿는 것. 결코 어느 한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투박한 크렐의 앰프들은 ‘결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오디오 철학에 반박할 만한 명분은 별로 없다. 소리를 내건
내지 않건 간에 우리는 늘 집안에 기기들을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니, 볼 때마다 디자인이 마음에 걸려서 찜찜하다면 아무리 좋은 소리를
내는 오디오 기기라도 오래도록 함께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소리는 기기간의 매칭이나 액세서리에 따라 많은 변수가 있지만, 디자인은
아무래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그의 오디오 철학을 강화한다.
하지만 필자는 크렐 앰프들의 잘생기지 못한 생김새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임피던스 부하의 구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형 트랜스와 전원부를 탑재하다 보니 앰프는 볼품없이 커졌고, 고강성의 새시로 마감하다보니 짜증이 날 만큼 무거워졌을 것이다. 창사 때부터 유지되어 온 순A급 증폭 방식은 많은 열이 발생하게 했고, 아주 초기 제품을 제외하고는 팬의 소음을 우려하여 자연 냉각식만 고집한 결과로 앰프의 크기가 더욱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열핀의 색깔은 효율을 고려하여 검정색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잘 맞는 색깔은 칙칙한 회색밖엔 없었을 것이다. 대전력 앰프이다 보니 다른 경쟁사의 앰프들처럼 전원 인입선에 퓨즈를 쓰지 못하고, 낡은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연상시키는 투박한 서킷 브레이커를 장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음색과 성능만으로 자신의 앰프의 가치를 평가받겠다는 디아고스티노씨의 타협할 줄 모르는 고집의 결과였을 것이었다.
디아고스티노씨의 고집은 유명하다. 그가 만든 제품 중 레퍼런스 기기들을 보면 과연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집에서 사용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예컨대 십여 년 전 그들의 레퍼런스 파워 앰프 KAS를 보면 전원부와 증폭부가 분리된 네 덩어리로 출력석 60개와 그 개수에 맞춘 60개의 레귤레이터. 1옴시 무려 3000와트. 그것도 A급 증폭…. 살펴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얼마든지 더 있었다. 하지만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전원부와 증폭부 사이를 케이블이 아닌, 용접기에나 사용될 만한 션트 저항 수준의 동 바(copper bar)로 연결한 것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연결 방식을 보면서 디아고스티노는 천성적인 매니아로 소리만 좋아진다면 어떤 일이든 시도할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만을 부리지는 않았다. 언제나 더 나은 제품을 위해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그의 앰프에 도입된 변화는 기존 A급 증폭 회로의 변형이었다. 순A급 증폭은 음색은 좋을지 몰라도, 늘 바이어스 전류가 흐르기 때문에 열이 많고 심지어 음악을 듣지 않을 때에도 전력 소모가 크다는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출력에 비해 몹시 큰 몸체와 방열판, 강력한 전원부가 필요하게 된다. 우선 크렐은 KSA 시리즈에서 바이어스를 단계별로 조절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도입했다. 즉 아이들링 상태에서는 바이어스를 1단계로 조금만 설정하고 볼륨이 점점 커지면 2, 3단계의 상위 단계로 순간적으로 변환되는 방식이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음악신호를 제때 검지하고 신속하게 바이어스 값을 바꾸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물론 말로 설명하는 것은 아주 쉽다. 음악신호가 입력단자를 통과하여 출력 TR에 닿기 전에 그 음악신호의 크기를 파악하고 출력 TR에 걸린 바이어스를 적합한 값으로 바꾸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 크렐은 마이크로프로세서까지 도입하여 독창적인 가변 바이어스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기술의 덕택으로 그들의 앰프는 다른 메이커의 A급 앰프들과 분명히 차별화되며, 그들의 앰프를 일컬을 때 ‘무지막지한’이라는 수식어를 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후 크렐의 파워 앰프는 크기에 비하면 오히려 높은 출력을 갖는 고효율 A급 앰프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한편 크렐의 파워 앰프 내부가 다른 메이커의 제품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많은 부품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대부분 이러한 가변 바이어스 회로 때문이다.
