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의 피아니스트, 마우리지오 폴리니는 객관적인 자세로 악보를 철저히 분석해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는 곳 없을 듯한 탄탄한 음악으로 재생산하는 연주자로 명성이 높지요.
자신의 손이 빚어내는 소리에 대한 완벽한 장악력을 보여주는 그는, 이미 쇼팽의 에튀드 연주로 많은 피아니스트들을 절망하게 만든 바 있지요.
그런 그가 드뷔시를 손댔습니다.
<전주곡 1권>과 <기쁨의 섬>입니다.
'전주곡'(Prelude)라는 말은, 뭔가 뒤에 따라올 메인게임을 준비하는 부속물의 느낌을 주지요. 피아노 음악에서, 전주곡의 '종속적 성격'을 지우고 그 자체로서 독립성을 갖게 해 준 사람은 쇼팽입니다.
쇼팽의 경우 단위곡별로는 형식적 자유를 부여했지만, 전주곡집 전체로는 조성 등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를 정했는데, 드뷔시는 개별 곡의 자유로움을 살리는 것은 물론, 특별히 자기가 작곡한 순서대로 연주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각각의 곡들은 아래에 소개한 대로, 어떤 사물이나 연상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점 또한 쇼팽의 전주곡 (번호와 조성 악상 표시만 붙어있는)과 다른 점이죠.
1번곡 "Danseuses de Delphes (델피의 무녀)"는 고전주의 회화에도 나오는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고아하면서도 장중한 맛이 있는 춤사위를 묘사하는 듯 합니다.
2번 "Voiles"는 영어로는 veil 또는 sail입니다. 불어 특유의 명사의 성에 따라 어느쪽으로든 해석 가능한 단어랍니다. 곡의 분위기도 매우 몽환적입니다. 어느쪽이든,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천변만화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사물이기 때문인가본데, 분위기조차도 음산한 듯 하면서 신비롭기도 한 알 수 없는 곡입니다.
3번 "Le vent dans la plaine"는 '들판위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한줄기 바람이 풀도 쓰다듬고 흙먼지도 휘말아올리며 들판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4번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저녁공기속을 돌아다니는 소리와 향기)는 그 제목처럼 참 알듯 모를듯 한 곡입니다.
5번 "Les collines d'Anacapri" (아나카프리의 언덕)은 지중해의 파란 하늘과 물빛같은 발랄함과 활기, 민속적 리듬 같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모처럼 귀에 들어오는 또렷한 주제선율이 반갑습니다. 고음건반 끝으로 치달아 힘차게 빛나는 마무리 터치는 파란 지중해 상공으로 솟아오르는 한마리 새를 연상시킵니다.
6번 "Des pas sur la neige"(눈속의 발자국) -음산하고 얼어붙은 풍경속을 지나간 발자국..그리고 그 발자국을 차차 덮어 지우는 눈을 그린 곡으로 들립니다.
7번 "Ce qu'a vu le vent d'ouest" (서풍이 본 것들 - What the west wind has seen>은 6번처럼 멜로디적인 요소가 해체된 곡입니다. 뭔가 격렬한 것이 끓어넘치는 곡 분위기는 아마도 서풍이 본 것이 바다위의 폭풍이 아닌가를 연상케 합니다. '쾅-' 하고 연달아 배를 덮치는 거대한 파도가 눈앞에 그려지고, 포르테시모로 건반을 내려치기 위해 페달을 밟는 소리가 같이 들립니다.
변화무쌍한 리듬감과 스피드감을 완벽히 살리고 있는데, 폴리니 정도의 기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쳐내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아노 전공자라면 이 연주를 들으면서 '오 신이시여!'를 외칠듯 합니다.
8번 "La fille aux cheveux de lin"(아마빛 - 갈색 - 머리의 소녀)은 많이 알려진 곡이죠. 제목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런 인상을 주는 잔잔한 곡입니다.
9번 "La serenade interrompue" (방해받은 세레나데)는 멜로디중에 약간씩 스페인적 정서가 묻어납니다. 아마도 사랑을 이루는데 실패했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스페인 연인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음악화한 것이 아닐까 짐작만 되는데..
멜로디 중간중간 다른 성격의 멜로디가 갑작스럽게 끼어듭니다. 그래서 제목이 interrupted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만.. 아마 이런 갑작스러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주류 선율의 계속을 잘 살리는게 이곡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0번 "La cathedrale engloutie" (가라앉은 교회)는 바다밑에 가라앉아 안개끼고 파도치는 날 아련히 환상처럼 보인다는 전설의 도시 성당을 그린 곡입니다. 몽환처럼 시작해 점차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위 상상의 건축물처럼, 처음에 조용히 시작해 점차 거대한 음향을 쌓아가는 곡 구조입니다.
