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음반소개를 하다 말았지요? 한 글에 첨부할 수 있는 그림화일 갯수 제한이 다섯개여서, 부득이하게 글을 두개로 나누게 됐습니다.
우선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 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이 연주를 듣고 있으면 떠오르는 단어는 시정(詩精)입니다. 루빈슈타인의 연주는 초인적인 기교를 바탕으로 숨막힐듯 몰아가는 리히터에 비하면 약간 느슨한 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촉촉하고 풍성한 서정미는 정말 뛰어납니다. 은쟁반 위의 옥구슬처럼 굴러다디는 루빈슈타인의 터치는 힘,폭발력, 다이내믹 등의 단어를 잊게 만듭니다. 특히 눈물이 날만큼 아름다운 2악장은 그의 쇼팽 녹턴을 생각나게 합니다.
3악장과 피날레는 무리하게 서두르는 느낌 없이 시종여일한 페이스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라이너-시카고 심포니의 중량감있는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루빈슈타인을 적절히 서포트하면서도 좋은 대조를 이뤄 무게와 힘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루빈슈타인과 프리츠 라이너 콤비는 어떤 면에선 두사람의 이름만 듣고도 나올 음악이 짐작될만한 조합이랄 수 있겠는데, 때로는 아직 낯선 이름의 젊은 연주자들이 노대가 찜쪄먹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은 전설이 돼버린 노대가들도 한때는 신진기예요,후기지수였지요.
그래서 추천드리고 싶은 음반은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과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악단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브론프만은 58년생으로, 구소련 타쉬켄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누이는 바이올리니스트이고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음악가족의 일원입니다. 브론프만 가족은 그가 15살때인 1973년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합니다. 그해에 유진 이스토민과 주빈 메타에게 발탁되었고 2년뒤 주빈 메타- 몬트리올 심포니와 협연하여 데뷰합니다.
74년에는 미국-이스라엘 문화재단의 장학금을 획득하여 아이작스턴 사단이 됩니다. 그래서 75년에는 미국에 데뷔를 하게 되죠. 미국에서는 줄리아드와 커티스 등을 다니며 레온 플라이셔,루돌프 제르킨을 사사했습니다. 89년에 브론프만은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주로 Sony Classical을 통해 음반을 내고 있습니다.
다소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그가 러시아 피아니즘과 유태계-미국계 연주스타일을 한몸에 갖고 있는 독특한 연주자임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음번에 말씀드릴 라흐마니노프 피협3번의 음반소개에서도 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은 브론프만과 58년 개띠 동갑입니다. 핀란드 헬싱키 태생으로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배웠고, 애초에는 작곡가로 음악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 이래 스웨덴 라디오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런던필의 객원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92년 10월부터는 LA필의 지휘도 맡았습니다.
살로넨은 본란에서도 소개한 바 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 소개할 안토니오 파파노, 크리스토퍼 슈펄링 등과 함께 지금 세계음악계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는 신예지휘자입니다. (58년 개띠면 우리나라 기업에선 노인취급 받기 시작하는 나이인데, 클래식음악계는 역시 노인정인가봅니다. :P)
음악을 듣다보면 재미있는 것은 연주자 또는 지휘자의 나이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선입견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게 설익은 풋냄새를 동반하느냐 아니면 출하직전의 농익은 향을 동반하느냐가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 살로넨과 브론프만의 연주에서는 젊은 세대다운 신선함, 그리고 번뜩이는 힘과 기교를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젊은이답지 않은 노련함과 절제, 조형미속에 잘 갈무리되어 있다는 점이 이들의 뛰어난 점입니다. 녹음도 상당히 우수합니다. 1990년 10월 5일부터 8일까지 런던의 애비 로드(Abbey Road)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 소니의 20비트 SBM 매스터링을 거쳐 92년에 발매되었습니다
녹음과 연주 모두 우수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으로 백건우의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템포를 다소 느리게 잡고 서정성을 극대화하는, 지향성이 분명한 연주입니다. 리히터류와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백건우는 꿈꾸듯 아름답게 선율을 풀어가면서도 고음의 영롱함과 저음의 깊은 울림 모두를 살리는 다채로운 터치를 선보입니다.
