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아르농쿠르와 베르디의 아이다.
꼭 무슨 퓨전 요리의 레서피 같지 않으십니까? 영 안어울려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새로운 맛이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런 음반이 실제로 나왔습니다. (사실..나온지가 좀 되었습니다.)
발매예정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중반부터 '과연 어떤 맛일까?'가 애호가들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CD겉포장 비닐에는 'eagerly awaited..'라는 문구가 찍힌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르농쿠르 지휘의 아이다가 과연 'eagerly buy'할만한 음반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농쿠르의 Aida는 책자 형태로 발매되었습니다. 아르농쿠르의 바흐 마태수난곡 신반 생각나시지요? 음반사 입장에서는 많은 사진을 실어야 하므로 돈이 많이 들고 감상자 입장에서는 CD 알맹이를 넣고 빼기가 불편하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아 CD-R로는 채울 수 없는 효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는 제작방식입니다.
최근에는 파파노가 지휘하고 게오르규-알라냐 부부가 주연을 맡은 'Tosca'도 이런 식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사진의 질로 보면 저는 Tosca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파파노의 Tosca에는 극 장면을 담은 멋진 칼라 사진이 많은데, 아르농쿠르의 아이다에는 초연 당시 이집트 상황 등에 대한 사진 위주로 수록이 되어 있고 주연가수들의 사진조차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 첨부할 주연가수들의 사진은 인터넷 상에서 따로 모은 것입니다.)
음악을 들어봅니다. 비엔나 필이 연주한 서곡은 집중력이 매우 뛰어나 귀를 사로잡습니다. 그런데..그런데....
라다메스가 'Celeste Aida'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속으로 저는 '아-이럴수가!'하고 되뇌일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다메스 장군 역을 맡은 테너는 빈첸초 라 스콜라 (Vincenzo La Scola). 현재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A급 가수이지만 이미 베르곤지나 도밍고의 라다메스가 귀에 익은 입장에서는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대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여 이디오피아를 망하게 할 전쟁영웅의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그득하게 담긴 수려한 가창이라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씻을 수 없습니다. 'Celeste Aida'는 초연당시 이벤트성이 강했던 이 오페라에서 일단 청중의 기선을 제압하는 선제공격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속된말로, 이 대목에서부터 듣는 이는 '뿅 가야'하는 것입니다. 라다메스가 약하다는 것은 이 음반에서 가장 불만스런 부분입니다.
암네리스 공주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듣기가 한결 좋아집니다. 암네리스 역은 올가 보로디나(Olga Borodina)입니다. 올가 보로디나가 등장하여 좋은 평을 얻었던 근년의 음반으로는 게르기예프 지휘의 베르디 레퀴엠(안드레아 보첼리가 나오는 그 '유명한' CD)이 생각납니다. 여기서도 보로디나는 특유의 음영짙은 목소리로 암네리스의 권위와 질투,사랑을 정말 잘 표현해냅니다. 농익은 느낌이지만 어떤때는 좀 넘친다 싶을때도 있긴 합니다. 이 부분은 듣는 사람의 취향차이도 있을 법합니다. 저로서는 무티가 지휘한 아이다에서의 피오렌자 코소토같은, 좀 더 날렵한 목소리와 올가 보로디나의 톤 중 어떤 게 더 나은가가 재미있는 비교거리가 됐습니다.
프리마 돈나인 아이다는 상당히 가볍고 고운 목소리를 지녔습니다. 크리스티나 갈라르도-도마스(Cristina Gallardo-Domas)라는 이름의 칠레 출신. 등장인물 중 가장 신인입니다. 핫트랙스에 가서 이 음반을 검색해 보시면 다른 캐스트에 대한 코멘트는 있지만 주연인 이 소프라노에 대한 얘기는 한 글자도 안 나옵니다. 외국 검색엔진에서 찾아봐도 이 소프라노의 신상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9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무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어서, 유명 무대의 공연스케줄에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비부인이나 라보엠의 미미, 투란도트의 류 같은 역에 잘 맞을 목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캐스팅은 아이다와 암네리스의 성격대비를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갈라르도-도마스의 아이다는 이를테면 마리아 칼라스의 아이다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칼라스의 아이다가 운명적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처절함, 운명에 맞서 저항하는 이의 강인함 같은 것을 담고 있다면 갈라르도-도마스의 아이다는 비극적 최후를 향해 떠밀려가는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3막 앞부분에서 아이다가 고국을 그리며 노래하는 'O Patria Mia'같은 아리아를 들어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입니다.