묵직한 저음 타건, 그리고 음향의 중첩을 통해 폴리니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거대한 석조건물 그 자쳅니다. 연주자의 솜씨는 피아노를 파이프오르간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파이프오르간에는 없는 타악기적 슬램까지도 등장하니 드뷔시라는 작곡가가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얼마나 혁신적으로 개척하였는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11번 "La danse de Puck" puck은 사전을 찾아보면 고어로 '작은 장난꾸러기 요정'이라고 나옵니다. 가벼운 터치와 변덕스러운 악상이 주가 되는 곡.
12번 "Minstrel"은 드뷔시가 1905년 영국에서 본 민스트렐(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여 노래부르는 연예단 / 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뜻도 있지만..)을 소재로 한 것이라 합니다. 광대들의 몸짓을 그려낸 듯한 경쾌한 리듬감이 흥겹고, 귀여운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다른 곡들보다 귀에 쉽게 와 닿는 편입니다.
전주곡 1권에 들어가는 곡은 아니지만 13번 트랙 (기쁨의 섬)은 평론가들로부터 드뷔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라는 추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정부였다가 나중에 부인이 된 Emma Bardac과 함께 방문한 바 있는 섬 이야기라는 것이죠. 알듯 모를듯 손에 잡힐듯 말듯 , 그러면서 악기의 음향적 특성은 고도로 천착하는 드뷔시 피아노 음악의 전형적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드뷔시의 음악들은 마치 점묘법으로 그린 인상주의 회화처럼, 갖가지 빛깔을 가진 소리들의 단위로 그려낸 어떤 영상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폴리니는 그 단위가 되는 '점'을 완벽히 콘트롤하면서도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시적 이미지를 연상케 해야 하는 드뷔시 전주곡의 본질이 아주 잘 살아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MEMORIA ABM에서 나온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The Vatican Recordings"에 실린 1977년 4월 연주를 들어보았습니다. 자신이 몽환하기보다는 듣는이가 몽환적 이미지 속으로 가는 다리만 놓아준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가는 연주이고, 피아노로 음을 빚어내는 솜씨는 스승과 제자가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 힘듭니다. 제 주관적 느낌으로 말하자면 미켈란젤리쪽이 좀 더 명상적으로 들리고 폴리니쪽은 더욱 음향적으로 다이내믹하달까요. (템포도 폴리니쪽이 약간 빠릅니다.)
드뷔시는 자기 음악을 듣는 이들이, 각 곡이 끝나는 시점에서 자기가 붙인 제목을 보아주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듣는이의 상상력이 제약당하는 것을 꺼렸던 것이겠죠. 대신 드뷔시 본인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듣는 것도 갑갑한 일이니, 이번 제 글은 각 제목이 무슨 뜻인지만 전달하는 것으로도 성공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드뷔시 수입반에는 불어만으로 표기가 돼 있거든요.
베토벤 쇼팽 브람스 등에 주력해 왔던 그가 드디어 도이치그라마폰에서 드뷔시를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이 반갑습니다. 그라마폰 웹사이트에서 카탈로그 조회를 해 보니 이것이 그의 유일한 드뷔시 음반으로 나옵니다.
다만 1998년 6월이라는 녹음 시점이 주는 기대에 비해서는 (발매는 99년) 피아노 소리의 또랑또랑한 맛이 좀 덜한 편 아닌가 싶고, 폴리니의 실연에서 들을 수 있을 음 색채의 변화무쌍함이 더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점때문에 별 반개를 뺍니다. 다섯개 만점에 4개반입니다.
이현식.
그런 그가 드뷔시를 손댔습니다.
<전주곡 1권>과 <기쁨의 섬>입니다.
'전주곡'(Prelude)라는 말은, 뭔가 뒤에 따라올 메인게임을 준비하는 부속물의 느낌을 주지요. 피아노 음악에서, 전주곡의 '종속적 성격'을 지우고 그 자체로서 독립성을 갖게 해 준 사람은 쇼팽입니다.
쇼팽의 경우 단위곡별로는 형식적 자유를 부여했지만, 전주곡집 전체로는 조성 등에 있어서 일정한 순서를 정했는데, 드뷔시는 개별 곡의 자유로움을 살리는 것은 물론, 특별히 자기가 작곡한 순서대로 연주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각각의 곡들은 아래에 소개한 대로, 어떤 사물이나 연상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점 또한 쇼팽의 전주곡 (번호와 조성 악상 표시만 붙어있는)과 다른 점이죠.
