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잠못이루는 밤을 위하여 - 백건우의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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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잠못이루는 밤을 위하여 - 백건우의 포레

건반위의 구도자 백건우. 그가 라흐마니노프와 바흐-부조니에 대한 천착을 마치고 이제 다시 그의 전공이라 할 프랑스 음악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저는 지난 19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그의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당초 백건우의 가브리엘 포레 피아노작품집이 Decca에서 이달초쯤 나오기로 되어있어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연주곡목에 포레는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라벨의 피아노협주곡 1번을 메인으로 하고 앞에 이베르의 디베르티멘토, 뒤에 비제의 교향곡1번을 연주하는 레퍼토리로, 협연악단은 파리 앙상블 오케스트라였습니다. 파리 앙상블 오케스트라는 1978년 창단된 소규모 오케스트라로서, 미국계인 존 넬슨(John Nelson)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종문화회관을 찾으면서, 저는 ‘오랜만에 연주회장을 간다’는 기쁨 외에 큰 기대는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베르(Ibert)는 이름도 못들어본 작곡가였으며, 비제에 대해서도 ‘비제의 교향곡? 글쎄…’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하자면, 이런 제 생각은 무식의 소치에 따른 기우였습니다. 먼저 이베르.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그는 1890년에 태어나 1962년까지 살았던 파리의 음악가였습니다. 파리 음악원을 나와 1919년 로마 대상을 받고 이탈리아에 유학하였으며 (1884년 드뷔시도 이 상을 받았습니다. 드뷔시는 1918년에 세상을 떴죠.), 세련된 기법과 명쾌한 작풍으로 당시 청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합니다. 이베르의 디베르티멘토는 들어보니 ‘희유곡(喜遊曲)’의 본질에 매우 충실한 곡이더군요. 몽환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어던 전경을 묘사하는 듯한 분위기, 민요풍의 쉽고 재미있는 멜로디의 패러디 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20명이 채 안되는 앙상블에 트롬본,팀파니까지 다 집어넣고, 좌측 후방에는 피아노도 끼어서 연주했습니다. 음향적으로도 상당히 재미있는 곡이었는데, 달콤한 금관군의 멜로디 연주는 캄캄한 천막극장 안, 스포트라이트 아래 펼쳐지는 서커스 공연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박수소리가 난 뒤, 무대 세팅이 바뀌었습니다. 좌측 후방에 있던 피아노를 치우고 독주자용 피아노를 무대 중앙 최전방으로 끌어다놓았습니다. 지휘자와 청중 사이에 백건우의 피아노가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오케스트라 조율시는 오보에가 기준음을 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때는 악장이 피아노의 한 음을 누르고, 나머지 연주자들이 이 음에 맞추어 악기를 조율하더군요. 이윽고 백건우가 등장해 협주곡이 시작되었습니다. 라벨의 피아노협주곡은 당시 프랑스에 소개된 재즈의 음악풍을 일부 차용한 매력적인 곡입니다. 라벨다운 다채로운 음향이 큰 매력인데, 적당히 현대음악적이면서도 별로 난해하지 않은 곡이죠. 특히 2악장의 아름다움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에서 보이는 라벨 특유의 서정이 배인 각별한 것입니다. 이날 연주에서 백건우는 특유의 정묘한 터치와 감성적인 선율처리로 좋은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오케스트라의 흐름에 가끔씩 어색한 점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오디오에서 페이싱(pacing)을 얘기하듯, 백건우의 피아노와 착착 맞아들어가지 못하고 약간씩 엉기는 느낌을 간혹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백건우의 라벨 피아노협주곡은 제가 알기로, orfeo에서 나온 것이 있긴 합니다만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개리 베르티니 지휘, 슈투트가르트 라디오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입니다.) 음반으로 감상하자면, 저의 최고추천반은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과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의 DG음반입니다.

정교하고 힘찬데다 화사한 빛이 감도는 짐머만의 터치는 라벨에서도 진가를 발휘합니다. 더구나 피에르 불레즈 또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며 순음악적인 해석에 능한 프랑스인 아닙니까. 감히 최고의 조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1994년 11월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녹음되어 98년 출시된 이 음반은 DG의 4D 녹음으로, 관현악과 피아노의 색채감을 느끼는데 부족함이 없는 사운드 또한 장점입니다. 공간처리도 뛰어납니다. 같이 수록되어 있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Valse nobles et sentimentales)’의 관현악 연주를 들어보면 깊이감과 레이어링의 처리가 선명하여 귀를 즐겁게 합니다. 또한, 라벨이 오른팔을 잃은 친구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하였다고 전하는 ‘왼손을 위한 협주곡’도 같이 들어있어, 수록곡 면에서도 최고의 선택이라 할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할리우드 영화음악 같은 성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음반을 몇가지 살펴보죠. 우선, 상송 프랑소와(Samson Francois)의 연주가 EMI GROC로 나와 있습니다. 짐머만-불레즈 카드를 제외한 (또는 발매이전의) 선택이라면 베스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조합으로, 앙드레 끌뤼탕(Andre Cluytens )이 지휘한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습니다. 여기는 피아노협주곡 G장조와 밤의 가스파르가 실려있습니다. EMI의 GROC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시리즈에서는 미켈란젤리의 57년 연주도 찾을 수 있습니다. 에토레 그라치스 지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협연이고, 라벨 피아노협주곡 G장조, 왼손협주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는 어떨까요. 88년 DG음반에서는 협주곡G장조는 아르헤리치, 왼손협주곡은 미셸 베로프가 연주했고, ‘쿠프랭의 무덤’ 등 관현악곡 3곡이 커플링되어 있군요. 악단은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입니다. 아르헤리치-아바도 콤비는 베를린 필과도 함께 라벨 협주곡을 남겼습니다. 이 음반은 DG 갤러리아 시리즈로 재발매되어 있고, 밤의 가스파르, 소나티네 등이 같이 수록돼 있습니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가지요. 백건우의 라벨피협 연주가 전반부 끝순서였고, 인터미션 뒤 후반부에는 백씨의 등장이 없었으므로, 백건우는 바로 앵콜곡 연주를 했습니다. 아주 쉽고 예쁜 멜로디 – 존 필드의 녹턴이 생각나는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독주곡이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이건 포레일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랬습니다. 이번에 그가 Decca에서 내놓은 가브리엘 포레 피아노곡집(Kunwoo Baik Plays Gabriel Faure)의 첫곡인 ‘무언의 로망스 3번’이었습니다. 마침 구입하려고 찾던 음반인데 공연시작전 로비에서 팔고 있어서 한장 샀습니다.

