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 최고의 쇼팽 스페셜리스트, 스타니슬라프 부닌이 모처럼 쇼팽 레퍼토리를 담은 신보를 내놓았습니다.
1985년 10월에 열린 제11회 쇼팽콩쿨에서 만19세의 나이로 우승을 거머쥐어 세계를 놀라게 했던 부닌. 그는 쇼팽으로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등극했지만 90년대 후반부터는 차차 쇼팽을 멀리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며 스포트라이트로부터 잠시 벗어났습니다.
장소적으로는 일본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전개하며 레퍼토리적으로는 그와 덜 어울려보이는 바흐 베토벤 등 고전파 작곡가들에 손을 뻗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닌의 쇼팽 녹음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로서의 그의 명성만큼은 많지 않았고 구하기도 의외로 쉽지 않았습니다. 서방 메이저레이블을 통한 지속적인 레코딩이 이뤄지지 않은 탓입니다.(구소련 멜로디야 시절의 녹음들도 참 좋은데, 역시 지금 CD로 구하기는 굉장히 어려워보입니다.)
이번에 EMI에서는 부닌의 연주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한장에 담아서 내놓았습니다. 지휘자는 카지미에르쯔 코르드(Kazimierz Kord), 악단은 Orchestra of Poland입니다. 광고문구에 따르면 쇼팽콩쿨 우승 당시의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다시 만나 손을 맞춘 것이라 합니다.
연주시기는 2001년 11월이니, 최근 부닌의 쇼팽연주는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협주곡 1번은 2000년 11월25일 키타라의 삿포로 콘서트 홀, 협주곡 2번은 그보다 3일전인 11월22일 도쿄 선토리 홀(Suntory Hall) 라이브입니다.
또 일본이네? 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 역시 그렇습니다.
한동안 고전파 레퍼토리 개발에 열을 올리던 부닌이 자신의 출생성분(?)을 인정한 것은 아마도 쇼팽서거 150주년인 1999년일 것입니다. 이 해에 EMI는 5장짜리 부닌-쇼팽 연주곡집 박스 세트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국내에는 라이센스로 풀렸었는데 지금은 거의 절판지경이어서 구하기 굉장히 힘들어졌습니다. 또 찍으면 잘 팔릴 듯 한데, 이런 음반들을 안 파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닌은 99년1월부터 2001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지와 일본에서 쇼팽 순회연주회를 열었습니다. 1회 공연에서는 에튜드, 2회에선 환상곡과 소나타, 뱃노래, 3회에선 녹턴과 스케르초, 4회에선 전주곡과 왈츠, 5회에선 폴로네이즈와 몇가지 소품, 마지막 6회차 공연에선 2곡의 협주곡,그리고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EMI신보는 바로 이 쇼팽사이클의 마지막 6회차 연주를 기록한 라이브 음반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협주곡1번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 원래 쇼팽콩쿨때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협주곡 1번이었습니다. 88년인가, 대학로 인켈오디오월드에서 LD로 그 당시 공연실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스터치는 더러 있었고 템포가 빠르지도 않았지만 놀랄만큼 풋풋하고 싱그러운 프레이징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연주였는데, 문제는 이 연주를 CD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내수용으로 발매된 '충격의 연주-부닌의 쇼팽콩쿨..'운운하는 CD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위에서 말씀드린 쇼팽서거 150주년 기념 5장 박스셋(EMI)에도 2번만 들어있지 1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음반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부닌의 협주곡1번이라 해도 큰 오류는 아닐 듯 합니다. (다른 음반이 있다면 만세불러 환영할 일이니 제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닌의 쇼팽 연주에 대하여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관능미' 입니다.
가벼우면서도 가는 붓처럼 끝이 잘 다듬어진,그리고 탄력있는 터치는 연주를 넘어선 애무에 가깝습니다. 절묘한 감각의 템포 루바토(주:연주자가 임의로 템포를 조금씩 바꾸는 것-쇼팽 연주에서 아주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와 프레이징 등도 그런 이미지를 뒷받침해 줍니다.
특히 실연에서는 마약을 복용하고 정사하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입꼬리에 웃음을 말아올려가며 연주하는데, 이 때문에 유난히 여성팬이 많죠.
이번에 새로 나온 음반은, 그러한 면모에 이제 고전주의적 건강미도 더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의 스무살 무렵 연주-(66년생이니 이제 30대 중반입니다.)-들과 비교하면 템포가 상당히 빠르고 루바토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는 편입니다. 음색의 영롱함과 세공미는 여전하면서도 터치에 좀 더 힘이 붙어있는 느낌이 납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일수도 있는 부분은 보완해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악장들이 주고 있는 위와 같은 느낌들에 더하여, 이 협주곡들의 2악장들에서 부닌이 보여주고 있는 터치와 프레이징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으로, 작곡 당시 쇼팽이 갖고 있던 애틋한 짝사랑의 감정이 만져질 듯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쇼팽서거 150주년 기념 박스셋에 실린 2번 연주와 비교해보면, 의외로 해석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만, 다른 차이가 발견됩니다. 녹음입니다.