오케스트라는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Vladimir Fedoseyev) 지휘의 모스크바 라디오심포니입니다. 페도세예프는 악보를 눈앞에 펼쳐보여주듯 각 파트가 귀에 솔솔 들어오도록 하면서도 전체의 큰 흐름을 유장하게 리드합니다.
3악장 마지막 코다에서는 갑자기 가속을 했다가 아주 무겁게 끝을 내서 액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RCA의 녹음도 생기가 있습니다.
백건우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을 두장으로 녹음했는데, 2번은 1번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2번이 트랙 1,2,3이고 1번은 그 뒤에 나온다는 점이 고객지향적이라고 해야 할까..아무튼 특색입니다.
마지막으로, 카라얀과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의 연주를 소개합니다. 남이 자기를 타고 넘는 꼴을 못보는 카라얀이어서, 그의 협주곡 음반은 항상 독주자와의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것 같습니다.
독주자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는 80년대 음악동아의 피아니스트 특집부록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피아니스트'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는데, 이 음반(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이 같이 들어있습니다.)을 듣다보면 괜찮은 수식어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얀의 베를린필은 명불허전, 역시 대단합니다. 거칠고 포효하는 듯한 사운드에서 섬세하고 관능적인 부드러운 패시지까지, 그 변신의 폭은 따라올 자가 없을 듯합니다. 2악장의 현악군 프레이징은 카라얀의 말러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바이젠베르크는 이런 난적(?)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탄탄한 조형미와 화려한 음색으로 응수하고 있습니다. 백건우-페도세예프 연주와는 대척점에 세울만한 외향적이고 강력한 라흐피협입니다. 대신 바이젠베르크의 피아노에 때로는 좀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약간은 남습니다.
오늘 글에 소개한 4가지 모두 제가 보기는 별다섯개 짜리들입니다. 본인 취향과 함께 커플링된 다른 수록곡들을 고려하여 수집해 보시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번에는 애초 리뷰 대상이었던 예당의 음반 둘째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다뤄보겠습니다.
이현식.hyunsik@sbs.co.kr
3악장과 피날레는 무리하게 서두르는 느낌 없이 시종여일한 페이스로 마무리하고 있어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라이너-시카고 심포니의 중량감있는 오케스트라 사운드는 루빈슈타인을 적절히 서포트하면서도 좋은 대조를 이뤄 무게와 힘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루빈슈타인과 프리츠 라이너 콤비는 어떤 면에선 두사람의 이름만 듣고도 나올 음악이 짐작될만한 조합이랄 수 있겠는데, 때로는 아직 낯선 이름의 젊은 연주자들이 노대가 찜쪄먹는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은 전설이 돼버린 노대가들도 한때는 신진기예요,후기지수였지요.
그래서 추천드리고 싶은 음반은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과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악단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브론프만은 58년생으로, 구소련 타쉬켄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누이는 바이올리니스트이고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음악가족의 일원입니다. 브론프만 가족은 그가 15살때인 1973년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합니다. 그해에 유진 이스토민과 주빈 메타에게 발탁되었고 2년뒤 주빈 메타- 몬트리올 심포니와 협연하여 데뷰합니다.
74년에는 미국-이스라엘 문화재단의 장학금을 획득하여 아이작스턴 사단이 됩니다. 그래서 75년에는 미국에 데뷔를 하게 되죠. 미국에서는 줄리아드와 커티스 등을 다니며 레온 플라이셔,루돌프 제르킨을 사사했습니다. 89년에 브론프만은 미국시민권을 획득했습니다. 주로 Sony Classical을 통해 음반을 내고 있습니다.
