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가을밤에 듣는 탱고
저는 최근 아주 우연한 기회가 생겨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오늘 소개하는 이 음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제목은 "Tango a trois"입니다.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의 트리오가 연주하는 탱고입니다.
탱고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탱고 하면 하클 동호인들께선 아마도 저 유명한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먼저 떠올리시겠죠. 저는 피아졸라를 그리 자주 듣지는 않았습니다. 갖고 있던 음반들도 처분해버렸습니다. '탱고'라는 음악에 제가 기대하는 것보다는 어렵고 심각해서요. '탱고를 그런 식으로 듣고 싶지는 않다'는게, 피아졸라를 들을 때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 수록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뽀르 우나 카베쟈'라는 곡 있지않습니까? 그 가사를 KBS-1FM의
한 프로그램에서 소개해 준 적이 있는데, "머리 하나 차이로"라는 뜻이라더군요. 경마에 넋이 나간 별볼일 없는
남자가 '말머리 하나 차이로' 운이 날아갔다고 한탄하는 내용이랍니다. 그 곡의 우아한 악상에 비해 얼마나 시덥지 않은 곡이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탱고란 원래 그렇게 거리에서, 거리의 사람들과 호흡하며 발전해 온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음반 "Tango A Trois"는, 피아졸라 류의 무겁고 심각한 탱고와 '뽀르 우나 카베쟈'류의 달콤한 탱고의 중간쯤에 서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참, 이 음반의 수록곡들은 유럽인의 정서로 한번 거른 탱고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온통 독일어로만 돼 있는 속지에 따르면, 이 CD에 실린 14곡은 피아노를 맡은 페터 루드비히(Peter Ludwig)가 작곡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저는 이 음반을 들으면서 '살타 첼로가 연주하는 탱고같군..'하고 느꼈습니다.
첼로 연주는 아냐 레히너(Anja Lechner), 바이올린은 안드레아스 라이너(Andreas Reiner)가 맡았습니다. 뮌헨 루스트슈필 하우스(Lustspielhaus)에서의 95년 라이브입니다.
아냐 레히너는 바젤에서 하인리히 쉬프를, 미국에서 야노스 슈타커를 사사한 클래식 연주자입니다. 바이올린의 안드레아스 라이너는 비엔나 태생으로 이자크 펄만을 사사했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오케스트라에서도 연주하는 등, 역시 클래식 베이스의 연주자입니다. 피아노 겸 작곡의 페터 루드비히는 유럽을 무대로 연극,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피아니스트이구요.
플레이를 해보면, 피아노가 가운데 뒤, 첼로가 그 앞, 바이올린이 왼쪽입니다.
첼로와 바이올린이 그리 넓게 벌려 서지 않고, 바이올린은 중음역대를 많이 쓰는 때문인지 몇몇 곡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위치가 분명히 갈라지지 않고 섞인 듯 들리기도 합니다.
제 오디오 셋팅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죠. 다른 분들이 이 음반을 들어보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합니다.
사운드는 차분한 색감입니다. '극한의 디테일..' 뭐 이런건 아닙니다. 전 요즘 그런거 잘 찾지도 않고요. 그러나 나올 만큼의 디테일은 충분히 나오고, 악기들의 무게감, 에너지감, 악기 주변의 공기의 느낌 같은게 잘 살아있어 공연장에서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사실감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제가 몇몇 트랙의 느낌을 요약 메모했던 것입니다.
트랙2. 현과 피아노의 고음이 인상적.. 열정적 분위기.
트랙3. 귀여운 분위기+ 감상적 우아함.
트랙5. 애조 띰. 비극적 분위기. 누구나 '아 탱고구나'할 수 있는 곡. 마지막 부분은 특히 연주자들이 정서 표현에 심혈을
기울여 듣는 이의 가슴에까지 떨림이 전해져 옴.
트랙6. 뭔가 '살타첼로'같은 느낌이 전해져 오는 곡.
트랙8. 조금 뭔가 어설픈듯한 작곡인데..첼로의 저음은 매력적.
트랙10.다소 피아졸라풍이랄까..그런 냄새가 나는데, 저음테스트용. 피아노와 첼로의 저음 격돌.
트랙12.중국풍이 가미된 귀여운 곡.
12,13,14에서의 바이올린과 첼로의 연주는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클래식 수업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답게, 탄탄한 테크닉으로
곡의 악상을 살려냅니다. 특히, 피아졸라 원작으로 보이는 14번곡은 세사람의 앙상블이 대단히 잘 연마돼 있어 박진감 넘치고 속도
꽉 찬 느낌입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지만 너무 가볍지고 않고, 적당히 고상하면서 한밤중에 혼자 분위기 잡기도 좋고, 그런가 하면 무드도 꽤 있고..그런
음반입니다. 녹음도 훌륭하구요.
파라오 클래식스(Farao Classics)라는 독일 레이블에서 나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