아이다와 함께 후반부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아모나스로 역에는 토마스 햄슨이 캐스팅되었습니다. 토마스 햄슨은 잘 하긴 하는데, 좀 더 무겁고 음험했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이로 인해, 아모나스로가 아이다를 몰래 불러내 라다메스를 통해 이집트에 복수하라고 강요하는 3막의 긴장감은 칼라스와 티토 곱비 콤비의 그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가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라는 유명한 합창이 끝난 뒤 '이기고 돌아오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하며 괴로와하는 1막의 아이다의 아리아도 매우 슬프며 기교적으로 잘 컨트롤 되어 있지만 좀 더 처절하고 무거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따릅니다. 하기사, 누군들 칼라스-곱비를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만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3막 후반부와 4막은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럽습니다. 1막 처음에서 실망스러웠던 라다메스역의 라 스콜라는 발동이 늦게 걸리는 박찬호처럼 좀 더 팽팽한 소리로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아이다역의 도마스와도 훌륭한 앙상블을 펼치고 있습니다. 라 스콜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이 오페라에서의 '라다메스'라는 인물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카를로 베르곤지가 부르는 라다메스는 고결합니다. 도밍고가 부르는 라다메스는 비극적인 청년영웅입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라다메스는 우유부단하며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3막을 생각해보죠. 아이다는 아버지 아모나스로로부터 라다메스에게서 이집트의 군사비밀을 빼내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갈등을 견디다 못한 아이다는 라다메스에게 차라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자고 애원합니다. 라다메스는 이런 아이다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뭐하러 그러냐, 그냥 여기서 살면 되지..이런 식입니다.
가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여인의 나라를 박살내놓은 남자 치고는 참 철부지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칼라스 판에서 라다메스를 맡은 리차드 터커는 허풍선이처럼 '뽕'이 잔뜩 들어간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은 곧 남들에게도 행복'이라는 점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젊은이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요. 이런 점에서는 너무 멋지기만 한 베르곤지나 도밍고의 라다메스보다 좀 더 설득력있는 인물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모나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티토 곱비의 아모나스로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딸을 인정사정없이 몰아치고 작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비정한 전쟁광의 측면이 너무 부각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나스로도 나름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딸을 진정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햄슨의 아모나스로는 그보다는 좀 더 따뜻한 아버지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좀 더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 아예 아이다가 아니라 암네리스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티 지휘의 아이다에 나오는 피오렌자 코소토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드는 생각입니다. 노래의 비중으로 봐도 아이다에 비해 떨어지지 않거니와, 사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을 당하는 입장입니까.
지금이 칼라스나 카바예,코소토의 시대보다 오페라가 쇠퇴한 시기이기는 합니다만, 아르농쿠르와 텔덱 정도라면 지금 있는 가수들 중에서는 누구라도 뽑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음반사 소속이라면 빌려서라도 쓸 수 있었겠지요. 언뜻 생각하면 성악진의 캐스팅이 좀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명성이 과거 명반들에 비해 좀 떨어진다는 것 뿐입니다. 왕 역의 폴가 라즐로나 람피스 역의 살미넨 등은 스타죠.), 한편으로는 각 인물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아르농쿠르의 해석이 바로 캐스팅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르농쿠르의 지휘는 '과연 아르농쿠르'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그랜드 오페라 지휘자들에 비해 기름기가 빠진 원전연주적 사운드를 내고 있는데, 필요할 때는 아주 강력하게 몰아침으로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기고 돌아오라' '개선행진곡' 등을 들어보면 반응이 빠르고 다이내믹이 뛰어난 오디오기기의 느낌 그대로입니다.
