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엔드 스피커의 서러브래드 에벤 X5
도플갱어라는 말이 있다. 자기와 똑같은 존재가 따로 있다는 것인데, 주로 심령과학이나 공포 영화의 테마로 쓰이는 소재다.
그런데 오디오계에서 필자에게 그런 존재가 있으니 바로 에벤 오디오의 설계자 마이클 뵈렌슨이 그 주인공이다. 일단 외모부터 약간
퉁퉁한 점이 비슷한 데다가 대화를 나눠보니 육식을 좋아하는 거며, 핑크 플로이드나 다이어 스트레이츠 등을 자주 듣는 거며, 또
오디오에 관한 생각에서 흡사 일란성 쌍둥이를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이것은 필자에게 큰 행운에 속한다. 필자와 똑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스피커를 만들었다면 결국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쓰면 무조건 팔이 안으로 굽을 수도
있으므로, 좀 신중하게 X5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일단 음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필자의 짧지 않은 오디오 구력에서 이런 충격은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스피커로만 말한다면 그랜드 슬램 이후 처음이라고 해도 좋다. 광대한 스테레오 이미지에 끝도 없이 투명한 음상 그리고 눈이 핑핑 돌만큼 빠른 스피드. 물론 이런 용어는 대개의 하이 엔드 제품들에 공통되지만, X5에 관해서는 여태의 평에 두 세 배의 강도를 더해야 한다. 한 마디로 이런 소리는 난생 처음이다. 혹시 싶어 다른 시스템으로 옮겼더니 갑자기 슬로우 모션으로 보는 비디오가 연상되었다. 저역은 뭉치고 윤곽이 불분명하며, 음장은 좁은 닭장처럼 두 스피커 사이에서만 펼쳐지고, 고역의 상쾌함 대신 톡 쏘거나 아니면 불어터진 라면처럼 흐리멍텅하고 ... 정말이다. 꽤 비싼 시스템이었는데도 말이다. 대체 스피커에 무슨 마법을 건 것일까 ?
마이클이 주장하는 것은 우선 스피드다. 그러나 무조건 빨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 유닛간의 시간축이 일치되어야 한다. 이른바 “타임 얼라인먼트”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확하게 음상이 정위하면서 여태 느끼지 못했던 기민한 반응과 넓은 음장이 형성된다. 만일 5~60년대에 녹음된 소스를 건다면, 물론 기존 스피커에 비해 훨씬 빠른 스피드와 넓은 음장을 경험할 수 있지만, 최첨단 기기로 각종 이펙트와 편집으로 동원된 녹음을 들으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깊이, 넓이, 높이 등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안방에서 투 채널로 멜로 드라마 비디오를 보다가 갑자기 2천석쯤 되는 대극장에서 첨단 THX 사운드로 무장한 스타 워즈 시리즈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
일단 스피커의 외관부터 보자. 가격이나 퀄리티를 볼 때 동급의 제품들에 비해 다소 날씬(?)하고 또 왜소하다. 몇 백 킬로쯤
가는 근육질과는 거리가 먼, 슬림한 스타일이다. 그러나 차분히 관찰해보면 마치 서러브래드의 준마처럼 잘 빠진 몸매에 매우 순발력이
좋고, 스피드가 출중하게끔 설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일단 태생부터 잘 달리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제품은 특이하게 한쪽 채널이 총 3개의 블록으로 형성되어 있다. 맨 밑이 베이스를 담당하는 블록으로 그 하부에 1,200W를 내는 파워 앰프가 내장되어 있다. 당연히 스피드를 감안, ICE 파워로 구성되었다. 그 위가 중고역을 형성하는 블록이고, 또 그 위가 베이스 블록이다. 가운데에 중고역 유닛을 두고 위 아래에 베이스 유닛을 배치한, 일종의 가상동축형 스타일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맨 아래에서 나오는 베이스용 출력은 중고역을 패스한 후 맨 위의 블록으로 연결된다. 즉, 베이스 부분만 구동하고, 가운데 블록은 별도의 파워 앰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베이스 모듈은 뒤에 마련된 스위치로 양을 조절하게 되어있으므로 시청 환경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고역에는 많은 출력이 필요치
않게 된다. 마이클에 따르면 30W 정도의 진공관도 충분하다고 한다. 사실 이 클래스의 스피커들은 대부분 구동에 애를 먹을 뿐 아니라,
특히 베이스의 콘트롤에서 많은 솜씨를 요구한다. 그 점에서 사용자는 기본을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누군 베이스 모듈에 파워 앰프를 내장한
스타일을 싫어하기도 하는데, 설계자가 스피드를 추구한 데에 비쳐볼 때 ICE 파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겨진다. 단, ICE 파워는
무색무취의 음색이므로 중고역의 델리커시나 컬러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중고역 블록에 어떤 파워를 걸어서 기존의
우퍼부와 음색상의 통일성을 꾀할지가 승패의 관건이라 하겠다.
