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아바도의 베를린필을 추억하며
1989년 베를린 필 사상 처음으로 단원들의 자유 비밀 투표를 통해 아바도가 상임으로 뽑힌 지도 벌써 10년 세월이 넘었습니다. 카라얀 시절의 베를린필을 인적 구성으로나 사운드 컬러로나 모두 뜯어고치는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고 99년에는
위암 발병 소식으로 음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젠 그 모든 일이 '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베를린필의 음반을 내 온 DG측에서는 마에스트로의 베를린필 시대를 기념하기 위해 올들어 아바도의 라이브 음반을 집중 기획발매하고 있습니다. 'The Berlin Album'이라는 타이틀하에 지금까지 4장이 나왔습니다. 그의 여러 콘서트 기록들을 모은 축약판 'The Berlin Album'이 그 하나고, 나머지는 말러 교향곡 3번,7번,9번 실황입니다.
말러에 대한 아바도의 관심은 각별해 보입니다. 지난 4월26일 열린 베를린필 고별 콘서트의 레퍼토리에도 말러의 작품(뤼케르트 가곡집)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바도는 이미 말러 전집을 낸 바 있습니다. DG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커버로 하여 내놓은 이 전집은 80년대부터 90년대 전반기까지의 녹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카고 심포니(1번,6번,7번)와 베를린 필하모니(5번,8번),그리고 비엔나 필하모니가 등장합니다. 1,2,5,8,9,10이 실황입니다.
이번 베를린필 말러 실황 시리즈 중 현재 국내에 수입되어 물건이 풀린 것은 3번 뿐입니다. (7번과 9번도 가을이 되기 전에 들어올 것이라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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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은 여러가지로 그의 이전녹음과 비교하기가 좋습니다. 전집에 포함된 구녹음이 82년 발매된 것이니 20년의 세월차가 있고, 구녹음은 비엔나필-신녹음은 베를린필이며,구녹음은 스튜디오녹음-신녹음은 라이브이니 말입니다.
3번은 라이브 가운데서도 아주 특별한 라이브입니다. (위의 사진)
라이브 음반이라 하더라도 며칠간의 공연기록 중 가장 나은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말러3번 신녹음은 그야말로 단 한번 콘서트를 편집 없이 수
록한 진짜 라이브입니다.
공연 장소는 영국 런던의 로얄 페스티벌 홀, 1999년 10월11일 실황입니다. BBC가 저작권을 갖고 그 해에 방송했던 것을 DG가 이번에 음반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 * 교향악-성악으로 그린 창조의 서사시 |
2악장은 아주 소담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말러 자신이 '이것은 내가 작곡한 음악 중에서 가장 편안한 음악이다.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꽃과 같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3악장은 초원의 꽃들이 갈망하던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세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처녀림을 묘사합니다. 숲속의 온갖 동물이 우짖는 묘사-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한 정경을 떠올리곤 하는데..^^-가 나오고, 여름이 물러감을 아쉬워하는 듯한 포스트호른의 달콤한 선율이 흐릅니다.
4악장에서 말러의 시선은 이제 인간을 향합니다. 오케스트라가 그려내는 깊은 밤의 정적 속에서 알토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 가사를 통해 쾌락에 대한 인간의 갈등과 그에 따른 고통을 노래합니다.
5악장은 구원입니다.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Knaben Wunderhorn)'에서 차용한 가사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울며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천국의 기쁨(=5악장의 키워드)을 얻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4악장에 나온 알토와 오케스트라에 소년합창,여성합창이 가세합니다.
6악장은 느린 템포에 아름다운 선율로 치자면 말러의 작품가운데서도 5번 4악장과 함께 대표로 꼽히는 악장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 영원한 어떤 것으로의 승화 등이 담긴 악장이라고 얘기됩니다.
악장별로 주인공이 조금씩 다르고 니체철학이 등장하는 등 복잡한 인문학적 내용을 담고 있긴 한데, 어쨌든 대체적으로 구조를 보면 무생물->식물->동물->인간->천사->사랑(or 신)으로 나아가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말러식 진화론'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입니다.
| * 아바도의 구녹음, 번스타인 신녹음과 비교하자면... |
(대신 번스타인 신전집의 3번 연주는 2,3,6장이 너무 무겁지 않나 하는게 제 감상입니다.)
성악이 등장하는 4,5악장은 무난한 편입니다. 인간의 고민을 노래하는 안나 라르손은 안정된 가창을 들려주는데, 음색이나 표현력 등을 고려하면 아바도 구녹음에서 함께 공연했던 제시 노먼(Jessye Norman)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사실,1-5악장은 아바도 자신의 구녹음과 비교해 크게 다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가장 차이가 나는 곳은 6악장입니다. 진화의 낮은 단계를 묘사할 때 관악기의 포효를 사용했던 말러는 정화,승화된 세계의 묘사를 현악군에 맡깁니다.
구녹음 빈필 연주에서는 빈필하모니 홀과 어우러진 'silky string'의 맛을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신녹음 베를린필 실황에선 음색의 맛깔스러움은 덜해졌지만 대신 더 편안한 음향이 나옵니다. 그리고, 템포가 빨라졌습니다.
신녹음의 6악장은 구녹음에서보다 4분 반가량이 짧습니다. 구녹음은 6악장 도입부에서 매우 느릿한 템포로 끌고 가는데, 신녹음의 6악장 도입부는 앞 악장들과의 템포차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문제는 '깊이 공감하듯이'라는 말러의 6악장 악상기호에 어느쪽이 더 부합하느냐 하는 점일 것인데, 저는 이번 베를린필 실황쪽이 감상적이지 않은 내면성찰을 도와준다는 편에서 더 낫다고 느꼈습니다. 아바도 구녹음정도라면 또 모르지만, 번스타인 신녹음쯤 되는 느린 템포에 이르러서는, 내면을 들여다보기 전에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6악장 코다에 들어가면서는 팀파니의 연타가 감동을 배가시켜주는데, 이 부분은 아바도의 신녹음이 구녹음보다 확실히 낫습니다. 구녹음은 저역이 커트된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만, 신녹음에서의 팀파니는 음량상의 비중도 늘어났고, 해상도 측면에서도 훨씬 향상되어 '그래 이맛이야'를 외치게 해 줍니다.
아바도 신녹음의 녹음특징은 '매우 실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구녹음을 선호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신녹음은 트럼펫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등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는 원래 연주회장에서의 밸런스 그대로를 담아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게 제 소견입니다.
약음에서 강음까지의 스펙트럼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는데, 약음이 정말 작게 들리는 것도 특징입니다. 3번 교향곡의 악보를 보면 몇가지 모티프를 가지고 현악군이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휴대용CDP+헤드폰이나 순정품 카 오디오 등에서는 이를 제대로 재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전체적으로도 녹음 레벨이낮은 편입니다. 약음도 정확하게 들려주는 제대로 된 다이내믹스를 갖춘 시스템이어야 이 음반의 올바른 재생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전체적으로 볼때, 실황의 열기와 아바도의 개성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수작입니다. 관객의 박수와 환호를 충분히 살린 점도 마음에 듭니다. 라이브 음반에 박수를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가끔 해외의 온라인 클래식동호회에서도 논쟁꺼리가 되곤 하는데, 저는 충실히 넣는 쪽을 선호합니다.
이 한장으로 말러 3번 콜렉션을 끝내시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안들어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연주입니다.
아바도의 구녹음과 비교할 때 어느게 낫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아바도 구녹음은 전집(사진)으로 사시고, 이건 따로 사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매가치의 별은 4개반(★★★★☆)입니다.
이현식 hyunsik@sb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