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우 유인촌씨가 오페라 연출가로 데뷔한다!
이것은 한동안 음악계 화제였습니다. 유인촌씨는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됐던 오페라 '라보엠'에서 처음 연출을 맡았습니다.
오페라는 극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종합예술이기에, 연극 배우의 관점에서 연출되는 오페라는 어떨지, 관심을 끌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인촌씨의 오페라 연출 데뷔작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리허설을 취재하러 갔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가 처음으로 서는 국내 오페라 무대이기도 해서, '얘기가 된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사 거리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날 취재 중에 당혹스런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 오페라 하우스의 싸움 구경
2막 리허설이 끝나고 연출자 유인촌씨와 인터뷰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제작자인 한강 오페라단 박현준 단장과 유인촌씨가 말다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에 설치하는 스크린 문제로 다투는 것처럼 보여서, 항상 있게 마련인 의견 차이 정도인 줄 알았는데, 점점 다툼이 격해지는 것이었습니다("싸움 구경 불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는 말 아시죠? 사실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재미도 있었다는 점, 여기서 고백합니다. 오페라 취재하러 왔다가 이런 구경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박현준 단장은 '내가 50번도 더 참았다. 그만큼 해줬으면 양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오페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부린다'고 했고, 유인촌씨는 '그렇게 만들 거면 집에서 텔레비전 보지, 뭐 하러 오페라 보러 오겠느냐. 오페라가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안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오페라고 뭐고 다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계속 고성이 오가면서 거친 말도 나왔고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질 판이었습니다. 박현준 단장은 관객석 바깥 오페라 하우스 로비 쪽으로 나가 버렸고, 유인촌씨가 데리고 온 스태프 중 한 명은 박 단장을 뒤쫓아 한바탕 싸움을 벌일 기세였습니다.
급기야는 주위 사람들이 뜯어말리기에 이르렀고, 유인촌씨는 무대 뒤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연출자도 제작자도 없어졌으니 리허설이 계속 이어질 리 없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손 놓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두 사람은 공연 준비 기간 내내 여러 가지 문제로 대립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크린 얘기는 뭐예요?"
"무대에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해서, 주역이 아리아를 부르는 중요한 장면은 실시간으로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스크린에 쏴 준다는 거예요."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됐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이런 방식을 썼습니다. 그 때는 무대 양 옆에 스크린을 하나씩 설치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객석에서 보면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모습이 양쪽 스크린에도 비치는 겁니다.
이 스크린에는 자막도 넣었는데, 잘 보인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무대보다는 자꾸 스크린에 시선이 가서, 공연을 보는 맛이 떨어졌습니다.)
박현준 단장은 이 스크린을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유인촌씨는 반대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출자에게 상의 없이 박 단장 지시에 따라 리허설 중에 이 스크린 설치 작업이 시작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출자가 화를 냈고, 박 단장도 이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스크린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강 오페라단은 이 공연을 '색다른 시도를 하는 오페라', '대중과 가까운 오페라'로 홍보해왔습니다.
그래서 극중인물인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실제 누드 모델이 등장하고, 방송인 오미희씨가 해설자로 등장해서 중간중간 오페라 내용을 소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출자 유인촌씨는 역시 이에 대해서도 반대를 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홍보한 것과는 달리, 오미희씨는 출연을 하지 않기로 했고, 누드 모델도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대립이 있었을지, 알 만했습니다.
결국 그 날 리허설은 몇 시간 지나서야 다시 시작이 됐고, 두 사람의 갈등은 주변 사람들이 어찌어찌 설득해서 봉합되는 듯 보였습니다. 다음날, 일단 공연의 막은 올랐지만, 공연 이틀째 되는 날, 결국 유인촌씨는 '작품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연출자 없는 상태로 공연이 진행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공연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리 없습니다. 사실 '라보엠'은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한 유명 오페라이기 때문에, 언제 공연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관객은 드는 게 상례였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흥행에도 참패했을 뿐 아니라, 공연 자체의 평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라보엠 뿐만이 아닙니다. 올 가을에는 유난히 많은 오페라가 무대에 올라서 관심을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라보엠'을 비롯해 대부분의 오페라들이 혹평을 받으며, 그나마 좀 오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관객들을 도리어 쫓아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게다가 많은 졸작 오페라들이 서울시의 공연예술 지원 대상작으로 선정돼, 많게는 1억 5천만원까지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라보엠도 1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 오페라가 재미있으려면?
