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토템이라는 회사는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지만, 의외로 그 진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적다. 이번 CES에서 우연히 부스를 들린 바 있는데, 무척 키가 크고, 세련된 이미지의 중년 신사가 환대해줬다. 토템을 주재하는 빈스 브루지스(Vince Bruzzese)라는 분으로, 회사를 설립한 시기가 1987년이니, 벌써 30년 가까이 이쪽 업계에서 활동한 셈이다. 그리 확 눈에 띠지 않지만, 지속적으로 성장세를 기록한 것을 보면, 확실히 이 회사에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실은 스피커 역사에서, 특히 북셀프에서 토템이 이룩한 업적이 상당하다. 특히, 모델 1과 마니 2와 같은 제품은 일종의 전설로 회자될 정도이며, 중고 시장에서 인기도 좋은 편이다. 막상 음을 들어보면 사이즈를 초월하는 저역의 재생과 광대역한 음에 깜짝 놀라게 된다. 따라서 한번 애호가 손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 않는 제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토템에 관심을 둔 이유는, 이 회사가 동양학으로 치면 일종의 음양오행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음양이 서로 대비되는 의미고, 오행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 아니다. 동양학에선 그런 단절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화(和)를 중요시하고, 밸런스를 찾으려고 한다.

그 주체를 이루는 오행, 그러니까 불, 물, 대지, 나무, 금속 등 5가지 요소들이 적절히 유기적으로 조화되어야 우주의 기가 제대로 순환된다고 볼 때, 스피커 역시 이런 오행의 요소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우주를 재현하기 위해선 스피커의 음양오행이 제대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형상(form), 기능(function), 예술(art) 그리고 기술(technology). 정말로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스피커 제조에 있어서 중요한 철학을 제안한 게 아닌가! 아마 이 부분만 갖고 파고들어도 근사한 책 한 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가장 이상적인 스피커는, 그 제조에 들어가는 여러 재료들이 멋지게 혼합된 것이다. 본 기만 해도 나무부터 여러 합성 물질, 래커, 쇠, 알루미늄 등 다양한 재료들이 투입되어 있다. 그 어느 요소도 빠지면 안 되고 또 어느 하나가 지나쳐도 안된다.

말하자면 이런 여러 물질적인 요소를 기(氣)라고 하면, 이런 재료를 교묘하게 설계해서 음이 나도록 만드는 이론적인 부분이 바로 리(理)다. 리와 기가 적절히 어우러지고, 음양오행이 조화를 이룰 때 제품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권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토템이 추구하는 음향 철학인 것이다.

 

북셀프가 전문이라고 하나, 토템은 톨보이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역시 작은 사이즈에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과 퀄리티가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 최고의 부품으로 무장한 포레스트 시그너처는, 우리가 토템의 음으로 알고 있는 내용을 보다 정교하고 세련되게 들려준다. 즉, 시그너처라는 에디션에 걸맞는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크로스오버의 경우 직원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하드 와이어링으로 처리한다. 기판으로 대체하면 편하겠지만, 음질 때문에 이 부분에 사람의 손길이 가미되는 것이다. 또 투입되는 부품들도 최고급이어서 캐패시터의 경우 진동에 강한 MR 타입을 쓰고 있다. 토템에 따르면 현미경으로 검침하듯 이런 부품이며 배선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밀하게 신경 쓴 것이다.

 

본 기가 정식 데뷔한 것은 2013년 록키 마운틴 쇼로, 작은 몸체에도 불구하고 풍부하고 다이내믹한 음이 나와 관람장을 찾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긴 이전 모델보다 가격표를 비싸게 매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외관을 보면 좀 볼품이 없다. 크고 멋진 스피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본 기는 왜소해 보인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음향적인 배려가 곳곳에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그냥 평범한 직사각형으로 보이는 디자인이지만, 모서리를 라운드 처리해서 음의 회절을 극력 억제했고, 뒤로 약간 누운 듯한 형상으로 설계해서 고역과 중저역의 시간축을 일치시키도록 노력했다.