악보에 철저했다는 것도 이 음반에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기고 돌아오라'일 겁니다. 마지막에 합창으로 'Ritorna Vinci tor!'하며 모두가 외치는 대목을 보면 그렇습니다. 다른 음반들에서는 예외없이 이 소절을 길게 길게 늘여 부름으로써(Ritor-na Vin-ci To--r!) 장대한 효과를 극대화 합니다. 아르농쿠르는 이것을 'Ritor na Vin ci Tor!'하고 원래 템포 그대로 짧게 짧게 밀어붙여버립니다..
그와 오랜기간 함께 작업해 온 아르놀트 쇤베르그 합창단 역시 정제된 앙상블로 이런 색깔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비엔나필의 적응력입니다. 아르농쿠르의 유럽챔버 같은 느낌과 베르디적인 사운드를 이렇게 절묘하게 섞어놓을 수 있다니, 역시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 답습니다.
전체적인 구매가치를 생각해본다면 별4개 (★★★★)를 주고 싶습니다. 오페라 전집 치고도 상당히 비싼 편이어서, 핫트랙스 판매가로도 4만3백원입니다. 아마 나와있는 아이다 중에 제일 비싸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이다 전집을 살 때 과연 이것이 칼라스-곱비-세라핀/ 베르곤지-테발디-카라얀 / 무티-도밍고-카바예-코소토 / 솔티-레온타인 프라이스 등의 쟁쟁한 과거음반들보다 나은가 (가격에 대한 고려를 포함하여)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명반들이 속속 염가/리매스터링 시리즈로 재발매되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신, 열거한 과거 명반들을 2종 이상 갖고 계시면서 새로운 아이다를 듣고 싶어하는 분이라면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
p.s. 아이다 팬들께는 유니버설 정품DVD로 나온 도밍고 주연 레바인 지휘의 메트로폴리탄 실황도 별5개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성악진의 가창, 오케스트라, 무대연출 모두 전통적인 스타일로서 최고수준에 올라 있는 명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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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예정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중반부터 '과연 어떤 맛일까?'가 애호가들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CD겉포장 비닐에는 'eagerly awaited..'라는 문구가 찍힌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르농쿠르 지휘의 아이다가 과연 'eagerly buy'할만한 음반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농쿠르의 Aida는 책자 형태로 발매되었습니다. 아르농쿠르의 바흐 마태수난곡 신반 생각나시지요? 음반사 입장에서는 많은 사진을 실어야 하므로 돈이 많이 들고 감상자 입장에서는 CD 알맹이를 넣고 빼기가 불편하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아 CD-R로는 채울 수 없는 효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각광받는 제작방식입니다.
최근에는 파파노가 지휘하고 게오르규-알라냐 부부가 주연을 맡은 'Tosca'도 이런 식으로 발매되었습니다. 사진의 질로 보면 저는 Tosca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파파노의 Tosca에는 극 장면을 담은 멋진 칼라 사진이 많은데, 아르농쿠르의 아이다에는 초연 당시 이집트 상황 등에 대한 사진 위주로 수록이 되어 있고 주연가수들의 사진조차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 첨부할 주연가수들의 사진은 인터넷 상에서 따로 모은 것입니다.)
음악을 들어봅니다. 비엔나 필이 연주한 서곡은 집중력이 매우 뛰어나 귀를 사로잡습니다. 그런데..그런데....
라다메스가 'Celeste Aida'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속으로 저는 '아-이럴수가!'하고 되뇌일수밖에 없었습니다. 라다메스 장군 역을 맡은 테너는 빈첸초 라 스콜라 (Vincenzo La Scola). 현재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A급 가수이지만 이미 베르곤지나 도밍고의 라다메스가 귀에 익은 입장에서는 아니올시다 였습니다.
대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여 이디오피아를 망하게 할 전쟁영웅의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그득하게 담긴 수려한 가창이라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씻을 수 없습니다. 'Celeste Aida'는 초연당시 이벤트성이 강했던 이 오페라에서 일단 청중의 기선을 제압하는 선제공격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속된말로, 이 대목에서부터 듣는 이는 '뿅 가야'하는 것입니다. 라다메스가 약하다는 것은 이 음반에서 가장 불만스런 부분입니다.