어떤 예술 분야에서든 연출가와 제작자의 대립은 흔히 있게 마련입니다. '재미있는 오페라'로 화제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제작자측과 정통적인 오페라를 고집하는 연출자측의 대립은 이렇게 보면 아주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라보엠의 경우, 좀 더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제작 대 연출'의 구도와는 조금 다른 모양새입니다.
'제작자'라고는 하지만 박현준 단장은 자신이 테너로 오페라에 출연하기도 하니까, 이른바 '오페라계(界)' 내부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인촌씨는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오히려 정통을 고집하는 쪽은 박현준 단장이고, 오페라를 처음 연출하는 유인촌씨가 색다른 시도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쪽이었어야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유인촌씨가 첫 연출이고, 또 외부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정통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을 거다 싶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재미있는 오페라' '대중과 가까운 오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자측의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과연 '재미있다'는 게 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페라에 누드 모델이 나오면 재미있을까요? 오페라 안 보던 사람들이 이 누드 모델 보러 몰려올까요?
물론 색다른 느낌은 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죠.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누구나(안 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사실상 청소년들까지도) 쉽게 야한 동영상을 구해 볼 수 있고, 성인용 인터넷 방송이 전성기를 누리는 시대에 오페라 무대에 누드 모델이 선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겠습니까?
누드 모델이 노래를 하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큰 무대 한 구석에 잠깐 서 있다 들어간다는 건데 말이죠. 사실 관객석에서 썩 잘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거기다 누드 모델이 오페라에 등장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3, 4년 전 쯤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자를 따로 두자는 것도 제게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극적인 오페라의 진행을 방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에게 미리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고 싶다면 프로그램 안내책자나 홍보 전단을 충실하게 제작하면 될 일입니다. 사실 안내책자의 질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재미'라는 것은 그런 지엽적인 요소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주변의 '잔재미'도 중요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공연의 질입니다.
가장 본질에 충실한 오페라가 가장 재미있는 오페라 아닐까요. 출연자들의 노래와 연기, 오케스트라의 반주, 그리고 무대와 의상 등 많은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최상의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죠.
* 화제 만들기에만 신경 써서야....
제게는 한강 오페라단측이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화제를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인촌씨를 연출자로 영입한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겠다는 생각입니다.
오페라단은 그래서 초창기 홍보에는 성공한 셈입니다. 실제로 공연 한 달 전부터 이 공연은 상당히 많은 언론들이 기사로 다뤘습니다. 유인촌씨 연출에, 누드 모델 출연에, 오미희씨 해설에,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의 오페라 무대 데뷔까지, 기사가 될 만한 요소가 다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홍보 컨셉은 그러나 연출자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은 채 미리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업에 합류한 유인촌씨의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오페라는 우왕좌왕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오미희씨의 해설과 누드 모델 출연에 관심을 갖고 갔던 관객들(저는 이런 사람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만)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오페라'가 돼 버렸고,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오페라를 잘 보러 다니는 관객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급기야 '라보엠'은 '연출자 철수'라는 불미스런 내용으로 신문지상을 장식했습니다. 게다가 박현준 단장의 형이 이끄는 한우리 오페라단도 얼마 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해 혹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라보엠'은 그러고 보면 올 가을 '졸작 오페라 사태'의 절정을 장식하고 만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우리 오페라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평소에는 별 활동도 없다가 지원금을 노려 1회성으로 오페라를 제작하는 단체들이 많다 보니, 오페라의 질 저하는 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성악가 수만큼 오페라단이 생길 거라고 냉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오페라를 정규 뉴스에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의 국내 첫 오페라 무대 데뷔에 초점을 맞춰, 제가 매주 금요일 출연하는 생방송 모닝와이드에서 소개하는 데 그쳤습니다.
사실 최승원씨는 무척 운이 나쁜 셈입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출연하는 오페라였는데 이렇게 됐으니 말입니다. 최승원씨는 199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쿨에서 우승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페라에는 출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외국에서는 몇 번 출연했었다고 합니다).