A급 증폭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낸 후, 디아고스티노씨는 기기간의 신호 전송방법에 주목한다. 일반적인 전송 방식에서 음악 신호는 전압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압이라는 것은 저항이 0인 이상적인 도체를 통과하지 않는 경우라면 반드시 ‘전압강하’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즉 케이블의 특성에 의해 신호를 받는 기기에서 분명히 왜곡되게 되는 것이다. 디아고스티노씨는 정밀 계측기에서나 사용되던 신호 전송 방식 - 전류 전송을 오디오 앰프에 최초로 도입한다. 케이블의 저항값이 아무리 크더라도 도체를 흐르는 전류는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고 일정한 성질을 이용한 것. 그는 이 방법에 ‘CAST 전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론적으로 CAST 전송은 케이블을 종류나 양부와 상관없이 동일한 전송을 하게 된다. 한편 크렐은 신호 전송 뿐 아니라 증폭의 영역에서도 전류 증폭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에서 볼 때 크렐 앰프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크렐은 그 후, 칙칙한 회색과 검정색 일변도의 외관에도 손을 대게 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알루미늄 새시가 등장하였으며, 앰프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표면 실장 기술과 같은 최신 기술도 적극 도입하게 된다. 제품 라인도 다양해져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대에서 슬림한 모양의 인티 앰프와 CDP도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전통적인 크렐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이 변화는 좋은 인상만을 주지는 못한 듯하다. 크렐의 변화는 소비자와의 거래를 위한 타협이라는 인상이었으며, 소리 또한 예전 제품들에 비해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다.
잠깐의 침묵. 하지만 늘 개선과 변화를 추구하는 크렐답게 한바탕 진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Evolution’ 시리즈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시된 것이다. 시리즈 중 가장 먼저 출시된 것은 Evolution One과 Two. One은 전원부가 독립된 모노럴 파워 앰프로 네 개의 새시로 이루어진 거함이다. 출력은 8옴 기준 450W. 물론 크렐이 자랑하는 가변 바이어스 방식 A급 증폭. 그런데 스펙이나 성능을 보면 예전 KAS처럼 일종의 광기와 집착이 느껴지는데, 생긴 것은 오히려 말끔하고 단정한 것이 능청스럽다. 필자를 경악하게 했던 동 연결 바는 보이지 않도록 기둥에 말끔하게 숨겨져 있다. Evolution Two 역시 좌우 증폭부와 좌우 전원부가 네 덩어리로 각각 독립된 과격한 모노럴 프리앰프. 이번에도 ‘역시 크렐!’이라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크렐을 살펴보면 우선 가변 바이어스의 단계가 예전 다섯 단계에서 열 두 단계로 세분화된 것이 눈에 띈다. 따라서 전력의 낭비가
크게 줄었다. 전력 소모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전기세를 적게 내는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열이 적게 나므로 방열판의 크기가 작아질
뿐 아니라, 강력한 전원부는 낭비 없이 구동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고스란히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눈에 띄는 변화는 증폭회로에서 네거티브 피드백의 최소화이다. 네거티브 피드백은 근원적으로 회로나 구성 부품들의 부족함이 결과에 나타나는
것을 입력에서 빼줌으로써 출력을 보정하는 기술이다. 즉 앰프의 설계에서 네거티브 피드백을 적절히 사용하면, 회로 구성이 단순해지며, 부품의
편차가 다소 있더라도 비교적 쉽게 고품질의 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앰프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네거티브 피드백의 달콤한 유혹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네거티브 피드백을 많이 걸어 주면 소리의 순도가 저하된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화장기가 느껴진다고도 하고, 고역특성이
저하되어 거칠어지거나 소리가 멍청해진다고도 한다. 필자도 오래 전 재미삼아 진공관 앰프를 만들 때 네거티브 피드백을 과하게 걸어보았을 때,
지나치게 부드럽고 흐릿한 음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네거티브 피드백을 전혀 걸지 않고 회로 구성을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회로 자체 뿐 아니라 회로를 구성하는 부품들의 시정수에 따라 음질이 민감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메이커의 제품 중에서도 네거티브
