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의 왕국 덴마크의 얼굴 달리의 야심작 멘토 6
그런데 덴마크 하면 스피커부터 떠오른다. 물론 그리폰같은 우수한 앰프 메이커가 있기는 하지만, 스카닝으로 대표되는 오디오 테크놀로지사부터 다인오디오, 스캔스픽, 히큐폰 등 뛰어난 유닛 메이커가 많고, 피크 컨설트, 에벤 등 최근에 주목받는 스피커 메이커들도 많다. 듣기로는 덴마크 정부의 보조 아래, 약 300여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전문적으로 일하는 스피커 제조 업체도 있다고 한다. 덴마크인 설계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이웃집에서 생산해내는 유닛에 또 도면만 주면 척척 만들어내는 공장까지 근처에 있으니 얼마나 일하기 편리한가.
그러나 이런 스피커 제국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오늘의 덴마크가 있기까지 혁혁한 전과를 올린 메이커는 아무래도 달리(Dali)가 아닐까 한다. 여기서 잠시 달리라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실은 “Danish Audiophile Loudspeaker Industries"의 준말이다. 즉, 덴마크 오디오 애호가가 만든 스피커 회사라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고, 그런 면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 오디오 업계는 달리와 같은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업체의 출현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달리라는 메이커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983년. 이제 거의 4반세기를 버텨온 기업인 셈인데, 주로 중저가의 제품들을 생산한 만큼, 하이 엔드 유저들에겐 오히려 생소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회사의 제품, 만만히 보면 안된다. 특히, 원가 절감을 위해 외관이나 포장이 다소 수수하고 어떻게 보면 촌스럽기까지 하나, 가격만 보고 그저 그런 소리가 나오려니 생각하면 한 방 먹을 수 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달리의 보급품 스피커에 놀란 적이 한번 있다. 아마 컨셉트 시리즈였던 것 같은데, 200만원대 초반의 AV용으로 생산된 일종의 프론트 스피커였을 것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AV용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얼핏 광고를 보고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홍대앞에 잘 가는 음반 가게가 있어서 오랜만에 들렀다가 20평쯤 되는 매장을 풍성하게 꽉 채운 소리에 놀라 살펴보니 바로 그 제품이었다. 실은 이 가게의 주인, 가끔 오디오를 바꿔가며 부지런히 본 사이트의 중고 장터도 이용하는 매니아이기에, 새삼 그의 안목에 감탄했고 또 달리의 실력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제품 역시 과연 달리라 할 만큼, 내용도 충실하고 음질면에서도 별로 흠잡을 구석이 없다. 역시 4반세기 동안 스피커 한 분야에만 정진해온 구력이 돋보이는 제품이라 칭찬하고 싶다. 특히, 밸류 포 머니라고 해서 가격대비 성능을 따진다면 두 말할 필 요없이 구입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필자는 사면 이득이라는 말을 가끔 사용하는데 이때는 평론의 직분을 잊고 순순히 유저로서의 입장에서 쓰는 경우다. 이번 멘토 6의 경우 당연히 여기에 해당한다.
달리 스피커의 특징을 보면, 트위터쪽에 리본과 소프트 돔 두 개를 장착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사실 리본과 돔 트위터 모두 장단점이 극명하기에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쓴다는 발상엔 신선한 점이 있지만, 득보다 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발상의 제품들을 처음 봤을 땐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트위터에 이런 장난(?)을 쳤을까 속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식 시청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어차피 오디오의 평가라는 것은 철저히 경험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특히 스피커 부분이 그렇다. 예전에 니트 어쿠스틱스의 제품을 보고 상판에 두 개의 트위터를 달아놓은 데에 코웃음치고 말았지만, 정작 소리를 듣고는 매료된 일이 있는데, 이번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달리의 전제품이 이런 컨셉으로 트위터를 만들지 않는다. 정확하게 “리본/소프트 돔 하이브리드 트위터 모듈”이라고 칭한 이런 트위터는 달리의 다양한 제품군 중에서 유포니아, 헬리콘, 멘토, 이콘 시리즈에서만 사용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시리즈야말로 달리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에 소개할 멘토 6는, 오로지 하위 기종으로 멘토 2만 가질 정도로 AV나 여타의 사용을 배제한 순수 오디오파일용이다. 그러므로 비록 가격대는 일반적인 중급대 이하지만, 달리로서는 자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모델이라 하겠다. 하긴 멘토(mentor)라는 단어가 지도자나 스승을 뜻하는 말이니, 스피커계의 사부쯤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물론 필자도 이 모델을 듣고 속으로 “사부 !”하고 외쳤으니까.