저는 리허설에서 최승원씨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불굴의 의지가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조금 아쉽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남자 주인공 '로돌포'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고려해서 동선도 완전히 새로 구성했어야 하는데, 별로 기존의 로돌포와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출자인 유인촌씨가 했어야 하는 일인데, 조금 바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흡했습니다.
최승원씨는 특히 움직임이 많은 부분에서 힘에 부치는 듯 보였습니다.
* 회생의 실마리 찾을까
얘기가 무척 길어졌습니다. 어찌 됐든 여러 가지 이유로, 근래 우리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빠진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주 오페라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예술의 전당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제대로 만드는 오페라마저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이번 페스티벌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제작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 그리고 베르디 오페라 '가면 무도회'가 선보입니다. '여자는 다 그래'로도 알려진 '코지 판 투테'는 소재 자체는 상투적인 느낌마저 드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지만,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과 희극적인 분위기가 색다른 작품입니다.
특히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솔리스트로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일 베이스 연광철씨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가면 무도회'는 예술의 전당이 직접 제작하는 작품입니다. 연출에 이소영씨, 무대 박동우씨라는 이름만 봐도 기본은 하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에서 더욱 유명한 조총련계 지휘자 김홍재씨가 지휘봉을 잡는다는 것도 관심을 끕니다.
이 작품은 베르디의 중기 걸작으로 꼽히는데, 비극으로 끝나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선율에 실려, 박진감있게 전개됩니다.
1년 전부터 기획됐고, 여러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주역을 선발했습니다. 테너 김영환씨를 비롯해 지난해 '토스카'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중국계 테너 워렌 목, 그리고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성화씨 등이 출연합니다.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역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문의전화 서울 580-1300입니다)
이 오페라들이 '누드 모델이 안 나와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여줄지 관심거리입니다. 제작자들은 모두 '열심히 만들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침체기에 빠진 한국 오페라가 이번 기회에 회생의 실마리를 찾게 되길 바랍니다.
김수현.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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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SBS뉴스넷의 허가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김수현 기자의 다른 글은 http://news.sbs.co.kr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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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리허설을 취재하러 갔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가 처음으로 서는 국내 오페라 무대이기도 해서, '얘기가 된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사 거리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날 취재 중에 당혹스런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 오페라 하우스의 싸움 구경
2막 리허설이 끝나고 연출자 유인촌씨와 인터뷰를 막 끝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제작자인 한강 오페라단 박현준 단장과 유인촌씨가 말다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에 설치하는 스크린 문제로 다투는 것처럼 보여서, 항상 있게 마련인 의견 차이 정도인 줄 알았는데, 점점 다툼이 격해지는 것이었습니다("싸움 구경 불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는 말 아시죠? 사실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지만, 재미도 있었다는 점, 여기서 고백합니다. 오페라 취재하러 왔다가 이런 구경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박현준 단장은 '내가 50번도 더 참았다. 그만큼 해줬으면 양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오페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부린다'고 했고, 유인촌씨는 '그렇게 만들 거면 집에서 텔레비전 보지, 뭐 하러 오페라 보러 오겠느냐. 오페라가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안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오페라고 뭐고 다 그만두자'고 했습니다.
계속 고성이 오가면서 거친 말도 나왔고 몸싸움으로까지 이어질 판이었습니다. 박현준 단장은 관객석 바깥 오페라 하우스 로비 쪽으로 나가 버렸고, 유인촌씨가 데리고 온 스태프 중 한 명은 박 단장을 뒤쫓아 한바탕 싸움을 벌일 기세였습니다.
급기야는 주위 사람들이 뜯어말리기에 이르렀고, 유인촌씨는 무대 뒤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연출자도 제작자도 없어졌으니 리허설이 계속 이어질 리 없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손 놓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두 사람은 공연 준비 기간 내내 여러 가지 문제로 대립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크린 얘기는 뭐예요?"
"무대에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해서, 주역이 아리아를 부르는 중요한 장면은 실시간으로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스크린에 쏴 준다는 거예요."
(얼마 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됐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이런 방식을 썼습니다. 그 때는 무대 양 옆에 스크린을 하나씩 설치했었습니다. 그러니까 객석에서 보면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모습이 양쪽 스크린에도 비치는 겁니다.