피드백을 두드러지게 제거한 예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디아고스티노씨는 자신의 앰프에서 출력단에서 입력단으로 피드백되는 글로벌 네거티브 피드백은 전혀 쓰지 않았으며 개개의 증폭단에만 아주 조금의
로컬 피드백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양은 기존 메이커의 수십, 수백분의 일 수준이라고 자랑한다. 덕분에 가뜩이나 복잡했던 그의 앰프는 훨씬
더 복잡한 회로 구성을 갖게 되었다. 도저히 한 채널 혹은 두 채널 분량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많은 부품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은 앰프의
내부를 보면 그가 그렇게 자랑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오늘 리뷰하는 프리앰프 Evolution 202와 같은 시리즈의 파워 앰프 402는 Evolution One/Two의 개발 구현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몸체에 담은 기기이다. 202는 전원부와 증폭부를 분리한 두 몸체 구성의 프리앰프. 프리앰프는 네거티브 피드백을 억제한 전류 증폭 방식, 순A급이며 풀밸런스 구성이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앰프처럼 좌우 채널이 앰프 내부에서 좌우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상하로 배치되어 있는 점. 증폭단에 일체의 IC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얼핏 눈에 보이는 TR만도 한 채널당 200~300개는 족히 될 듯싶다. 입력은 밸런스 2계통, 언밸런스 4계통, CAST 2계통 그리고 출력은 언밸런스와 밸런스 한 조씩, 그리고 CAST 두 조와 언밸런스 테이프 출력이 장착되어 있다. 이 프리앰프와 짝을 이루는 402는 한 몸체의 스테레오 파워 앰프 역시 네거티브 피드백을 철저하게 억제했고 ‘커런트 모드 액티브 캐스케이드’라는 크렐만의 전류 증폭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AB급 SEPP구성. 채널당 8옴 부하에서 400와트. 독특한 것은 고출력의 앰프임에도 방열판이 앰프 내부에 장착되어 외관이 아주 말쑥해졌다는 점. 멀리서 보면 도저히 크렐의 앰프라는 것이 상상되지 않는 멋진 외관이다. AB급 증폭단과 더불어 이것은 분명히 새로운 크렐이다.
출장 시청. 프리 파워에 린데만 820을 소스로 하고, 하이페리온 HS968과 락포트 Merak 2를 교대로 울려보았다. 먼저 대편성 관현악부터. 첫 음부터 강력한 힘의 쇄도를 느꼈다. 스케일이 커서 시원하게 음이 펼쳐지고 스피커에서 쉽게 음을 뽑아 낸다는 인상이다. 금관의 광채는 밝게 빛나며 리스너 앞으로 쭉쭉 뻗어 나온다. 현 합주의 울림과 여운도 아련하거나 아득한 느낌보다는 마음 후련하게 구체적으로 그려준다. 예전에 린데만 820을 경험했을 때는 섬세한 고역은 발군이지만 중저역에서 선이 조금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크렐 202/402와의 조합을 듣고는 그것이 선입관이었던 것을 알았다. 풍성하면서도 절제력 있는 저역이 선명한 고역과 잘 어울린다. 여성 보컬들을 들어 보면 일부 개성이 강한 앰프에서 느껴지는 퇴폐적이거나 뇌쇄적인 독특한 매력보다는 건강하고 밝은 느낌을 받았다. 그늘진 우울한 밤의 느낌보다는 상쾌하고 발랄한 아침의 음이다. 필자가 느끼는 예전 크렐의 음에 비해서는 고역 쪽의 느낌이 많이 다른데, 전체적으로 싱싱하고 탄력적으로 변화된 듯하다.
하이파이클럽에서 나오면서 크렐이 멋지게 진화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성공은 그들의 앰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함,
정밀함 그리고 복잡한 하드웨어적 측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인 구동력과 매력적인 디자인 그리고 싱싱한 음색 변화를 모두
포괄한 의미이다. L 님에게 크렐을 한 번 써보면 어떻겠냐고, 크렐이 크게 ‘진화’했다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도
크렐의 앰프는 이래서 어떻고 저래서 어떻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최상균
Krell Evolution 402 파워앰프 스펙
Evolutoin CAST (Current Audio Signal Audio Transmission)
Krell Current Mode topology, Active Cascode Topology
출력 : 400W, 800W (8, 4Ohms)
전원 : 5000VA 파워서플라이
크기 : 43.9 x 24.8 x 55.9cm
Krell Evolution 202 프리앰프 스펙
Evolution CAST, Krell Current Mode topology, balanced circuitry
1.5 MHz Open loop bandwidth in a zero negative feedback
Open-loop distortion is typically less than 0.005%(50 parts per million)
전원 : 170VA 토로이달 트랜스포머, 39,600 마이크로패럿 필터 캐패시턴스
크기 : 43.9 x 19.3 x 46.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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