다소 장황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그가 러시아 피아니즘과 유태계-미국계 연주스타일을 한몸에 갖고 있는 독특한 연주자임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음번에 말씀드릴 라흐마니노프 피협3번의 음반소개에서도 등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은 브론프만과 58년 개띠 동갑입니다. 핀란드 헬싱키 태생으로 시벨리우스 아카데미에서 배웠고, 애초에는 작곡가로 음악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 이래 스웨덴 라디오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런던필의 객원으로 활동해 왔습니다. 92년 10월부터는 LA필의 지휘도 맡았습니다.
살로넨은 본란에서도 소개한 바 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 소개할 안토니오 파파노, 크리스토퍼 슈펄링 등과 함께 지금 세계음악계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는 신예지휘자입니다. (58년 개띠면 우리나라 기업에선 노인취급 받기 시작하는 나이인데, 클래식음악계는 역시 노인정인가봅니다. :P)
 라흐피협 2-3 브론프만-살로넨.jpg)
음악을 듣다보면 재미있는 것은 연주자 또는 지휘자의 나이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선입견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게 설익은 풋냄새를 동반하느냐 아니면 출하직전의 농익은 향을 동반하느냐가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 살로넨과 브론프만의 연주에서는 젊은 세대다운 신선함, 그리고 번뜩이는 힘과 기교를 엿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젊은이답지 않은 노련함과 절제, 조형미속에 잘 갈무리되어 있다는 점이 이들의 뛰어난 점입니다. 녹음도 상당히 우수합니다. 1990년 10월 5일부터 8일까지 런던의 애비 로드(Abbey Road)스튜디오에서 녹음되어, 소니의 20비트 SBM 매스터링을 거쳐 92년에 발매되었습니다
녹음과 연주 모두 우수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으로 백건우의 것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템포를 다소 느리게 잡고 서정성을 극대화하는, 지향성이 분명한 연주입니다. 리히터류와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라흐 백건우.jpg)
백건우는 꿈꾸듯 아름답게 선율을 풀어가면서도 고음의 영롱함과 저음의 깊은 울림 모두를 살리는 다채로운 터치를 선보입니다.
오케스트라는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Vladimir Fedoseyev) 지휘의 모스크바 라디오심포니입니다. 페도세예프는 악보를 눈앞에 펼쳐보여주듯 각 파트가 귀에 솔솔 들어오도록 하면서도 전체의 큰 흐름을 유장하게 리드합니다.
3악장 마지막 코다에서는 갑자기 가속을 했다가 아주 무겁게 끝을 내서 액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RCA의 녹음도 생기가 있습니다.
백건우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을 두장으로 녹음했는데, 2번은 1번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2번이 트랙 1,2,3이고 1번은 그 뒤에 나온다는 점이 고객지향적이라고 해야 할까..아무튼 특색입니다.
마지막으로, 카라얀과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의 연주를 소개합니다. 남이 자기를 타고 넘는 꼴을 못보는 카라얀이어서, 그의 협주곡 음반은 항상 독주자와의 사이에 불꽃이 튀기는 것 같습니다.
독주자인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는 80년대 음악동아의 피아니스트 특집부록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피아니스트'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는데, 이 음반(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이 같이 들어있습니다.)을 듣다보면 괜찮은 수식어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라얀의 베를린필은 명불허전, 역시 대단합니다. 거칠고 포효하는 듯한 사운드에서 섬세하고 관능적인 부드러운 패시지까지, 그 변신의 폭은 따라올 자가 없을 듯합니다. 2악장의 현악군 프레이징은 카라얀의 말러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바이젠베르크는 이런 난적(?)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탄탄한 조형미와 화려한 음색으로 응수하고 있습니다. 백건우-페도세예프 연주와는 대척점에 세울만한 외향적이고 강력한 라흐피협입니다. 대신 바이젠베르크의 피아노에 때로는 좀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약간은 남습니다.
오늘 글에 소개한 4가지 모두 제가 보기는 별다섯개 짜리들입니다. 본인 취향과 함께 커플링된 다른 수록곡들을 고려하여 수집해 보시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번에는 애초 리뷰 대상이었던 예당의 음반 둘째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다뤄보겠습니다.
이현식.hyunsik@sb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