이 스크린에는 자막도 넣었는데, 잘 보인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무대보다는 자꾸 스크린에 시선이 가서, 공연을 보는 맛이 떨어졌습니다.)
박현준 단장은 이 스크린을 설치하자고 주장했고, 유인촌씨는 반대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출자에게 상의 없이 박 단장 지시에 따라 리허설 중에 이 스크린 설치 작업이 시작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출자가 화를 냈고, 박 단장도 이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 스크린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한강 오페라단은 이 공연을 '색다른 시도를 하는 오페라', '대중과 가까운 오페라'로 홍보해왔습니다.
그래서 극중인물인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는 실제 누드 모델이 등장하고, 방송인 오미희씨가 해설자로 등장해서 중간중간 오페라 내용을 소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출자 유인촌씨는 역시 이에 대해서도 반대를 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홍보한 것과는 달리, 오미희씨는 출연을 하지 않기로 했고, 누드 모델도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대립이 있었을지, 알 만했습니다.
결국 그 날 리허설은 몇 시간 지나서야 다시 시작이 됐고, 두 사람의 갈등은 주변 사람들이 어찌어찌 설득해서 봉합되는 듯 보였습니다. 다음날, 일단 공연의 막은 올랐지만, 공연 이틀째 되는 날, 결국 유인촌씨는 '작품에서 손을 떼겠다'고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연출자 없는 상태로 공연이 진행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공연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리 없습니다. 사실 '라보엠'은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한 유명 오페라이기 때문에, 언제 공연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관객은 드는 게 상례였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흥행에도 참패했을 뿐 아니라, 공연 자체의 평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라보엠 뿐만이 아닙니다. 올 가을에는 유난히 많은 오페라가 무대에 올라서 관심을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라보엠'을 비롯해 대부분의 오페라들이 혹평을 받으며, 그나마 좀 오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관객들을 도리어 쫓아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게다가 많은 졸작 오페라들이 서울시의 공연예술 지원 대상작으로 선정돼, 많게는 1억 5천만원까지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도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습니다(라보엠도 1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 오페라가 재미있으려면?
어떤 예술 분야에서든 연출가와 제작자의 대립은 흔히 있게 마련입니다. '재미있는 오페라'로 화제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제작자측과 정통적인 오페라를 고집하는 연출자측의 대립은 이렇게 보면 아주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라보엠의 경우, 좀 더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제작 대 연출'의 구도와는 조금 다른 모양새입니다.
'제작자'라고는 하지만 박현준 단장은 자신이 테너로 오페라에 출연하기도 하니까, 이른바 '오페라계(界)' 내부의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인촌씨는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 오히려 정통을 고집하는 쪽은 박현준 단장이고, 오페라를 처음 연출하는 유인촌씨가 색다른 시도를 하겠다고 고집하는 쪽이었어야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유인촌씨가 첫 연출이고, 또 외부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정통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을 거다 싶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재미있는 오페라' '대중과 가까운 오페라'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자측의 이야기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과연 '재미있다'는 게 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페라에 누드 모델이 나오면 재미있을까요? 오페라 안 보던 사람들이 이 누드 모델 보러 몰려올까요?
물론 색다른 느낌은 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죠. 요즘처럼 인터넷에서 누구나(안 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사실상 청소년들까지도) 쉽게 야한 동영상을 구해 볼 수 있고, 성인용 인터넷 방송이 전성기를 누리는 시대에 오페라 무대에 누드 모델이 선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겠습니까?
누드 모델이 노래를 하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큰 무대 한 구석에 잠깐 서 있다 들어간다는 건데 말이죠. 사실 관객석에서 썩 잘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거기다 누드 모델이 오페라에 등장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3, 4년 전 쯤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자를 따로 두자는 것도 제게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극적인 오페라의 진행을 방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에게 미리 내용을 자세히 알려주고 싶다면 프로그램 안내책자나 홍보 전단을 충실하게 제작하면 될 일입니다. 사실 안내책자의 질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것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재미'라는 것은 그런 지엽적인 요소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주변의 '잔재미'도 중요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공연의 질입니다.
가장 본질에 충실한 오페라가 가장 재미있는 오페라 아닐까요. 출연자들의 노래와 연기, 오케스트라의 반주, 그리고 무대와 의상 등 많은 요소들이 한데 어울려 최상의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죠.