여기 실린 피아노협주곡2번 역시 실황으로, 같은 도쿄 Suntory Hall 라이브입니다.(95년 3월26일의 연주.) 이때는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지휘하는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와 협연했습니다. 같은 EMI의 녹음인데도 사운드가 꽤 다릅니다. 오케스트라 음향이 다소 뭉친듯하게 들리는 단점은 있지만이 구반쪽이 좀 더 음색이 부드럽고 풍성합니다.
반면 이번에 나온 신반은 고역 쪽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언뜻 들으면 소리가 더 명료해 진 것 같지만, 부닌의 피아노 터치가 다소 경질化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구반에 비하면 바이올린 파트도 좀 퍼석거리는 느낌이 납니다. 자연스럽지 않군..하는 느낌이 제일 강해지는 것은 마지막 박수소리에서였습니다.
대신 공간감은 신녹음쪽이 더 우수하여 실제 무대 상황이 상당히 잘 드러나는 편이며, 피아노 연주에 부수되는 음향(피아노의 각 파트가 움직이는 느낌, 페달을 밟거나 체중을 건반위에 실어때리는 연주자의 몸짓 등의 표현)도 꽤 잘 살아 있습니다.
근래에 나온 쇼팽 협주곡 중에서 녹음이 마음에 들기로는,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의 DG신녹음을 들 수 있겠습니다. 99년,자신이 Polish Festival Orchestra를 지휘하며 연주한 이 음반은 부닌의 EMI음반보다 좀 더 근접녹음의 느낌이 강하며,오디오적인 쾌감이 상당합니다.
연주 경향으로 보면 적극적인 루바토와 세부묘사에 대한 집중이 두드러집니다. 차 몰고 설악산을 간다고 치면,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해서, 미시령도 아니고 한계령으로 넘어가며 휴게소마다 놀다 가는 식의 연주랄까요.
전체적인 느낌을 비교하자면 부닌의 연주에서는 풋풋한 싱그러움을, 짐머만의 것에서는 보다 농익은 내음을 느낄 수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LA필과 함께 남긴 그의 구 녹음(DG Originals로 나와있음)에서의 물흐르는 듯한 느낌과는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다시 부닌의 신보로 돌아가서 총평을 하자면, '변화한 부닌의 모습을 보기에 충분하며, 그 자체로 보아서도 균형미가 뛰어난 좋은 연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완벽에 가까운 연주자로 성장하고 있는 부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가 본연의 개성에 창백함과 자의성을 더하여 좀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애호가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저만 그런가요? ^^;)
구매가치의 별은 4개반(★★★★☆)입니다. 협주곡2곡이 한장에 들었지만 라이센스로 나와서 값도 싼 편입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
 부닌 쇼팽피협 신보.jpg)
이번에 EMI에서는 부닌의 연주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을 한장에 담아서 내놓았습니다. 지휘자는 카지미에르쯔 코르드(Kazimierz Kord), 악단은 Orchestra of Poland입니다. 광고문구에 따르면 쇼팽콩쿨 우승 당시의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다시 만나 손을 맞춘 것이라 합니다.
연주시기는 2001년 11월이니, 최근 부닌의 쇼팽연주는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협주곡 1번은 2000년 11월25일 키타라의 삿포로 콘서트 홀, 협주곡 2번은 그보다 3일전인 11월22일 도쿄 선토리 홀(Suntory Hall) 라이브입니다.
또 일본이네? 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 역시 그렇습니다.
한동안 고전파 레퍼토리 개발에 열을 올리던 부닌이 자신의 출생성분(?)을 인정한 것은 아마도 쇼팽서거 150주년인 1999년일 것입니다. 이 해에 EMI는 5장짜리 부닌-쇼팽 연주곡집 박스 세트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국내에는 라이센스로 풀렸었는데 지금은 거의 절판지경이어서 구하기 굉장히 힘들어졌습니다. 또 찍으면 잘 팔릴 듯 한데, 이런 음반들을 안 파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닌은 99년1월부터 2001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지와 일본에서 쇼팽 순회연주회를 열었습니다. 1회 공연에서는 에튜드, 2회에선 환상곡과 소나타, 뱃노래, 3회에선 녹턴과 스케르초, 4회에선 전주곡과 왈츠, 5회에선 폴로네이즈와 몇가지 소품, 마지막 6회차 공연에선 2곡의 협주곡,그리고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를 연주했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EMI신보는 바로 이 쇼팽사이클의 마지막 6회차 연주를 기록한 라이브 음반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협주곡1번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 원래 쇼팽콩쿨때 그를 스타로 만든 것은 협주곡 1번이었습니다. 88년인가, 대학로 인켈오디오월드에서 LD로 그 당시 공연실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스터치는 더러 있었고 템포가 빠르지도 않았지만 놀랄만큼 풋풋하고 싱그러운 프레이징으로 청중을 매료시키는 연주였는데, 문제는 이 연주를 CD로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내수용으로 발매된 '충격의 연주-부닌의 쇼팽콩쿨..'운운하는 CD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위에서 말씀드린 쇼팽서거 150주년 기념 5장 박스셋(EMI)에도 2번만 들어있지 1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음반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부닌의 협주곡1번이라 해도 큰 오류는 아닐 듯 합니다. (다른 음반이 있다면 만세불러 환영할 일이니 제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닌의 쇼팽 연주에 대하여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관능미' 입니다.