Decca측에서는 유럽과 미국에 앞서 이 음반을 한국에 1착으로 풀었는데, 마침 공연 전날 출시가 시작된 모양이었습니다. 수록곡은 이외에도 녹턴 1,3,6,11,13번, 바카롤, 프렐류드, 바카롤 등 13곡입니다. 포레는 프랑스 피아노음악의 대가이기도 했던 생상의 제자였습니다. 생상은 1877년, 포레를 리스트에게 인사시켰는데, 리스트(1811~1886)는 포레의 발라드op.19를 초견으로 연주하다 멈추고는 놀란 포레에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는군’ 하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이 발라드 op.19가 음반의 끝곡입니다. 이 음반의 다른 곡들에 비해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한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설마 리스트가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싶은 생각은 듭니다. 어쨌든, 이 곡의 아름다움은 매우 각별합니다. 리스트도 포레에게 이 곡을 관현악곡으로 만들어볼 것을 권유해, 이 곡은 피아노 독주와 관현악, 두가지의 버전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공연에서 한국청중들로 하여금 마지막 피아니시모의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박수를 치지 않고 기다리게 만들었던 ‘무언가 op.17 no.3’를 다시 들어봅니다. 왼손의 반주부 위에서 노래하는 고음선율이 2개입니다. 이 두개의 선율을 독립적으로 들리게 하는 것은 듣기처럼 쉬운 일은 아닌데, 백건우의 연주는 이 문제를 훌륭히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곡들도 섬세한 감정표현, 밤하늘의 별빛 같은 영롱한 음색, ‘노래’를 충분히 살려주는 프레이징 등으로 포레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연주들입니다. 6번트랙의 바카롤(뱃노래) 1번 op.26도, 넘실대는 물결 같은 아르페지오와 반짝이는 달빛 같은 고음 장식음들을 듣고 있자면 가슴이 저릿저릿합니다. 유치한 광고문구 같지만 ‘깊어가는 가을밤에 잠못이루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하는 말이 이 음반에는 너무나 어울립니다. 하지만 포레와 백건우의 만남이 들려주는 음악은 결코 싼티나지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서는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자료검색을 하다보니 조선일보에 백건우씨 인터뷰 기사가 있더군요. 더 이상 이 음반을 잘 소개할 방법도 없을 것 같은 부분이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데카’ 레코드사 2탄 CD인 ‘포레 작품집’이 벌써부터 화제군요. 스크리아빈·라벨에 이어 백건우가 쏘아올린 폭죽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깨끗함, 수줍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꿈속에서 산다고 할 정도로 포레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려 노력했어요. 포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실만 그리면 어떻게 예술이라고 하겠는가, 예술은 그 이상을 그려야 한다’. 워낙 하고싶었던 게 포레였는데, 녹음 성과가 만족스럽습니다.” 포레의 무언가·녹턴·발라드·즉흥곡·전주곡 등을 담아낸 백건우의 ‘포레’ CD에 제작자로 참여한 데카 레코드사의 명 프로듀서 앤드류 코널(Andrew Cornall)은 “위대한 예술성과 사운드로 아름답게 채색된 경탄할 앨범”이라고 말했다. 백씨와 함께 지난 7월 런던에서 녹음을 끝낸 데카 직원들도 한동안 이 연주만 들었다고 한다. 별 다섯개(★★★★★ )로 구입추천합니다. p.s. 이날 연주의 후반부는 파리앙상블 오케스트라의 비제 교향곡1번 연주였습니다. 비제 교향곡의 3악장은 알고보니 라디오방송 같은데서 많이 듣던 멜로디였더군요. 전체 45명 가량이 연주에 임했는데, 현악군의 선율미가 뛰어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프랑스 음악에 천착한다는 악단의 지휘자가 미국인(존 넬슨)인 것이 재미있었는데, 프랑스 음악만의 감각적인 맛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좋은 연주회였습니다. 저는 대강당2층 앞에서 셋째줄 중앙에서 들었습니다. 역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꽉 채우기에 50명짜리 악단은 역부족인지, 축소된 스케일의 오디오음악을 듣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가끔 들었습니다. 울림이 심한 편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음향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음향, 이 두가지의 중간쯤 되는 홀이 있다면 좋겠다는 게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했으나 LG아트센터나 영산아트홀이 그렇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쨌든, 연주자 한사람 한사람의 위치가 다 잡힐 듯 하거나 파트별 연주자 숫자를 듣고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지휘자가 앵콜곡명을 이야기할 때 그 입이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콘트라베이스군의 저음이 돌처럼 단단하거나 애완동물을 섬찟하게 만들만큼 깊지는 않았음을 다시 확인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습니다. ‘라이브 그대로의 소리에 대한 추구’… 간단하면서도 참 어려운 말입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