여기서 유닛을 보면 제일 핵심이 트위터를 담당하는 부분이다. 흔히 리본 트위터라고 부르는 형태인데, 마이클은 플래너 마그네틱 트위터라고 명명한다. 실제 그는 앰프 설계자로 출발했지만, 리본 트위터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한 인물이다. 그가 최초로 만든 리본 트위터는 덴마크의 엘 에이 오디오 (L. A. Audio)에서 혼 타입과 연결해서 사용되었다. 리본과 혼이라면 웃기는 조합이 아니냐 물었더니 스피드가 일치하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그럼 플래너 마그네틱은 어떤 점이 리본과 다른가 ? 기존의 리본을 보면 필름으로 만들어진 리본 자체만을 살랑살랑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스펙상으로는 상당한 광대역과 디스퍼스한 음장이 확보되지만 에너지가 부족해 막상 스피커에 채용해보면 의외로 고역이 나오지 않는다.
또 나온다고 해도 답답하다. 기타줄을 튕기는 소리에 맥아리가 없고, 바이올린의 끝도 무디며, 심벌즈의 찰랑거림도 어딘지 가볍다.
반면 플래너 마그네틱은 그것을 둘러싼 일정한 챔버 전체에 압력을 넣어, 마치 일반적인 콘 스피커의 형태로 구동된다. 즉, 앞의
리본은 일종의 콘지처럼 떨리면서 강한 압력에도 꿋꿋하게 견디는 것이다. 사실 이럴 경우 기존의 리본이 가진 장점에 저왜곡, 하이
스피드, 에너지 등이 더해져서 매우 이상적인 형태의 트위터가 만들어진다. 본 기에서 이 트위터가 담당하는 대역이 2.4KHz에서
50KHz까지. 50KHz라니, 어디 믿어지는가 ?
그러나 문제는 이런 트위터와 타임 얼라인먼트를 맞출 유닛을 찾는 것. 마이클에 따르면 스캔스픽의 경우 트위터에서 앞으로 9Cm, 스카닝은
6.5Cm 정도 내밀어야 위상이 맞는다고 한다. 중역은 그렇다고 치고, 베이스는 또 어떤가 ? 여기서 X5의 강점이 나타난다.
중역을 보면 매우 특이한 재질임을 알 수 있다. 바로 4인치 세라믹 유닛이다. 그런데 가운데에 센터 캡이 씌워져 있다. 기존의 세라믹 유닛이 가진 하이 스피드와 저왜곡을 살리되, 이 유닛이 갖고 있는 딮이나 피크 등을 수정하기 위해 결국 센터 캡을 도입한 것이다. 그리고 드라이버의 코일 역시 새롭게 디자인해 하이 스피드를 꾀했다. 중고역 블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트위터와 미드 레인지의 배치에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런 고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쓰고 보면, 왜 베이스 모듈에 ICE 파워를 내장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10인치짜리 베이스 유닛의 성분이다. 이른바 알류미늄 재질을 사용해서 역시 순발력과 민첩성을 키웠다. 그러므로 중고역 유닛에 통상의 앰프를 걸면, 우퍼 블록과 정확히 시간축이 일치한다.
한편 인클로저를 두드려보면 매우 강인하면서도 무게가 가벼운 데에 놀랄 것이다. 무려 12겹의 카본 복합 소재를 샌드위치 시켜서 만들었다.
