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상의 전환으로 연출하는 신세계의 풍경 피셔&피셔 SN450 스피커
독일의 스피커 회사인 피셔&피셔에서 내 놓은 플로어형 모델인 SN450은 필자에게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이다. 지난 25년 동안 필자가 지켜 온 소신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디오와 돌은 그리 잘 어울리는 궁합이 아니라는 필자의 믿음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스피커나 플레이어의 받침대로 대리석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만큼, 필자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석재의 효용성을 인정하는 애호가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피셔&피셔의 행보는 호기(豪氣)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버리기는 힘들 것 같다. 이들은 인클로저 자체를 돌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필자가 시청한 SN450은 자연 상태의 슬레이트, 그러니까 점판암(粘板岩)을 인클로저의 재질로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은 필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셔&피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석재 사용을 확고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바로 필자이기 때문이다. 오디오에 석재를 사용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고 주장하는 필자 같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면, 인클로저에 슬레이트를 과감하게 도입한 피셔&피셔의 결정은 발상의 전환으로 거둔 승리를 뜻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스피커에 대하여 합격점을 준다면, 이제는 음악에 어울리는 음향 특성을 가진 암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미지의 영역인 석재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자연 상태의 슬레이트, 즉 점판암의 정체이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따르면 ‘장력강도와 내구력이 큰
얇은 판으로 쉽게 쪼개지는 세립의 점토질 변성암’이라는 기본 설명과 함께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얇은 층(層)으로 발견되는 일부 다른 암석들도 지붕이나 비슷한 목적에 이용되므로 슬레이트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점판암은 층리면을 따라 쪼개지지 않고, 층리면에 대해 큰 각도로 교차하는 벽개면을 따라 쪼개진다. 이 암석은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와 압력의 저변성 조건에서 만들어진다. 원래의 물질은 대개 세립질 점토와 일부 모래나 화산진 등으로 구성된 이암이나 셰일 같은 퇴적암이었다. …(중략)… 점판암의 주요광물은 작고 불규칙한 크기의 운모, 엽편상 녹니석과 렌즈상 석영이다. …(중략)… 점판암은 종종 일정한 크기로 자르거나 분쇄해서 판매된다. 일정한 크기로 자른 점판암은 전기배전반, 실험실 탁자 윗면, 칠판, 지붕 및 바닥재로 이용되고, 분쇄한 점판암은 지붕재의 혼합물, 골재 및 충전재로 사용된다. 미국의 주요생산지는 펜실베이니아와 버몬트이고, 영국에서 사용되는 점판암은 대부분 북부 웨일스에서 공급된다.”
그렇다면 피셔&피셔의 입장은 어떠한가?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점판암은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북동부에 위치한 자우어란트 산(産)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연 상태의 점판암을 가지고 스피커를 만드는 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소재 특유의 박편(薄片) 상태의 다층구조,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반향 또는 잔향 특성, 그리고 대단히 높은 질량 등으로 인하여 이 소재는 대단히 뛰어난 음향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합니다.”
이럴 때 기존의 목재 인클로저와 비교해 보면 슬레이트 인클로저는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이들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스피커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진동에 민감한 목재 캐비닛은 스피커의 에너지를 감소시킵니다. 왜냐하면 캐비닛 패널의 진동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목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여) 점판암으로 만든 캐비닛은 스피커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만 가지고도 실내의 공기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먼저 실제 음향부터 살펴보면, 저음역의 다이내믹과 음량이 훨씬 강력해진 면모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외관과 미감의 측면이 여기에 추가됩니다.
소형 캐비닛으로도 리스닝 룸 전체를 커버합니다. 자연 상태의 점판암의 에너지 밸런스는 저음역에서만 탁월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 소재가 가지고 있는 다량의 음향 리액턴스는 고음역에서 음향 증폭의 결과로 진동하는 멤브레인이 배플의 공진과 상쇄되지 않도록 해 줍니다.
음악의 신뢰도의 측면에서 볼 때 이들 특성은 일반 스피커에 비하여 음악의 신뢰도에서 풍부한 뉘앙스와 강력한 힘을 이끌어 냅니다.”