* 화제 만들기에만 신경 써서야....
제게는 한강 오페라단측이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화제를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유인촌씨를 연출자로 영입한 것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겠다는 생각입니다.
오페라단은 그래서 초창기 홍보에는 성공한 셈입니다. 실제로 공연 한 달 전부터 이 공연은 상당히 많은 언론들이 기사로 다뤘습니다. 유인촌씨 연출에, 누드 모델 출연에, 오미희씨 해설에,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의 오페라 무대 데뷔까지, 기사가 될 만한 요소가 다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홍보 컨셉은 그러나 연출자의 의사는 고려하지 않은 채 미리 결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작업에 합류한 유인촌씨의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오페라는 우왕좌왕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오미희씨의 해설과 누드 모델 출연에 관심을 갖고 갔던 관객들(저는 이런 사람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만)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오페라'가 돼 버렸고,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 오페라를 잘 보러 다니는 관객들을 끌어들이지도 못했습니다.
급기야 '라보엠'은 '연출자 철수'라는 불미스런 내용으로 신문지상을 장식했습니다. 게다가 박현준 단장의 형이 이끄는 한우리 오페라단도 얼마 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해 혹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라보엠'은 그러고 보면 올 가을 '졸작 오페라 사태'의 절정을 장식하고 만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우리 오페라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평소에는 별 활동도 없다가 지원금을 노려 1회성으로 오페라를 제작하는 단체들이 많다 보니, 오페라의 질 저하는 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성악가 수만큼 오페라단이 생길 거라고 냉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오페라를 정규 뉴스에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장애인 테너 최승원씨의 국내 첫 오페라 무대 데뷔에 초점을 맞춰, 제가 매주 금요일 출연하는 생방송 모닝와이드에서 소개하는 데 그쳤습니다.
사실 최승원씨는 무척 운이 나쁜 셈입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출연하는 오페라였는데 이렇게 됐으니 말입니다. 최승원씨는 1993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쿨에서 우승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오페라에는 출연할 기회가 없었거든요(외국에서는 몇 번 출연했었다고 합니다).
저는 리허설에서 최승원씨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 불굴의 의지가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조금 아쉽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남자 주인공 '로돌포'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고려해서 동선도 완전히 새로 구성했어야 하는데, 별로 기존의 로돌포와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출자인 유인촌씨가 했어야 하는 일인데, 조금 바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흡했습니다.
최승원씨는 특히 움직임이 많은 부분에서 힘에 부치는 듯 보였습니다.
* 회생의 실마리 찾을까
얘기가 무척 길어졌습니다. 어찌 됐든 여러 가지 이유로, 근래 우리 오페라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빠진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주 오페라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예술의 전당은 걱정이 태산입니다. 제대로 만드는 오페라마저 관객의 외면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입니다.
이번 페스티벌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제작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 그리고 베르디 오페라 '가면 무도회'가 선보입니다. '여자는 다 그래'로도 알려진 '코지 판 투테'는 소재 자체는 상투적인 느낌마저 드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지만,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음악과 희극적인 분위기가 색다른 작품입니다.
특히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솔리스트로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일 베이스 연광철씨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가면 무도회'는 예술의 전당이 직접 제작하는 작품입니다. 연출에 이소영씨, 무대 박동우씨라는 이름만 봐도 기본은 하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에서 더욱 유명한 조총련계 지휘자 김홍재씨가 지휘봉을 잡는다는 것도 관심을 끕니다.
이 작품은 베르디의 중기 걸작으로 꼽히는데, 비극으로 끝나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선율에 실려, 박진감있게 전개됩니다.
1년 전부터 기획됐고, 여러 차례의 오디션을 거쳐 주역을 선발했습니다. 테너 김영환씨를 비롯해 지난해 '토스카'에서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던 중국계 테너 워렌 목, 그리고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엄성화씨 등이 출연합니다.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역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문의전화 서울 580-1300입니다)
이 오페라들이 '누드 모델이 안 나와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오페라의 진면목을 보여줄지 관심거리입니다. 제작자들은 모두 '열심히 만들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침체기에 빠진 한국 오페라가 이번 기회에 회생의 실마리를 찾게 되길 바랍니다.
김수현.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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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SBS뉴스넷의 허가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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