가벼우면서도 가는 붓처럼 끝이 잘 다듬어진,그리고 탄력있는 터치는 연주를 넘어선 애무에 가깝습니다. 절묘한 감각의 템포 루바토(주:연주자가 임의로 템포를 조금씩 바꾸는 것-쇼팽 연주에서 아주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와 프레이징 등도 그런 이미지를 뒷받침해 줍니다.
특히 실연에서는 마약을 복용하고 정사하는 듯한 황홀한 표정으로 입꼬리에 웃음을 말아올려가며 연주하는데, 이 때문에 유난히 여성팬이 많죠.
이번에 새로 나온 음반은, 그러한 면모에 이제 고전주의적 건강미도 더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의 스무살 무렵 연주-(66년생이니 이제 30대 중반입니다.)-들과 비교하면 템포가 상당히 빠르고 루바토의 사용은 절제되어 있는 편입니다. 음색의 영롱함과 세공미는 여전하면서도 터치에 좀 더 힘이 붙어있는 느낌이 납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일수도 있는 부분은 보완해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악장들이 주고 있는 위와 같은 느낌들에 더하여, 이 협주곡들의 2악장들에서 부닌이 보여주고 있는 터치와 프레이징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으로, 작곡 당시 쇼팽이 갖고 있던 애틋한 짝사랑의 감정이 만져질 듯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쇼팽서거 150주년 기념 박스셋에 실린 2번 연주와 비교해보면, 의외로 해석상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만, 다른 차이가 발견됩니다. 녹음입니다.
 부닌-쇼팽 5장박스.jpg)
여기 실린 피아노협주곡2번 역시 실황으로, 같은 도쿄 Suntory Hall 라이브입니다.(95년 3월26일의 연주.) 이때는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지휘하는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LPO)와 협연했습니다. 같은 EMI의 녹음인데도 사운드가 꽤 다릅니다. 오케스트라 음향이 다소 뭉친듯하게 들리는 단점은 있지만이 구반쪽이 좀 더 음색이 부드럽고 풍성합니다.
반면 이번에 나온 신반은 고역 쪽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언뜻 들으면 소리가 더 명료해 진 것 같지만, 부닌의 피아노 터치가 다소 경질化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구반에 비하면 바이올린 파트도 좀 퍼석거리는 느낌이 납니다. 자연스럽지 않군..하는 느낌이 제일 강해지는 것은 마지막 박수소리에서였습니다.
대신 공간감은 신녹음쪽이 더 우수하여 실제 무대 상황이 상당히 잘 드러나는 편이며, 피아노 연주에 부수되는 음향(피아노의 각 파트가 움직이는 느낌, 페달을 밟거나 체중을 건반위에 실어때리는 연주자의 몸짓 등의 표현)도 꽤 잘 살아 있습니다.
근래에 나온 쇼팽 협주곡 중에서 녹음이 마음에 들기로는, 크리스티안 짐머만(Krystian Zimerman)의 DG신녹음을 들 수 있겠습니다. 99년,자신이 Polish Festival Orchestra를 지휘하며 연주한 이 음반은 부닌의 EMI음반보다 좀 더 근접녹음의 느낌이 강하며,오디오적인 쾌감이 상당합니다.
 짐머만 쇼팽피협 신보.jpg)
연주 경향으로 보면 적극적인 루바토와 세부묘사에 대한 집중이 두드러집니다. 차 몰고 설악산을 간다고 치면,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해서, 미시령도 아니고 한계령으로 넘어가며 휴게소마다 놀다 가는 식의 연주랄까요.
전체적인 느낌을 비교하자면 부닌의 연주에서는 풋풋한 싱그러움을, 짐머만의 것에서는 보다 농익은 내음을 느낄 수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LA필과 함께 남긴 그의 구 녹음(DG Originals로 나와있음)에서의 물흐르는 듯한 느낌과는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다시 부닌의 신보로 돌아가서 총평을 하자면, '변화한 부닌의 모습을 보기에 충분하며, 그 자체로 보아서도 균형미가 뛰어난 좋은 연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완벽에 가까운 연주자로 성장하고 있는 부닌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가 본연의 개성에 창백함과 자의성을 더하여 좀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애호가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저만 그런가요? ^^;)
구매가치의 별은 4개반(★★★★☆)입니다. 협주곡2곡이 한장에 들었지만 라이센스로 나와서 값도 싼 편입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