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피아노를 바꾼 이유
 백건우의 포레(2).jpg)
제가 이전에 실었던 글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 차원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날 공연감상에 “무대위에 피아노가 2대 있더라”고 말씀드렸죠? 그부분에 대한 백씨의 설명은 이랬습니다.
* 소리가 아닌 소리를 내야
라벨의 피아노협주곡은 아주 독특한 피아노소리를 요구한다고 합니다. 피아노 음색이 너무 명확해도 안되고, 흐릿해서도 안된다는 거죠. 다소 몽환적이면서도 알맹이가 있는 소리가 필요했답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피아노는 두 대. 백씨는 이 가운데 음색이 좀 더 밝은 것을 골라 약간 소리를 눌러서 내려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라벨의 피아노협주곡 2악장은 ‘어떻게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을 연주할 때는 한마디로 ‘소리가 아닌 소리’를 내야 합니다.” 공연날 앵콜곡으로 연주한 가브리엘 포레의 무언가 얘기도 나왔습니다. 백건우씨는 편안하고 행복하고, 포옹해주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그냥 이유없이 이 곡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연주회때마다 앵콜곡으로 자주 연주한다나요. 받아적으면서 ‘편안하고’ ‘행복하고’ ‘포옹해주는 듯한’ ‘그냥 이유없이 좋다’는 말을 다시 곱씹어봤습니다. 이 곡이 주는 느낌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들을 골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또다른 프랑스 작곡가인 뿔랑이 에디뜨 피아프에게 헌정했다는 소품도 백건우씨의 연주로 방송됐습니다. 뿔랑은 “일반적으로 자연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다른 프랑스 작곡가들에 비해 대단히 도회적이며 살롱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게 백건우씨의 설명이었습니다. 드뷔시의 달빛,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도 방송됐습니다. (시간 관계상 라벨 왼손협주곡은 일부만 방송됐습니다.) 백건우씨는 “이 곡들은 나도 오래전에 녹음해놓고 도통 들어보질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왼손을 위한 협주곡 또는 다른 라벨의 피아노곡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은 연주회에 갔던 청중으로서 상당히 아쉬운 점이었는데, 이 부분을 백씨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라벨 전곡연주로 인해 라벨 스페셜리스트로 이미지가 굳어지자 세계 각국에서 주로 라벨 연주섭외만 들어오더랍니다. 줄리어드를 나와서 세계무대에 뛰어든 다음에는 드뷔시 등을 늘 쳤답니다. 그런데 반복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을 스스로 흉내내게 되더라는군요. 음악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예술이어야 하는데…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은 의도적으로 같은 곡을 자주 반복연주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왼손협주곡..오른손은 어떻게?
왼손협주곡에 관해서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원래 왼손협주곡은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라벨이 작곡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른팔이 ‘있는’ 피아니스트 입장에서는 실제 연주상황에서 좀 애매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바로 오른팔의 처리 문제입니다. 대중음악 가수라면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거나 허공에 휘두르며 손짓을 한다거나 뭐 방법이 있겠지만 아닌게아니라 참 애매하겠죠. 연주경험을 통해 백건우씨가 터득한 노하우는 이렇답니다. ‘의자를 조금 오른쪽, 위쪽으로 앉는다. 그래야 왼손의 위치를 잡기가 좋다’ ‘때로는 오른손으로 피아노 우측끝을 잡아준다. 그러면 스케일 연주 등을 할 때 몸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다.’ 다음에 라이브 연주를 볼 기회가 있으면 피아니스트의 오른손 처리법도 유심히 봐야겠습니다. 세종대강당 연주회에서 협연을 했던 파리 앙상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존 넬슨은 알고보니 백건우씨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더군요. 줄리어드 시절부터 잘 아는 선배였답니다. 당시 줄리어드는 모든 기악 전공학생들에게 오케스트라 연습을 통해 앙상블 훈련을 하도록 요구했답니다. 피아노의 경우는 오케스트라에 낄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합창을 시켰다네요. 백건우씨는 베이스였는데 이때 합창지휘자가 존 넬슨이었답니다. 이후 프랑스에서 다시 만나 오랜기간 같이 연주활동을 해 왔다고 합니다. 대화는 이윽고 다시 그의 신보 얘기로 이어졌습니다. 포레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답니다. 그는 ‘포레가 드뷔시,라벨의 명성에 묻혀서 덜 알려져 있지만, 누구보다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음반의 녹음은 영국의 ‘스완지’라는 곳에서 했답니다. 해변가 마을인데 시인 딜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으로,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어 연주에 도움이 됐다는군요. 이번에 수록된 곡들은 매우 아름다운 작품들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 피아노, 녹음장비, 홀 등에 대해 모두가 고민을 많이 했으며, 결과가 좋아 기쁘다’는 것이 백건우씨의 자평입니다. 여기 실린 ‘즉흥곡’ 은 너무나 짧으면서도 아기자기해서 스스로도 재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곡이랍니다. 여러분들도 그의 자평에 동의할 수 있는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음반의 자켓사진 얘깁니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다름아닌 부인 윤정희씨랍니다. 윤정희씨는 오래전부터 백건우씨의 얼굴 사진을 찍어왔답니다. 이번 음반발매를 위해 프랑스와 스위스의 유명 사진작가들이 많이 동원돼 작업을 했다는데, 백건우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결국 자기네가 보고 싶은 내 얼굴을 찍더라. 내마음엔 별로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오래전부터 계속 찍어온 와이프가 내 얼굴을 제일 잘 알더군요. 원래의 내 얼굴을 잘 잡아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