이상의 설명은 이들이 인클로저에 점판암을 사용하는 이유를 잘 요약하고 있다. 드라이브 유닛 자체의 음향을 적확하게 이끌어 내겠다는 현대
스피커 이념이 점판암 인클로저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아무 암석이나 인클로저의 재질로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에 무조건 찬성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필자가 시청한 SN450을 살펴본다면, 이들의 주장은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점판암을 사용한 결과로만 볼 수는
없겠지만 ― 만약 그렇다고 말하면, 피셔&피셔의 독자적인 기술력과 음향에 대한 감수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
SN450을 시청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이 스피커의 인클로저가 석재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스피커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 우퍼를 인클로저 안쪽 면에 설치하고 있는 플로어형 모델인 SN450은 높이가 1,115밀리미터,
폭이 210밀리미터, 깊이가 350밀리미터이고, 무게는 돌을 86킬로그램에 달한다. 크기로 보면 중형 규모의 플로어형 스피커로 볼 수 있지만,
이 스피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게라고 할 수 있다. 인클로저를 돌로 만든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겠지만, SN450은 무게가 자그마치
86킬로그램에 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피커 가운데 이 정도 무게라면 언뜻 탄노이의 오토그래프가 떠오른다. 그러나 크기는
오토그래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단출한 외양! 바로 이것이 석재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이 스피커는 어떤 유닛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SN450은 트위터에 28밀리미터 구경의 다인 에소타르 돔 트위터, 미드레인지에는
17센티미터 구경의 SEAS의 액셀 마그네슘 콘, 우퍼에는 22센티미터 구경의 카본 파이버를 채운 페이퍼콘 등의 유닛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SN450은 어떤 음향을 이끌어 내는 스피커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오디오 리서치의 모델 CD7 플레이어, 네임 오디오의 NAC202·NAP200·HICAP·NAPSC
앰프·파워 서플라이 세트 등으로 구성된 하이파이 클럽의 시스템에서 SN450은 필자의 기대를 완전히 빗나간 음향을 연출하고 있었다. 오디오
시스템에서 액세서리로 흔히 사용하는 대리석 특유의 차가운 음색, 경질로 흐르는 저음역,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하모니의 부족 현상을 이
시스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석재의 본성을 완전히 저버린 듯한 풍부하면서도 따뜻한 음색과 선율의 섬세한 굽이가 삼삼한
조화를 이룬 음향이 이 스피커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발산보다는 수렴 성향이 더 강한 발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야 시청 전부터 예상했지만,
이 스피커에서는 소담스럽고 온화한 음향 무대 속에 음악을 살포시 담아두고, 마치 자신의 자태를 귀로 듣지 말고 눈으로 응시하라는 듯한 독특한
음향 풍경을 연출하는 모습이 볼 만했다. 그 가운데서도 음악의 표정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중음역과 독특한 음영을 담아내는 고음역에서 떠오르는,
관능미를 담아내는 고혹적인 음색은 이 스피커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음향 특성은 이 스피커가 전 대역에서 구현하고 있는 적절한 두께와 중량감을 보여 주는 텍스추어를 떠올려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대역에서도 음향 자체가 불필요하게 얇아지거나 가벼워지는 모습이 이 스피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적시하면 이러한 음향 특성은 SN450과 네임의 앰프 세트가 협동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들 조합에서는 무엇 하나 더하고
뺄 것이 없는 균형감이 뛰어난 대역 밸런스, 어디 하나 흘러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정연한 다이내믹 등이 반듯한 선율선과 보기 좋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럴 때 음향 무대의 심도가 좋아지고, 각 성부의 어우러짐이 유연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라흐마니노프의 전례음악인 <저녁기도>와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인 <카니발>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파울
힐리에르가 지휘하는 <저녁기도>에서는 하모니아 문디 녹음 특유의 청명한 공간감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시스템이 연출하는 삼삼한 공간감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무반주 합창에서 살아나야 할
섬세한 색채와 선율선을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러시아 합창단에서만 볼 수 있는 바소프로푼도(basso
profundo : 러시아에만 있는 베이스로서 일반 베이스보다 한 옥타브가 더 내려가는 저음역을 노래한다)의 깊이 있는 음색 또한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모습이 이 시스템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선율선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과 우아한 색채를 보기 좋게 결합하는 이러한 음향 특성은 아믈랭이 연주하는 슈만의 <카니발>에서 한층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스템은 저음역의 중량감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아믈랭이 연출하는 섬세한 여운이
담긴 우아한 색채 표현, 적절한 깊이를 담아내는 음색, 화사한 고음역 등을 과부족 없는 밸런스로 연출하고 있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시스템 또는 SN450에서 가장 눈여겨볼 특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이 스피커가 보여 주는 자로 잰 듯한 걸음걸이를
담고 있는 템포 또는 페이스이다. 저음역 자체에 불필요한 무게를 싣지 않는 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지만, 그리고 상하 어디 하나 과부족이
없는 정연한 대역 밸런스를 보여 주는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이지만, 이 스피커는 음악 자체의 안정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사뿐한 선율선의
흐름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독주곡, 실내악, 관현악곡 등에서 일관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나치게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법이 없는 적절한 명도,
투명함과 온화함을 아우르는 과부족이 없는 해상도, 적절한 굵기로 음악의 안정된 흐름을 이끌어 내는 유연한 선율선과 다이내믹, 화사한 색채
표현 등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룬 음향이 이 스피커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슬레이트, 즉 점판암으로 만든 인클로저를 채용한 독특한 스피커인 피셔&피셔의 SN450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글머리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스피커는 흔히 ‘석재 = 차가움’, ‘석재 = 경질’이라는 상식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도전은 성공했는가? 석재의
효용성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피셔&피셔의 도전만큼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좀 더 다양한 기기들과의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만큼, 이 스피커의 능력을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번 시청은 피셔&피셔가 왜 주목할
만한 회사인가 하는 점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박성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