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모짜르트 레퀴엠의 본질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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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99년경으로 기억합니다. 음반점에 갔다가 opus111의 신보를 발견했습니다. 이 레이블이 주로 파비오 비온디의 비발디 곡들로 성가를 떨치던 때였고 opus111이라면 바로크 음악만을 떠올리던 때였는데 뜻밖에 슈만의 곡이었습니다.

바로 사진에서 보시는 '장미의 순례(Der Rose Pilgerfahrt)'음반입니다. 세련된 연주와 뛰어난 녹음탓에 한동안 즐겨들었는데 지휘자는 크리스토프 슈펄링이라는 사람이었고, 악단 이름이 독일어로'새 악단'(das Neue Orchestra)이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새로운 접근도 아니고 그냥 새 악단? 이름이 좀 그러네? 근데 연주는 왜 고악기 연주야?'하고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는 잊고 있던 이 지휘자가 모짜르트 레퀴엠을 녹음하여 또다시 등장했습니다. 원래 처음 수입된 것은 지난해 말쯤입니다. 음반점 진열대에서 보았을 시점에는 이미 집어든 CD가 워낙 많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놓고 왔는데 이후 통 볼 수가 없더군요. 그러다 최근 재수입되었습니다. 하얀 바탕에 나무십자가 사진을 얹은 바로 이 음반입니다. 뒷면의 출연진을 훑어보다보니 눈에 번쩍 띄는 이름이 있습니다. "kwangchul youn..이것은 한국이름 아닌가!" 요즘 국제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베이스 가수 연광철씨가 독창진에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지난해 말에 미리 이것을 보았더라면 아마 여러분은 이 음반에 대한 저의 소개글을 석달 일찍 보셨을텐데.. 비슷한 시기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코지 판 투테'공연에서 연씨의 가창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던지라 구입을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 슈펄링 해석의 초점은 템포?

집에 와서 초벌(?)청취를 위해 CDP에 넣고 앰프 전원을 켰습니다. 첫 소절부터 귀에 탁 들어오는 특징은 '앗 느리다!'입니다. 호르디 사발의 것보다는 거의 2배쯤 느리게 느껴집니다. 2번트랙으로 나오는 '키리에 엘레이손'의 템포도 다른 연주들에 비해 꽤 느린 편입니다. 그런데 3번트랙 '디에스 이래(Dies Irae)'로 넘어가면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아마 역대 어느 연주와 비교해도 가장 빠른 축에 속할 것입니다. 이후로도 '레코르다레(recordare) 등의 느린 곡과 '콘푸타티스(confutatis)' 등 빠른 곡의 템포 차이가 극명하다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뉴스데이'가 끝난 뒤 마지막으로 '레퀴엠/키리에'를 반복하는 부분에서는 첫부분의 레퀴엠과 키리에에 비해 템포가 다소 빨라집니다. 똑같은 곡인데도 말이지요. 왜 그렇게 했을지가 궁금하여 속지를 보니 마침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슈펄링(Christoph Sperling)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어 좋은 자료가 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첫부분인 '인트로이투스(Introitus)'의 '레퀴엠'과 '키리에'가 느린 것은 이 곡의 종교적 성격을 감안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레퀴엠의 기본형식을 좀 살펴볼까요? 레퀴엠은 천주교회의 여러가지 미사 가운데 죽은자를 위한 미사에 쓰이는 부수적 음악에서 출발했습니다. 미사곡의 기본형은 Kyrie/ Gloria/ Credo/ Sanctus/ Agnus Dei 등의 통상문(늘 기본으로 등장한다는 의미에서). 여기에 특정 미사의 성격에 따라 다른 것들이 추가되거나 빠지게 됩니다.('고유문'이라 하죠.) 레퀴엠은 장례미사라는 특성상 통상문 가운데 '글로리아''크레도'가 빠지고 이 사이에 사후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 '속창(Sequentia.영어로 'Sequence'.)가 붙은 일종의 특수미사곡입니다. 아마데우스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라크리모사(Lacrimosa)-눈물의 날', 각종 영화나 광고배경음악으로 유명한 '분노의 날(Dies Irae)'등이 바로 이 '속창'이죠. 레퀴엠이 일반미사와 다른 또하나의 특징은 사제들이 미사 집전을 위해 들어올때 불리우는 입당송(introitus)이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 dona eis...)'라는 가사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설이 좀 길어졌는데, 슈펄링이 1곡 '레퀴엠'을 느리게 연주한 것은 '추모미사 집전을 위하여 사제가 들어오는 엄숙한 순간에 요즘 원전연주계에서 유행하는 통통 튀는 템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때문입니다. 빠른 '레퀴엠 애테르남..'의 대표인 호르디 사발이 어떻게 반박할지가 매우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1곡은 템포지시가 'Adagio' 2곡은 'Allegro'인데 둘이 비슷하게 느리게 들리는 이유도설명돼 있었습니다. 두 곡의 기저에 흐르는 맥박이 같은 박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슈펄링은 알레그로가 아다지오의 정확히 2배 템포가 되도록 하고, 둘이 같은 맥박 위에서 흘러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신경써서 들어보면 '키리에'에서는 푸가가 진행되느라 음표수가 많아서 그렇지 기본 박자는 '레퀴엠 에테르남..'과 같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뉴스데이'가 끝나면서 다시 첫부분의 선율이 그대로 재현되는 부분에서, 선율과 가사는 그대로인데 템포가 두배 가까이 빨라진 이유 역시 슈펄링은 종교적으로 설명합니다. 곡의 시작부분에 나온 '레퀴엠 에테르남..(영원한 안식을 주소서..)'과 '키리에..(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엄숙한 애도'였다면 곡의 마지막에 반복되는 같은 선율은 '신과 천국에 대한 찬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지만, 그래서인지 가사도 앞부분을 좀 떼고 'lux aeterna'(영원한 빛..)부터 시작합니다.) 그 근거로 슈펄링은 1곡 'Requiem..'에 붙어있는 'Adagio'기호가 마지막에는 붙어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같은 곡을 반복하는데 유독 속도기호만 빠진 것이 쥐스마이어의 실수인지 모짜르트의 유언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Adagio'는 단순히 속도지시가 아니라 '곡 성격의 표현'이라고 슈펄링은 말합니다. 같은 음률과 가사를 마지막에 빠른 템포로 처리함으로써 처음에 미사참석자들이 갖고 있던 '두려움과 애도'를 '기쁨과 찬양'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 한국성악계의 새로운 자랑, 연광철

