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장형 스피커의 개가 ELAC BS 602 X-Jet
허공에 둥실 음이 떠오른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홀로그래픽한 그림을 보는 것처럼,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만 같은 리얼한 음상. 그러면서 이 작은 스피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와이드 레인지한 음 조성은 과연 무엇인가. 눈을 감으면 스피커의 존재가 사라지면서 스피커 바깥에까지 음장이 확대되어 더할 나위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사실 현대 하이 엔드의 가장 큰 화두는 스테레오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일단 이 음에 중독이 되면 앞으로만 쏟아내는 스타일의 스피커는 대면하기조차 싫어진다. 아무리 음색이 아름답고, 중역대가 매끈하다고 해도 두어 곡 듣고 나면 곧 지루해진다. 그런 면에서 본 기가 갖고 있는 장점은 상당하다. 더구나 5평 이하의 리스닝 룸에서 대부분 오디오를 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감안하면, 이처럼 북셀프의 장점을 철저하게 살리면서 3웨이로 구성된 본 기의 존재는 귀중하기까지 하다.
눈을 뜨고 다가가서 스피커의 프런트 배플을 살펴본다. 리본같이 혹은 무슨 주름같이 생긴 독특한 트위터며 그 주위를 감싼 미드레인지 그리고 낯선 재질의 우퍼가 보인다. 한눈에 봐도 많은 기술력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험삼아 인클로저를 두드려본다. 단단하면서도 촉감이 좋다. 이 역시 첨단 테크놀로지가 투입된 인클로저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이 테크한 프로덕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파생되는 넓은 음장과 자연스런 질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
자료를 살펴보니, 엘락이라는 회사의 연혁이 무척 길다. 아날로그 애호가라면 한때 카트리지 제조 회사로 친숙한 브랜드지만, 실은 그보다 더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엘락의 연대기 첫머리를 장식하는 연도가 1908년. 1908년이라니, 혹시 0과 8을 헷갈린 것 아닌가 ? 아니다, 1908년이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나중에 정식으로 엘락을 발족하는 창업자 필 하인리히 헥트 박사가 독일의 키엘이라는 도시에서 주로 수중의 음향을 연구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이 엘락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키엘에서 세운 이 공장이 지금까지 이전하지 않고 엘락의 중추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엘락의 정식 발족 시기를 논한다면 아무래도 1926년 9월 1일이 될 것이다. 이 날에 기존의 연구를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몇 명의 박사가 더 동원되어 드디어 엘락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2차 대전 중에 엘락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바, 아무래도 잠수함에 수중 음향 탐지와 같은 기기가 필요해진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불어 엘락은 대기 중의 음향 전달에도 관심을 쏟는데, 이런 기술은 항공기쪽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아무튼 음향이주전공이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엘락은 외길만 걸었다고 하겠다.
전후, 엘락은 많은 군수 장비회사처럼 민생용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라디오 제조. 당시 지멘스의 상표를 붙이고 팔린 라디오의 대부분은 키엘에 있는 엘락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턴테이블과 카트리지의 생산에도 주력하게 된다.