멘토 6는 2.5웨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얼핏 보면 네 개의 유닛이 전면에 보이지만, 위의 두 개는 트위터부니까 그렇다고 치고, 나머지 두 개가 1.5웨이를 담당한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뜻인가 ? 여기서 두 개의 유닛, 이른바 미드베이스가 담당하는 대역이 조금 틀리다. 크로스오버 주파수를 보면 하나는 800Hz에서 끊어져 있고, 또 하나는 3KHz에서 끊어져 있다. 즉, 두 개 모두 밑으로는 36Hz까지 내려가지만, 위에서 끊은 대역이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그 중, 밑의 유닛이 36~800Hz까지 담당하는, 일종의 서브 우퍼 개념이어서 0.5 웨이를 할당받은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두 개의 트위터가 담당하는 대역 역시 틀리다고 하니 여기서도 1.5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돔 트위터는 12KHz까지 담당하지만, 리본 트위터는 34KHz까지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1.5웨이에 1.5웨이를 더한 형국이 되니 갑자기 계산이 복잡해진다. 이걸 과연 3웨이라고 해야 할지 혹은 1.5+1.5웨이나 2.5+0.5웨이라고 해야할지 적잖이 헷갈리는 것이다. 일단은 메이커의 추천대로 2.5웨이라고 해두자.
본 기의 외관을 보면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전술한 대로, 하이브리드 트위터부 외에 별다른 특색이 없는 것이다. 뒷면을 보면 포트가 두 개 나 있는데, 하나는 고역용이고 또 하나는 중저역용이다. 그 밑으로 바이 와이어링을 할 수 있게 채널당 2개의 스피커 단자가 마련되어 있다. 인클로저 밑에는 따로 받침대가 있는데, 그 밑으로 미세 조정을 할 수 있는 4개의 스파이크가 별도로 마련된 점은 매우 믿음직스럽다. 어찌 보면 기본에 충실한 만듦새고, 이런 포름이라면 국내 업체들도 얼마든지 도전할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 음을 들어보면 이 메이커가 얼마나 풍부한 노우 하우를 갖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도무지 이 가격대의 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매우 기민하고, 와이드 레인지하며, 밸런스가 잘 잡힌 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고역에서의 상쾌함은 주목할 만하며, 그것이 전체적으로 투명도와 해상도를 높이고 있다.
시청을 위해 동원한 앰프는 첼로의 코랄 프리와 랩소디 파워이고, CDP는 린데만 820이다. 처음 건 디스크는 SACD층으로 읽은 에릭 빕의 "Lonesome Valley". 이 트랙에서 중요한 것은, 중앙의 보컬과 왼쪽 채널의 만돌린 사이에 위치한 하모니커다. 해상도가 낮거나 음장이 약하면 이 하모니커는 이내 묻히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양감이 풍부하고, 신명난 소리가 재생된다. 리본 트위터의 강점이라 느껴지는 대목은 역시 기타줄을 튕기는 부분. 매우 첨예하면서도 그 끝이 부드럽게 마무리된다. 여기에 다소 텁텁한 빕의 보컬이 중역대를 장악해 생각 외로 호소력이 뛰어나고, 양감도 풍부한 인상이다. 가격적으로 이보다 두 배 이상 하는 제품에서나 가능한 레졸루션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에디 히긴스의 "It's Magic" 역시 두 색소폰 주자가 연출하는 관능미가 일품으로 다가온다. 풍요롭고, 따스하며 약간은 까칠까칠한 맛이 과거 좋았던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데, 주법은 비슷하지만 음색은 판이한 두 연주자의 개성이 뚜렷이 부각되어 같은 감상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약간 거친 음색을 수반한 해밀턴과 풍윤하게 바리톤 음색을 띠는 켄의 대화는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즐겁다. 중간중간 리드미컬하면서 유려하게 프레이징하는 에디 히긴스의 피아노 플레이는 물론 백점만점. 괜히 거장인가. 이렇게 세밀하게 현미경 관찰하듯 살피면 그들의 천의무봉 솜씨에 탄복하고 마니까.
장르를 바꿔 로저 노링턴 지휘의 말러 교향곡 1번을 듣는다. 1악장에서 멀리 들려오는 트럼펫이며 각종 관악의 울림이 안쪽 벽 너머에서 시작되는 듯 아득하기만 하고, 배후에 긴박하게 깔리는 현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하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낌새다. 이후 점차 음악이 고조되면서 총주에 다다를 때의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일목요연해서 작곡자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특히, 점검을 위해 튼 5악장에서의 광란은 너무나 현란해서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이다.
과연 이런 가격대에서 이 정도 퀄리티를 재생할 수 있는 스피커가 얼마나 될까 ? 일체의 과장이나 기교없이 정공법으로 만들어 합리적인 가격으로 낸 멘토 6에는 제일 중요한 튜닝이나 경험과 같은 무형의 자산은 빠져있는 것 같다. 만일 그것까지 가격으로 매긴다면 훌쩍 1천만원을 넘겨도 할 말이 없다. 그 정도의 실력은 충분하니까 말이다. 요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디오 가격이 치솟는 마당에 역으로 고생하는 것이 바로 이런 가격대의 제품들이다. 꼭 손님들을 데려와 자신의 시스템을 자랑할 심산이 아니라면, 이 정도 기기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음을 만들 수 있다. 기회가 되면 일청을 권한다.