암네리스 공주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듣기가 한결 좋아집니다. 암네리스 역은 올가 보로디나(Olga Borodina)입니다. 올가 보로디나가 등장하여 좋은 평을 얻었던 근년의 음반으로는 게르기예프 지휘의 베르디 레퀴엠(안드레아 보첼리가 나오는 그 '유명한' CD)이 생각납니다. 여기서도 보로디나는 특유의 음영짙은 목소리로 암네리스의 권위와 질투,사랑을 정말 잘 표현해냅니다. 농익은 느낌이지만 어떤때는 좀 넘친다 싶을때도 있긴 합니다. 이 부분은 듣는 사람의 취향차이도 있을 법합니다. 저로서는 무티가 지휘한 아이다에서의 피오렌자 코소토같은, 좀 더 날렵한 목소리와 올가 보로디나의 톤 중 어떤 게 더 나은가가 재미있는 비교거리가 됐습니다.
프리마 돈나인 아이다는 상당히 가볍고 고운 목소리를 지녔습니다. 크리스티나 갈라르도-도마스(Cristina Gallardo-Domas)라는 이름의 칠레 출신. 등장인물 중 가장 신인입니다. 핫트랙스에 가서 이 음반을 검색해 보시면 다른 캐스트에 대한 코멘트는 있지만 주연인 이 소프라노에 대한 얘기는 한 글자도 안 나옵니다. 외국 검색엔진에서 찾아봐도 이 소프라노의 신상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9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무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어서, 유명 무대의 공연스케줄에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비부인이나 라보엠의 미미, 투란도트의 류 같은 역에 잘 맞을 목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캐스팅은 아이다와 암네리스의 성격대비를 강렬하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갈라르도-도마스의 아이다는 이를테면 마리아 칼라스의 아이다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칼라스의 아이다가 운명적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처절함, 운명에 맞서 저항하는 이의 강인함 같은 것을 담고 있다면 갈라르도-도마스의 아이다는 비극적 최후를 향해 떠밀려가는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3막 앞부분에서 아이다가 고국을 그리며 노래하는 'O Patria Mia'같은 아리아를 들어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입니다.
아이다와 함께 후반부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아모나스로 역에는 토마스 햄슨이 캐스팅되었습니다. 토마스 햄슨은 잘 하긴 하는데, 좀 더 무겁고 음험했으면 좋았을 듯 합니다. 이로 인해, 아모나스로가 아이다를 몰래 불러내 라다메스를 통해 이집트에 복수하라고 강요하는 3막의 긴장감은 칼라스와 티토 곱비 콤비의 그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가고 돌아오라(Ritorna Vincitor!'라는 유명한 합창이 끝난 뒤 '이기고 돌아오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하며 괴로와하는 1막의 아이다의 아리아도 매우 슬프며 기교적으로 잘 컨트롤 되어 있지만 좀 더 처절하고 무거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따릅니다. 하기사, 누군들 칼라스-곱비를 압도할 수 있겠습니까만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3막 후반부와 4막은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럽습니다. 1막 처음에서 실망스러웠던 라다메스역의 라 스콜라는 발동이 늦게 걸리는 박찬호처럼 좀 더 팽팽한 소리로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아이다역의 도마스와도 훌륭한 앙상블을 펼치고 있습니다. 라 스콜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저는 이 오페라에서의 '라다메스'라는 인물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카를로 베르곤지가 부르는 라다메스는 고결합니다. 도밍고가 부르는 라다메스는 비극적인 청년영웅입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라다메스는 우유부단하며 이기적인 인물입니다. 3막을 생각해보죠. 아이다는 아버지 아모나스로로부터 라다메스에게서 이집트의 군사비밀을 빼내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갈등을 견디다 못한 아이다는 라다메스에게 차라리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살자고 애원합니다. 라다메스는 이런 아이다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뭐하러 그러냐, 그냥 여기서 살면 되지..이런 식입니다.
