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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개척한 이후 사람들은 혹시 한국영화가 기형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닌가 하며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걱정이 단순한 기우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실상 최근의 영화경향을 살펴보건대 특정한 경향과 장르에 치우친 영화 기획들이 난무하는 모습들에서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이란』은 현재의 한국영화 흐름 속에서 조금은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품이며 한번쯤 감상해 보고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할 작품일 것입니다. 오늘은 두 장의 디스크에 영화 본편과 부록영상이 가득 담겨진 신작 『파이란』을 간단히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제품정보

- 제작사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화면 : 1.85:1
- 음향 : 한국어 DTS 5.1, DD 5.1, DD 2.0
- 자막 : 한국어, 영어
- 디스크 : 단면 더블레이어 (2디스크 세트)
- 제작년도 : 2001년
- DVD발행년도 : 2002년
- 상영시간 : 116분
- 등급 : 15세 이상
- 지역코드 : 3번
- 감독 : 송해성
- 배우 : 최민식, 공형진, 장백지, 등

2. 영상 및 음향

본 작품의 영상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면은 선명하고 잡티들도 크게 눈의 띄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잘한 잡티들이 쉽게 발견되기는 합니다.) 해상도가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영화의 흐름상 따뜻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다른 우리 나라 영화들의 DVD화질에 비해서는 우수한 수준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평가를 하자면 5점 만점에 3.5점을 주고 싶습니다.

영식과 강재. 시작은 같았으나 끝은 다르다.

음향은 무난한 수준입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다채널의 입체음향을 발휘한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닷소리를 비롯한 음향효과에서 채널분리도를 느낄 수 있으며 센터채널의 대사도 명확합니다. 음향과는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기는 하지만 영어자막의 경우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강재와 동수의 대화 속에서는 비속어가 난무하는데 그러한 말들은 둘이 처한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자막 속의 영어는 원론적인 수준 이상을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어가 다를 경우 이방인 관객이 느끼게 되는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이 자막에 의해 얼마나 틀려질 수 있는가는 이런 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평가를 하자면 5점 만점에 3점을 주고 싶습니다.

3. 영화적 완성도

저는 처음 직장에 들어가 일년간 생활하면서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팀의 과장님은 "이 세상에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아가는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실상은 많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같은 하늘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위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다를까요 ?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은 듯도 합니다.

이강재(최민식)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며 그것도 나쁜 의미에서 평범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가난한 고향을 떠나 배한척 몰고 금의환양하리라 생각했던 어린 건달은 친구가 조직의 보스에 오르는 동안 여전히 조직의 아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친구이자 보스의 말대로 체질 때문인지 아니면 능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삶이 형편없을 정도로 한심한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그의 이런 남루한 일상을 묵묵하게 보여줍니다.

파이란역을 잘 소화한 장백지

파이란(장백지)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이모가 살고 있는 한국에 오지만 이모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없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 선 그녀에게 한국은 무인도와 다름이 없습니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그녀에게 이 희망의 나라는 위장결혼과 함께 낯선 장소에서의 생활을 강요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만을 가지고 있을 뿐 어떤 인간적 관계도 없습니다. 감독은 영화의 초반부 강재의 일상을 보여주는 화면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 그와 파이란과의 이야기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녀가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호적상 남편으로 되어 있는 강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감독은 파이란의 과거와 강재의 현재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줍니다.

파이란의 책상에는 강재의 사진이 조그마한 액자에 걸려 있습니다. 항상 웃고 있는 형식상의 남편에게서 파이란은 알 수 없는 애정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친절하지만 강재가 제일 친절한 이유는 물론 그가 자신과 결혼해 줌으로써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형식상의 문제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에게 한국이라는 땅은 무인도에 표류한 톰 행크스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그녀 역시 윌슨과 같은 배구공 친구라도 하나 사귀어야 할 판국인데, 이미 그녀에게는 남편의 얼굴이 책상 위에 존재하니 어쩌면 탐 행크스보다는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내의 사망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단짝인 경수(공형진)와 바닷가로 내려가는 강재는 차츰 묘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이 세상에서 혼자 뒤떨어져 살아가는 것으로 알았던 그에게 기억에도 없는 한 여인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국가대표 호구"라고 칭하는 이 못난 남자는 자신을 의지했던, 그리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이 이방인 여인에게서 무한한 연민을 느낍니다. 그 연민은 죽어 간 서류상의 아내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기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할 것입니다.