또 그 안쪽에는 글래스 소자가 들어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인클로저의 공명 수치. 베이스 모듈은 높게 잡아서 베이스가 담당하는 주파수
대역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한 수법은 중고역 모듈에 역으로 함으로써 또한 간섭을 배제하고 있다. 정말 대단히 치밀한 설계라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유닛 부분이 완벽한 만큼, 크로스오버는 간략화시키는 장점을 갖는다. 우퍼의 경우 아예 코일을 사용하지 않았고, 중고역은 불과 5개의 소자로 고안되어 있다. 공심 코일과 필름 콘덴서 정도로만 꾸민 것이다. 이렇게 크로스오버에서 꾸불꾸불 지체되는 부분이 없으므로 일체의 왜곡을 피할 수 있다. 스피커에서 문제가 되는 크로스오버 부분을 유닛의 개량으로 극복한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음에 대해 설명해보자. 우선 음장 이야기인데, 대부분의 스피커들이 두 스피커의 사이에 무대가 전개된다면 X5는 가볍게 그 바깥쪽까지 확장된다. 한 마디로 스피커의 존재가 사라지고 한쪽 벽 전체가 깊이, 넓이, 높이를 골고루 가진 대형 스테이지가 건립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매우 스피디해서, 이 커다란 무대가 결코 느리거나 둔중하지 않다. 그 점에서 베이스 음에 대한 마이클의 해석을 필자는 존중한다.
대개 많은 애호가들이 저역의 양에 주목하지만, 커다란 유닛이 둥 하고 울릴 때보다 작은 유닛 여러 발이 내는 저역이 양적인 면에서는 딸리지만 주파수 대역을 더 밑으로 내리고 또 스피드를 빠르게 하는 점은 아무래도 유리하다. 실제 윌슨 오디오를 비롯, B&W, 아발론, 피크 컨설트 등의 톱 모델들을 보면 이렇게 작은 구경의 우퍼 유닛을 여러 발 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시청은 소노리스의 대형 시청실에서 했다. 20평에 가까운 큰 공간이지만, 이 스피커가 내는 음장을 생각하면 오히려 좁을 정도.
CDP는 바이스의 제이슨 & 메데아 콤비이고, ASR의 인티 앰프와 콘래드 존슨의 프리 파워, 램의 프리 파워 등 다양한 앰프들을 동원해서
X5를 점검해봤다.
우선 팻 메스니의
윈턴 마살리스의 실황을 담은
안네 조피 무터의 <카르멘 환상곡>. 시작부터 쏟아지는 오케스트라의 어택이 다르다. 다른 조합에서 익히 들은 무터의 바이올린이 절대 나서는
법이 없고 또 압도하지도 않는다. 적절하게 악단과 균형을 맞추면서 절묘하게 악상을 풀어나가는 모습에 하등 과장이나 왜곡이 없다. 넓은 호수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라고나 할까. 그 여유는 역시 한쪽 벽을 완벽하게 뒤덮은 자연스런 음장 덕분이리라. 태산처럼 우뚝 솟은 고고한 음장.
마지막으로 정 명훈 지휘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4번의 1악장. 대체 작곡가는 무슨 생각으로 불협화음과 이펙트 음 등을 막무가내로 소란스럽게 쏟아낸 것일까 ? 그런 의문투성이의 이 CD가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제자리를 갖춘다. 단원 하나하나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정밀하게 악기군이 그려지며 이쪽에선 마치 지휘자의 자리에 앉은 듯 순간순간 돌출되는 악기들의 표현과 음색을 포착해낼 수 있다. 워낙 복잡한 곡을 알기 쉽게 잘 풀어헤친 지휘자의 솜씨라고는 해도, 이 작품이 이토록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줄은 여태 몰랐다. 이렇게 오케스트라가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는 음장이라면, 또 각 악기들이 세세하게 구분되며 제 목소리를 내는 실력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눈을 감으면 가상현실의 세계속으로 진입하는 듯하다. 메트릭스가 말한 세계가 이런 것일까 ?
얼마 전 골드문트의 레바숑 사장을 만났을 때 레오나르도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타임 얼라인먼트의 중요성을 수 차례에 걸쳐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하이 스피드에서, 각 대역의 시간축 일치라는 테마로 하이 엔드 오디오계가 이전한 듯싶고, 그 첨단에 X5가 있음은 분명하다. 일단 이 음을 들으면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호주머니 사정일 뿐이다.
- 이종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