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두번의 기립박수 이야기
예술의 전당에 물어보니 아주 아슬아슬하게 공연 취소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전날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를 못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런던 필 쪽에서는 급히 아시아 지역에서 '공수해 올 수 있는' 마에스트로급의 지휘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찾아보니 볼프강 자발리쉬, 사이먼 래틀, 유리 테미르카노프, 이렇게 3명이 아시아 지역에 있었다는군요.
* 아주 훌륭한 대타(代打)!
이 중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일본 공연 중이었는데 마침 이 날은 공연이 없어서 한국으로 날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대타' 제의를 받아들이기는 사실 어려운데, 런던 필의 매니저가 유리 테미르카노프와 개인적 친분이 있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합니다. 섭외가 안 되면 공연이 취소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쿠르트 마주어는 사실 이번 투어가 끝나면 장기이식 수술을 받을 예정으로, 공연 전에도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다고 알려졌었습니다. 첫날 공연을 본 사람들도 쿠르트 마주어가 왼손을 거의 쓰지 않고 지휘했다고 전했습니다. 저는 첫날 쿠르트 마주어의 지휘를 보지 못한 게 아쉽기는 했지만, 저로서는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지휘를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 또 다른 기대감을 갖고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로비는 엄청난 인파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술의 전당측에서는 쿠르트 마주어 불참으로 환불 사태를 걱정했었지만, 20여명 정도가 환불을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장영주 때문에 온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또는 지휘자가 누구이든 런던 필 자체를 보러 왔든지.* 역시 명불허전이라…
공연을 시작하기 전, 런던 필의 매니저는 무대에 나와 쿠르트 마주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오늘 연주를 함께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흔쾌히 지휘를 승낙한 유리 테미르카노프에게 감사한다. 언젠가 다시 한국 관객들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며 마에스트로의 빠른 회복을 기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공연 전반부는 장영주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협연이었습니다. 장영주는 몰라보게 성숙한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올해 스무 살이라니, 이제 정말 숙녀 티가 나더군요. 자신감 있는 연주 모습도 여전했습니다. 이 날 장영주는 신동에서 성인 연주자로 고국에서 훌륭한 신고식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대가 너무 컸던지,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은 장영주가 어릴 때부터 수없이 해온 곡이라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1악장에서 2악장, 그리고 3악장으로 갈수록 나아지긴 했지만, 감정 표현이 과잉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곳도 있었고, 또 가끔 음정이 불안한 것도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쉬움은 공연의 후반부에서 완전히 해소됐습니다. 연주곡목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이었습니다. 원래는 슈만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을 연주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지휘자가 교체되면서 프로그램이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런던 필과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슬라브적인 감성과 웅대한 기상이 넘치는 이 곡에서 뛰어난 연주를 보여줬습니다. 이 곡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금관악기 군은 빛나는 음색을 자랑했고, 현악기들도 훌륭한 연주를 들려줬습니다. 원곡 자체가 좋기도 하지만, 웅장한 피날레를 향해 한치의 어긋남 없이 나아가는 견고한 구성은 정말 빼어났습니다. 갑자기 지휘자와 프로그램이 바뀌어 맞춰볼 시간도 별로 없었을 텐데 저런 연주를 들려줄 수 있다니 감탄스러웠습니다. 역시 런던 필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사람인 유리 테미르카노프는 두말할 것 없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장기 아니겠습니까. 정말 기립박수가 아깝지 않은 연주였습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훌륭한 음악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앵콜이 없었던 게 아쉽긴 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객석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로비에 나오니 예술의 전당 관계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지휘자가 갑자기 교체됐지만, 연주가 좋고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고들 하고 있었습니다.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비자 발급을 위해(한국 비자 발급 받아야죠, 거기다 일본 비자도 단수 비자라서 또다시 받아야죠. 원래는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안 되는 걸 긴급으로 되게 하느라 문화부 관계자들까지 동원돼 진땀을 흘렸다고 들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초조해하던 기억은 멀리 달아난 듯, 모두 행복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틀 다 공연을 본 사람들은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르트 마주어와 유리 테미르카노프를 다 볼 수 있었으니, 이런 기회가 앞으로 또 있겠습니까. 아, 다행히 쿠르트 마주어는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고 하는군요. 런던 필은 역시 훌륭했습니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공연이었습니다.* 라트비아 아줌마 만세!