슈펄링 음반의 성악진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단연 베이스 연광철입니다. '투바 미룸(Tuba mirum)'에서의 독창을 들어보면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확고한 발성이 심금을 울립니다. 윤기있고 기품있는 음성입니다. 배경음악으로 들으신 노래가 바로 그의 '투바 미룸'입니다. 올해 38세로 충주 출신인 그는 동양인 최초의 플라시도 도밍고 콩쿨 우승자로 알려지기 시작해 95년 도밍고 내한공연때 홍혜경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함으로써 본격적인 명성을 국내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에서 활약했고, 국제무대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도밍고가 많이 후원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프라노 이리데 마르티네즈(Iride Martinez), 테너 스티브 데이비슬림(Steve Davislim)등도 잘 닦인 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투바 미룸 중반부 중창에서 테너가 치고 나오는 대목은 모짜르트 레퀴엠에 참여하는 테너들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중 하나인데, 스티브 데이비슬림은 전체 앙상블을 중시하는 곱고 둥근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음반가운데 이 대목에서 제일 인상적인 사람은 헬무트 릴링(Helmuth Rilling)지휘 79년 녹음(CBS의 Odyssey시리즈로 발매)의 지크프리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누가 바그너 헬덴테너 아니랄까봐 대단히 격정적이고 강인한 가창을 선보이는데, 튄다면 튀고 감동적이라면 감동적인 노래더군요. 전체적인 합창사운드는 정갈한 인상을 줍니다.

호르디 사발은 이보다 더 감정의 진폭을 살린 합창이었고 헤레베헤의 합창은 가슴을 좀 더 부드럽게 파고 드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양쪽에 비해서 슈펄링의 감정표현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 가필 아래 숨겨진 모짜르트의 진면목을 찾아서

이런저런 것을 다 떠나서 이 음반을 꼭 사야할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슈펄링은 세계최초로 모짜르트가 남긴 그대로의 수고(手稿)를 이 음반 후반부에 녹음하였습니다. 사실 모짜르트 레퀴엠에 대하여는 모짜르트가 라크리모사를 쓰다가 죽었다고만 대략 알려져 있을 뿐, 정확히 무엇이 모짜르트가 직접 악보에 써놓은 부분이고 무엇이 제자의 첨부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슈펄링이 직접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는 실제 연주회장에서도 이를 연주한답니다) 모짜르트가 완성해놓은 것은 제일 앞의 '레퀴엠 에테르남'과 '키리에'뿐입니다. 벌써 '디에스 이래'에 들어가면 관악부와 팀파니가 사라집니다. 이게 빠지면 곡도 맥이 빠질까요? 그건 직접 들어보시면 압니다.^^; 이후의 '세퀜티아'곡들에 대해서 모짜르트가 직접 남긴 것은 합창부와 제1바이올린,베이스를 위한 스케치뿐입니다. '라크리모사'는 알려진대로 8마디째에서 끊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의외로 단절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바로 봉헌송(offertorium) 'domine jesu'의 아름다운 선율이 바로 다음 트랙으로 이어서 나오기때문입니다. 모짜르트가 자기손으로는 전혀 악보를 적어놓지 않은 오페르토리움과 베네딕투스의 아름다움은 한편 역으로 이런 생각을 품게 합니다. '쥐스마이어는 정말 음악학자들의 평대로 2류였나'하는 것입니다. 슈펄링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모짜르트 원본을 들어보면 쥐스마이어를 재평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르디 사발은 '모짜르트가 생전에 쥐스마이어에게 남은 부분들의 구상을 직접 연주해 들려주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모짜르트의 친필원고가 미완성임을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은 마지막인 'amen'입니다. 합창이 전개되다 22초만에 뚝! 끊어지고 나서는 CD플레이어의 레이저픽업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기계음이 미세하게 들릴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순간 서늘한 전율이 가슴을 치고 지나갑니다. 아..정말여기서 모짜르트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쥐스마이어 완성본의 연주만 갖고 보자면 슈펄링의 연주가 주는 심정적 감동의 크기는 헤레베헤나 릴링의 것보다 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퀴엠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라는 측면에서는 최고의 음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적어도 모짜르트 본인이 남긴 미완성수고의 연주만으로도 이 음반은 별다섯개(★★★★★) 구입 추천입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