가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여인의 나라를 박살내놓은 남자 치고는 참 철부지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칼라스 판에서 라다메스를 맡은 리차드 터커는 허풍선이처럼 '뽕'이 잔뜩 들어간 느낌을 줍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은 곧 남들에게도 행복'이라는 점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 실패를 모르고 달려온 젊은이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요. 이런 점에서는 너무 멋지기만 한 베르곤지나 도밍고의 라다메스보다 좀 더 설득력있는 인물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모나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티토 곱비의 아모나스로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딸을 인정사정없이 몰아치고 작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비정한 전쟁광의 측면이 너무 부각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나스로도 나름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딸을 진정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햄슨의 아모나스로는 그보다는 좀 더 따뜻한 아버지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좀 더 생각의 실타래를 풀면, 아예 아이다가 아니라 암네리스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티 지휘의 아이다에 나오는 피오렌자 코소토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드는 생각입니다. 노래의 비중으로 봐도 아이다에 비해 떨어지지 않거니와, 사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을 당하는 입장입니까.
지금이 칼라스나 카바예,코소토의 시대보다 오페라가 쇠퇴한 시기이기는 합니다만, 아르농쿠르와 텔덱 정도라면 지금 있는 가수들 중에서는 누구라도 뽑아 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음반사 소속이라면 빌려서라도 쓸 수 있었겠지요. 언뜻 생각하면 성악진의 캐스팅이 좀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명성이 과거 명반들에 비해 좀 떨어진다는 것 뿐입니다. 왕 역의 폴가 라즐로나 람피스 역의 살미넨 등은 스타죠.), 한편으로는 각 인물의 성격과 관계에 대한 아르농쿠르의 해석이 바로 캐스팅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르농쿠르의 지휘는 '과연 아르농쿠르'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기존의 그랜드 오페라 지휘자들에 비해 기름기가 빠진 원전연주적 사운드를 내고 있는데, 필요할 때는 아주 강력하게 몰아침으로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이기고 돌아오라' '개선행진곡' 등을 들어보면 반응이 빠르고 다이내믹이 뛰어난 오디오기기의 느낌 그대로입니다.
악보에 철저했다는 것도 이 음반에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기고 돌아오라'일 겁니다. 마지막에 합창으로 'Ritorna Vinci tor!'하며 모두가 외치는 대목을 보면 그렇습니다. 다른 음반들에서는 예외없이 이 소절을 길게 길게 늘여 부름으로써(Ritor-na Vin-ci To--r!) 장대한 효과를 극대화 합니다. 아르농쿠르는 이것을 'Ritor na Vin ci Tor!'하고 원래 템포 그대로 짧게 짧게 밀어붙여버립니다..
그와 오랜기간 함께 작업해 온 아르놀트 쇤베르그 합창단 역시 정제된 앙상블로 이런 색깔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비엔나필의 적응력입니다. 아르농쿠르의 유럽챔버 같은 느낌과 베르디적인 사운드를 이렇게 절묘하게 섞어놓을 수 있다니, 역시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 답습니다.
전체적인 구매가치를 생각해본다면 별4개 (★★★★)를 주고 싶습니다. 오페라 전집 치고도 상당히 비싼 편이어서, 핫트랙스 판매가로도 4만3백원입니다. 아마 나와있는 아이다 중에 제일 비싸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이다 전집을 살 때 과연 이것이 칼라스-곱비-세라핀/ 베르곤지-테발디-카라얀 / 무티-도밍고-카바예-코소토 / 솔티-레온타인 프라이스 등의 쟁쟁한 과거음반들보다 나은가 (가격에 대한 고려를 포함하여)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명반들이 속속 염가/리매스터링 시리즈로 재발매되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대신, 열거한 과거 명반들을 2종 이상 갖고 계시면서 새로운 아이다를 듣고 싶어하는 분이라면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
p.s. 아이다 팬들께는 유니버설 정품DVD로 나온 도밍고 주연 레바인 지휘의 메트로폴리탄 실황도 별5개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성악진의 가창, 오케스트라, 무대연출 모두 전통적인 스타일로서 최고수준에 올라 있는 명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