두 번째 기립박수는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공연에서였습니다. 이네사 갈란테는 올해 48살, 라트비아 출신의 성악가입니다. 라트비아가 구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인 1992년에야 비로소 서방 세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공연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명성이 높아진 결정적인 계기는 1996년에 낸 '데뷔'라는 음반이었습니다. 이 음반은 당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체칠리아 바르톨리, 마리아 칼라스, 제니퍼 라모어 등 명가수들의 앨범을 제치고 클래식 음반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여기 실린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는 곡 하나만으로도 이네사 갈란테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이네사 갈란테가 부른 이 곡은 SBS의 드라마 '순자'에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었습니다. 비록 드라마 자체는 욕도 많이 먹었지만, 이 음악만은 많은 사람들이 무슨 곡일까 궁금해 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그리 많이 불려지던 노래가 아니었지만, 이네사 갈란테 이후, 많은 소프라노들이--레슬리 가렛, 조수미, 그리고 소녀 소프라노 샬롯 처치 등이-- 이 곡을 음반으로 냈습니다. 이네사 갈란테의 목소리는 단단하고 정갈합니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니면서도 때로는 가볍게 비상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온갖 세속의 소리에 찌든 귀를 씻어주는 듯한 청량감을 안겨줍니다. 지난달 2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이네사 갈란테의 독창회는 이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공연이었습니다.
주로 러시아 작곡가들의 가곡들로 짜였던 1부 프로그램은 한국인 관객들에게 그리 익숙한 곡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목소리는 빛났습니다. 게다가 이네사 갈란테는 한 곡 한 곡 하기 전에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풍부한 감성이 묻어나는 설명 때문에 관객들은 음악에 좀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시작된 2부는 친숙한 곡들이 많아서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개인 날, 내 이름은 미미, 정결한 여신, 보석의 노래 등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들이 불려졌습니다.
이네사 갈란테는 마치 오페라에 출연한 것처럼, 연기까지 하면서 노래했습니다. 관객들은 그의 인도에 따라, 푸치니에서 벨리니로, 또 구노로 음악여행을 떠났습니다.
앵콜 곡으로는 알비노니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거쉰의 '서머 타임'을 들려주더니, 마지막으로는 '그리운 금강산'을 들고 나왔습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대단했습니다.
악보를 보면서 하기는 했지만, 우리말 발음도 꽤 연습을 한 듯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이 끝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객들이 일어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이 중에 껴 있었던 건 물론입니다.
* 무던한 '라트비아 아줌마'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늦게 공연장에 들어오는 관객들 때문에 소음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조심조심 소리 내지 않고 들어왔으면 좋으련만, 문을 꽝 닫지를 않나, 큰 소리 내며 의자를 내리질 않나, 듣는 제가 조마조마할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노래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하고, 앵콜 곡을 할 때는 전화벨이 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 많은 아티스트들이 대부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네사 갈란테는 1부 중간에 갑자기 무대 뒤로 퇴장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나왔는데, 분위기가 너무 어수선해서 화가 났다 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물어 보니 입안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1부가 끝난 뒤 휴식 시간에 저는 공연장 매니저에게 '중간에 관객을 입장시키지 않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었습니다. 그러자 매니저 말이, '늦게 오는 사람도 내가 멘트 할 동안에는 얼마든지 입장시켜도 좋다'는 이네사 갈란테의 말에 따라 계속 들여보냈다는 겁니다. 이네사 갈란테라는 아줌마, 굉장히 무던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네사 갈란테의 이번 공연은 '장사가 썩 잘 된' 공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이번 공연이 좋았다는 입소문이 퍼져서, 공연 기획사측은 내년에 한 번 더 공연을 주최할 예정입니다. 이네사 갈란테는 공연 외에도 음반 홍보, 행사 출연 등을 위해 1주일 정도 머물렀는데, 이번 내한 일정이 만족스러웠던지,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김수현. shkim@sbs.co.kr ------------------------------------------------------------------ * 이 글은 SBS뉴스넷의 허가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김수현 기자의 다른 글은 http://news.sbs.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