특히 카트리지는 1997년에 공식적으로 생산을 종료할 때까지 약 50여년간 동사를 대표하는 제품이 된다. 턴테이블만 하더라도 한때 듀얼, 퍼페툼 에브너 등과 함께 독일의 3대 브랜드로 알려질 만큼 인기가 있었고, 약 4백만대 이상 팔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엘락에 전환기가 온 것은 1981년. 존 앤 파트너라는 회사가 엘락의 하이 파이 분야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음향 사업에 진출한 것이다. 이후, 스피커라던지 룸 어쿠스틱 등 다채로운 분야에 연구를 거듭, 홈 오디오 분야에 활발하게 진입한다. 그런 엘락의 본격적인 성과가 이뤄진 것은 1993년. 역사적인 JET 트위터와 알루미늄 소재의 우퍼가 이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엘락 스피커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카트리지 사업을 포기할 정도로 스피커 사업에 주력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엘락의 성가를 드높인 모델은 CL 310 JET. 1999년에 발매되어 특히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은 모델로, 310 Jubilee, 310 Ultimate Edition 등 총 다섯 개의 버전이 만들어질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필자는 2000년 초, 세운상가에 있는 어느 숍에 들렀다가 이 모델을 듣고 깜짝 놀란 경험이 있다. 분명 영한사전 크기만한 제품인데도, 공간을 가득 메우는 음장은 그렇다손 치고, 저역의 펀치력이나 묘사력이 매우 훌륭했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조금만 크기가 컸다면 주저없이 구입하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때의 음은 설득력이 있었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BS 602 X-JET로 진화한 모델을 앞에 두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참, 여기서 기존의 JET가 아닌 X-JET로 왜 이름을 붙였는가부터 설명해야겠다. 당초 엘락이 만든 제품들은 2웨이를 기본 사양으로 했다. 여기서 잠깐 트위터와 우퍼를 짚고 넘어가자. 우선 우퍼는 얼핏 보면 금속성의 알루미늄 재질 같지만, 실은 페이퍼 콘과 알루미늄을 교묘하게 결합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소재다. 구경이 작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저역이 묘사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트위터를 보면 JET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Jet Emission Tweeter"의 약자다. 여기서 ”Emission"이 방사, 분출 등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보면, 제트기처럼 빠르게 음을 방사시키는 트위터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흔히 리본 트위터라고 하는 것과는 좀 개념이 다른데, 메이커 측에서는 벤딩 웨이브 방식의 진동판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코디언의 커튼처럼 주름을 친 방식인데, 플리츠라고 부르는 이 주름을 펴면 일반 돔형 트위터의 10배 이상의 면적이 나온다. 무려 10배 !
그런데 원래 2웨이로 제작했을 때의 JET는 고역보다는 중역쪽에 치중한 인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역 성분을 높이다 보면 우퍼와의 연계에서 아무래도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개량한 것이 X-JET COAX 방식으로, 기존의 JET의 주변에 평면 진동판의 미드레인지를 둥글게 설치한 것이다. 탄노이나 틸에서 볼 수 있는 2웨이 동축형인 것이다. 여기서 동축형의 강점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
미드 레인지 유닛의 성분 역시 알루미늄이고, 일종의 링 라디에이터 방식으로 고역을 감싸고 있다. 이렇게 되면 JET쪽에서는 중역에 대한 부담이 덜해지므로, 마음놓고 고역 성분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자료에서 고역 주파수의 한계를 50KHz로 명기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설계 방식에 따른 결과물인 것이다.
물론 이에 커플링되는 우퍼는 정통의 하이브리드 소재로 한 18Cm 구경이다. 얼핏 작아보이는 것 같지만, 역시 미드 레인지 유닛의 첨가에 따른 저역부의 확대를 도모했으므로, 32Hz까지 평탄하게 재생된다. 아주 극악의 저역 성분을 지닌 소프트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녹음에 대응할 만한 수치라 하겠다.
이어서 인클로저를 보자. 처음에는 무슨 화학 물질을 갖고 만들었나 했는데, 울림이 매우 내추럴하고, 음악적인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알루미늄 압출 성형재와 MDF 소재를 적절히 믹스해서 독자적으로 가공 처리한 것이라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중간에 둥글게 곡면 처리하고 앞뒤로 길게 뺀 구조인데, 모두 음향학적인 배려 하에 숱한 컴퓨터 시물레이션을 거쳐 완결된 형상이다. 뒷면을 보면 바이 와이어링을 제공한 단자 위에 별도의 포트가 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손을 넣어보면 매우 깊다. 원래 인클로저의 안길이가 깊고, 포트도 길면 베이스 음의 재생이 매우 유리해진다. 그런 원리로 만들어진, 일종의 베이스 리플렉스 방식의 구조인 것이다. 이래서 총 12Kg의 중량을 갖는데, 크기에 비하면 매우 무거운 축에 속한다.