 

한편 드라이버를 보면, 트위터의 경우 1인치 알루미늄 돔이다. 그리고 미드베이스는 6.5인치, 이른바 육반 사이즈다.  이 육반은 고역을 좀 억제하면 대신 풍부한 저역을 얻을 수 있고, 핵심이 되는 중역의 높은 밀도감을 얻을 수 있는 크기다. 많은 풀레인지 유닛들이 육반을 고수하는 점을 감안하면, 본 기 역시 그런 내용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긴 크로스오버도 쓰긴 했지만, 그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되도록 심플하고 고품질하게 설계한 점을 미뤄보면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내부는 단단한 보강재로 철저하게 다듬었고, 배선재도 은도금 동선을 썼다. 스피커 터미널은 정평있는 WBT제인데, 여기에 얇은 알루미늄 플레이트를 덧대서 보다 접속을 단단하게 했다.  본 기의 담당 주파수 대역은 33Hz~20KHz다. 요즘 유행하는 수퍼 트위터 개념의 높은 고역대를 커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이 사이즈에서 기대하기 힘든 풍부한 저역은 정말 로 발군이다. 또 뛰어난 중역대의 해상도는 보컬이나 각종 악기들의 표정을 다양하게 끌어내고 있으므로, 들으면 들을 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한편 감도는 87dB 정도인데, 메이커에선 50W 정도면 충분히 구동된다고 한다. 따라서 100W 내외의 인티 앰프로 집에서 얼마든지 만족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귀여운 녀석인 것이다. 바닥을 3점 지지한 점 또한 진동 대책에 무척 효과적임을 마지막으로 밝힌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교과서적인 매칭을 추구했다. 바로 천상의 배필로 여겨지는 오디오넷의 최신 인티인 SAM G2에다 크렐의 사이퍼 CDP를 동원한 것이다. 아마 음의 성격으로 볼 때, CDP를 오디오넷 제품으로 구매해도 무방할 듯싶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토>> 카라야 지휘, 무터, 요요마 등
-세자르 프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장조>> 뒤메이 & 피레스
-마틴 그루빙거 <>
-마델라인 페이루 <>

 

첫 곡으로 베토벤을 들으면, 사이즈를 초월해서 강력하게 밀려오는 음의 홍수에 깜짝 놀라게 된다. 든든하게 뒷받침된 저역을 바탕으로, 전대역이 골고루, 일체의 파탄 없이 밀어닥친다. 그 스케일이 눈을 감으면 중형기 이상으로 그려진다. 또 솔로를 담당하는 세 악기의 위치가 정확할 뿐 아니라, 개개의 음색도 빼어나서, 기본적으로 맛있는 요리를 대하는 느낌이다. 역시 오랜 기간 스피커를 만들고 또 다듬은 내공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프랑크를 들으면, 이 스피커의 장점에 그대로 포로가 된다. 정교치밀하고, 분해능도 높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을 듣고 즐기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 즉, 뭘 테스트하고, 체크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릴렉스하게 음악 자체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탁월한 음악성을 갖춘 제품이라 하겠다. 특히, 지나치게 뭘 설득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이쪽에서 다가가게 하는 점이 큰 강점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퍼커션 이펙트가 들어간 그루빙거의 작품은, 본 기의 오디오적 쾌감을 체크하는 데에 아주 유용했다. 공간 여기저기를 수놓는 다양한 퍼커션의 크기와 울림 등이 명확히 구분이 되고, 녹음 당시에 노렸던 이펙트가 정교하게 전달된다. 또 배후에 있는 합창단의 종교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서, 퍼커션의 움직임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 기에 일종의 모니터 스피커의 정확함도 숨어있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데뷔 당시 빌리 홀리데이의 재판으로 여겨졌던 페이루의 노래를 듣는다. 반박자 늦게 시작하는 교묘한 템포 감각이나 처연하면서 몽환적인 음색의 감촉까지, 듣는 순간 빨려들어 가게 하는 점이 뛰어나다. 가만히 들어보면, 각 악기와 보컬의 위치가 정확하고, 각각의 거리감도 상당하다. 그렇다고 스피커 뒤편으로 쫙 누워있는 쪽보다는 적절하게 앞으로 치고나오는 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오디오에 관심을 두다보면 끝도 없는 업그레이드 욕구에 시달리게 되는데, 만일 본 기를 만난다면 상당 기간 그런 욕망이 멈추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