강재는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강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범위는 매우 좁습니다. 조직의 보스인 영식(손병호)과 자신의 후배들이지만 자신을 노골적으로 깔보는 조직원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또다른 조직원이자 자신을 형이라 따르는 고향후배 경수가 전부입니다. 그들간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 강재와 그들의 관계는 경수를 제외한다면 인간적인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강재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하늘아래에서 완전한 외톨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러한 현실이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파이란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탁소집 주인아주머니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서류상 남편인 강재에게 심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녀가 강재에게 애틋한 감정을 품는다는 이야기의 설정은 일반적인 공감이 가기에는 다소 무리이지만 영화는 강재가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읽어 나가면서 점차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쳐 줌으로써 관객에게 하나의 감동을 안겨 줍니다.

파이란의 죽음에 의한 강릉행

영화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전개를 보여줍니다. 그다지 과장되어 있지도 않고 때로는 너무 절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안정적인 구도로 흘러갑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꽤 좋았습니다. 주인공인 최민식, 조연인 공현진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인데, 둘은 어쩌면 이 사회의 조금은 암적인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남루한 삶이 오히려 코믹하게 비쳐짐으로써 무거운 영화의 흐름에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장백지의 연기도 그런 대로 괜찮았습니다. 외국말을 못하는 이방인의 어눌함과 심성 착한 여인의 마음이 잘 표현됐으니까요. 아마 한국 여배우를 기용했다면 그녀 만큼의 연기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녀의 길게 기른 생머리와 가녀린 얼굴형은 파이란의 인물성격을 묘사하는데 적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파이란』은 소품입니다. 인물과 이야기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으며 인물간의 관계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도 강재의 현실을 관객에게 말해 주는 전반부를 제외 하다면 교차편집을 이용한 중반 이후의 흐름은 단선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재와 파이란을 엮어 나가는 호흡이 안정적이고 강재와 경수의 관계는 영화의 윤활유 역할을 만족스럽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등장 인물간의 역할배분과 압축적인 이야기의 단순함만으로도 연기력과 이야기의 깊이만 뒷받침된다면 한편의 괜찮은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음을 『파이란』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가를 하자면 5점 만점에 3.5점을 주고 싶습니다.

4. 부록

• Commentary : 제작자 안상훈, 감독 송해성, 음악감독 이재진, 주연 최민식의 육성해설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디스크 1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 Interview with Cast & Crew : 배우 최민식, 장백지, 손병호, 공효진과 스탭 송해성(감독), 안상훈(제작), 김영철(촬영), 이재진(음악)의 프로필과 인터뷰화면입니다. 장백지의 경우는 국내에 없는 관계로 인터뷰화면이 제작되지 못한 듯 합니다. 촬영감독 김영철의 인터뷰 화면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 The Making of Failan : 강재와 파이란을 중심으로 한 짧은 메이킹 필름들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제공됩니다.
  
• Critic's Comment : (Film 2.0)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진 기자의 영화에 대한 감상평이 동영상으로 제공됩니다.
  
• Film Review : 오동진 기자의 영화에 대한 감상평이 "파이란의 사랑, 세상을 구원하다"라는 제목의 텍스트 형식으로 제공됩니다.
  
• Visiting "Fasamo" : "파이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인터뷰에 응해 주었습니다.
  
• Promotion Film : 제작발표회와 포스터촬영장면을 촬영한 짧은 필름입니다.
  
• Music Video : 이수영의 "스친 듯 안녕", 막문위의 "LOVE"가 제공됩니다.
  
• Trailer : 2편의 텔레비젼 광고와 2편의 극장용 광고화면이 펼쳐집니다.
  
  

<사족> 영화감상과는 큰 관련이 없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내용들입니다.

파이란의 편지에 오열하는 강재

1. 파이란의 주민등록등본에 의하면 그녀는 이강재와 인천에서 동거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일하는 세탁소로 공무원이 사실혼에 대한 조사를 나왔습니다. 그녀가 자신이 일하는 강릉의 세탁소로 주민등록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공무원은 어떻게 그녀에 대한 조사를 나왔을까요 ? 공무원이 조사를 나왔다면 그는 그녀에게 빨리 전입신고를 하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

2. 파이란은 자신이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갔을까요 ? 그녀는 직업소개소 사장에게 사정을 해보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녀의 말로 미루어 그녀의 치료에 큰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마음씨 좋아 보이고 그녀를 좋아하는 세탁소 주인 아주머니(김지영)에게 왜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

3. 그녀는 강재에게 보낼 편지를 우편함에 넣은 후 다시 돌아와 그 편지를 꺼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편함 안에 편지가 가득 쌓여 있는 경우뿐인데 강릉 포구의 우편함에 그렇게 많은 편지가 쌓여 있을까요 ? 아니면 우편집배원 아저씨가 매우 게으름을 피우는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극중 파이란이 강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과 강백지의 나레이션은 의미는 일치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5. 이런 저런 평에 의하면 이 작품의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작품과는 설정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llhtml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