1번곡 "Danseuses de Delphes (델피의 무녀)"는 고전주의 회화에도 나오는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고아하면서도 장중한 맛이 있는 춤사위를 묘사하는 듯 합니다.
2번 "Voiles"는 영어로는 veil 또는 sail입니다. 불어 특유의 명사의 성에 따라 어느쪽으로든 해석 가능한 단어랍니다. 곡의 분위기도 매우 몽환적입니다. 어느쪽이든,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천변만화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사물이기 때문인가본데, 분위기조차도 음산한 듯 하면서 신비롭기도 한 알 수 없는 곡입니다.
3번 "Le vent dans la plaine"는 '들판위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한줄기 바람이 풀도 쓰다듬고 흙먼지도 휘말아올리며 들판 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4번 "Les sons et les parfums tournent dans l'air du soir" (저녁공기속을 돌아다니는 소리와 향기)는 그 제목처럼 참 알듯 모를듯 한 곡입니다.
5번 "Les collines d'Anacapri" (아나카프리의 언덕)은 지중해의 파란 하늘과 물빛같은 발랄함과 활기, 민속적 리듬 같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모처럼 귀에 들어오는 또렷한 주제선율이 반갑습니다. 고음건반 끝으로 치달아 힘차게 빛나는 마무리 터치는 파란 지중해 상공으로 솟아오르는 한마리 새를 연상시킵니다.
6번 "Des pas sur la neige"(눈속의 발자국) -음산하고 얼어붙은 풍경속을 지나간 발자국..그리고 그 발자국을 차차 덮어 지우는 눈을 그린 곡으로 들립니다.
7번 "Ce qu'a vu le vent d'ouest" (서풍이 본 것들 - What the west wind has seen>은 6번처럼 멜로디적인 요소가 해체된 곡입니다. 뭔가 격렬한 것이 끓어넘치는 곡 분위기는 아마도 서풍이 본 것이 바다위의 폭풍이 아닌가를 연상케 합니다. '쾅-' 하고 연달아 배를 덮치는 거대한 파도가 눈앞에 그려지고, 포르테시모로 건반을 내려치기 위해 페달을 밟는 소리가 같이 들립니다.
변화무쌍한 리듬감과 스피드감을 완벽히 살리고 있는데, 폴리니 정도의 기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쳐내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아노 전공자라면 이 연주를 들으면서 '오 신이시여!'를 외칠듯 합니다.
8번 "La fille aux cheveux de lin"(아마빛 - 갈색 - 머리의 소녀)은 많이 알려진 곡이죠. 제목처럼 따뜻하고 사랑스런 인상을 주는 잔잔한 곡입니다.
9번 "La serenade interrompue" (방해받은 세레나데)는 멜로디중에 약간씩 스페인적 정서가 묻어납니다. 아마도 사랑을 이루는데 실패했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스페인 연인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음악화한 것이 아닐까 짐작만 되는데..
멜로디 중간중간 다른 성격의 멜로디가 갑작스럽게 끼어듭니다. 그래서 제목이 interrupted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만.. 아마 이런 갑작스러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주류 선율의 계속을 잘 살리는게 이곡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0번 "La cathedrale engloutie" (가라앉은 교회)는 바다밑에 가라앉아 안개끼고 파도치는 날 아련히 환상처럼 보인다는 전설의 도시 성당을 그린 곡입니다. 몽환처럼 시작해 점차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위 상상의 건축물처럼, 처음에 조용히 시작해 점차 거대한 음향을 쌓아가는 곡 구조입니다.
묵직한 저음 타건, 그리고 음향의 중첩을 통해 폴리니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거대한 석조건물 그 자쳅니다. 연주자의 솜씨는 피아노를 파이프오르간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도 파이프오르간에는 없는 타악기적 슬램까지도 등장하니 드뷔시라는 작곡가가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얼마나 혁신적으로 개척하였는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11번 "La danse de Puck" puck은 사전을 찾아보면 고어로 '작은 장난꾸러기 요정'이라고 나옵니다. 가벼운 터치와 변덕스러운 악상이 주가 되는 곡.
12번 "Minstrel"은 드뷔시가 1905년 영국에서 본 민스트렐(백인이 흑인으로 분장하여 노래부르는 연예단 / 중세 음유시인이라는 뜻도 있지만..)을 소재로 한 것이라 합니다. 광대들의 몸짓을 그려낸 듯한 경쾌한 리듬감이 흥겹고, 귀여운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다른 곡들보다 귀에 쉽게 와 닿는 편입니다.
전주곡 1권에 들어가는 곡은 아니지만 13번 트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