한편 북셀프 스피커에서 인클로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받침대임을 모르는 애호가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엘락은 본 기를 위해 별도로 LS 65라 명명한 전용 스탠드를 제공하고 있다. 높이가 65Cm로, 그 때문에 65라는 명칭을 부여한 듯한데, 다행스럽게도 스탠드 안을 다른 흡음 물질을 채울 수 있다. 모래든 뭐든 채워서 무겁게 하면 할수록 명료한 저역을 얻을 수 있다. 스탠드 밑에 있는 스파이크는 이리저리 돌릴 수 있으므로 수평을 잡기에 매우 용이하며, 상판에도 역시 스피커를 허공에 뜨도록 별도의 스파이크가 설치되어 진동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문제는 음인데, 처음에 표현했듯 역시 이런 스피커는 음장 표현에서 대단한 강점을 갖는다. 그러면서 첨단의 형상이 갖는 선입견과는 달리 매우 자연스럽고, 질감이 풍부한 음이 나오는데, 이는 인클로저에 일부 목재 성분을 넣고 또 베이스 유닛에 페이퍼 콘 재질을 첨가한 데에서 얻어진 강점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 보면, 엘락이라는 회사는 오랜 연혁을 자랑하는 메이커답게, 첨단 소재를 고도의 정밀한 음악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노우 하우를 간직한 회사라 하겠다.
본 기의 입력 감도는 87dB이고 임피던스는 4오옴이다. 대개의 북셀프가 그렇듯, 대강 파워를 연결한다고 해서 쉽게 음이 나오는 타입은 아니다. 자료에는 최하 100W에서 최대 250W를 권장하고 있는데, 이는 어지간한 인티 앰프 갖고는 어림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되도록 단품의 파워 앰프를 구해다가 정성을 다해 매칭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 시청에는 좀 과하게 첼로의 랩소디를 걸었다. 물론 엘락의 가능성을 추궁하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는 매칭이지만, 꼭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 150W급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랩소디는 8오옴에 200W, 4오옴에 400W를 정확히 내준다. 프리앰프는 첼로의 코랄, CDP는 린데만 820을 연결했다.
첫 곡으로 에릭 빕의
에디 히긴스의 (It's Magic)이란 곡에는 두 명의 테너 색소폰 주자가 나온다. 스코트 해밀턴과 켄 페플롭스키가 그 주인공. 당연히 톤이 달라, 해밀턴이 다소 거칠고 두툼한 데 반해 켄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그 음색의 차이가 확연히 구분이 되고, 중간에 함께 얽힐 때의 표정도 절묘하게 포착한다. 마치 2차 대전 경으로 돌아간 듯, 스윙 캄보 형식으로 녹음된 이 곡은 정위감보다는 음색으로 승부하는 트랙. 그런 호소력 짙은 음악이 농염하게 다가와 멜랑콜리의 극치를 전해준다. 특히 고역에서의 개방적인 음색은 전성기 JBL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 음이어서 새삼 감격하기도 한다.
윈턴 마살리스의
여기서 과연 질감으로 승부하는 저역이란 무엇일까 ? 아무래도 스피드에서 다르다. 같은 헤르쯔의 저역 신호라도 무겁고, 두툼하면 그만큼 제어는 힘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복잡한 음성 신호를 간직한 요즘의 디지털 녹음에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AE이나 린필드 시리즈를 제작한 필 존슨이 실은 베이스 연주자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본 기가 해석하는 저역은 그런 면에서 스피디하고 또 현대적이다. 여기에 천장 높은 줄 모르고 뻗어가는 고역의 상쾌함은 막히고 답답한 가슴을 확 펼치는 듯하다. 기존 사이즈의 한계를 접고 통상의 메인 스피커로 대우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한 본 기의 출현은 여러모로 고무적이라 하겠다.
- 이종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